2월 28일, 나가르나우사부터 파트나 거쳐 하지푸르까지 61km 행선

회주 자승 스님을 필두로 순례단이 옛 이름 파탈리푸트라, 한역 경전에서는 화씨성으로 불리는 파트나로 향하고 있다. 옛 제국의 수도였던 파트나에는 도시로 향하는 트럭과 행렬이 새벽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회주 자승 스님을 필두로 순례단이 옛 이름 파탈리푸트라, 한역 경전에서는 화씨성으로 불리는 파트나로 향하고 있다. 옛 제국의 수도였던 파트나에는 도시로 향하는 트럭과 행렬이 새벽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부처님은 함께 행복해지는 삶을 참구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평생 동안 다른 이들도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어리석음을 깨쳐서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

부처님이 걸은 길을 따라 함께 정진하고 있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2월 28일 부처님 열반의 길을 따라 이 파탈리푸트라, 아소카왕의 수도로 불리는 ‘파트나’에 도착했다. 갠지스 강변의 파트나는 총 11km에 달하는 파트나 간디교를 건너야 진입할 수 있다. 이날 순례단은 평일 수많은 차량으로 인하여 일부 구간 차량에 탑승, 하지푸르까지 총 61km를 행선했다.

순례 20일차를 맞은 2월 28일도 어김없이 새벽예불로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 20일차를 맞은 2월 28일도 어김없이 새벽예불로 순례를 시작한다.

한역 경전엔 화씨성(華氏城)으로 익숙한 곳으로 꽃으로 덮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한역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가다국과 마우리아왕조의 수도였던 파트나는 큰 번영을 누렸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파트나는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자타샤트루왕이 밧지국을 정복하기 위해 세웠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에는 큰 도시가 아니었던 이 곳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고귀한 사람들이 머물고 상인들이 왕래를 계속 하는 한 이 곳은 파탈리푸트라라 불리는 물품이 가득 든 통을 풀어 놓는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다. 아난다여, 파탈리푸트라는 세가지 재난을 가질 것이니, 불로 인한 재난과 물로 인한 재난과 상호 불신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파트나는 굉장히 번잡한 도시였다. 파트나를 드나드는 길에는 트럭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순례단의 행선에 오가는 트럭들이 마치 행렬을 덮치기라도 할 듯 굉음을 내며 지나갔지만 순례단은 계속해서 정진했다.

순례단이 향한 파트나가 번영을 누린 이유는 바로 4개의 강이 만나는 수운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칸타키강과 골고라강, 그리고 야무나강과 데칸고원에서 시작한 손강이 합류하여 흐른다. 이 곳에서 부처님은 네 개의 강이 만나는 곳을 보시고 사람도 신분차별이 없음을 설법하셨다고 한다.

“세상에는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같은 신분차별이 있지만 여래의 법 안에는 차별이 없다. 네 개의 강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흐르듯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 다 하나가 된다.”

현재의 파트나는 비하르주의 주도이긴 하지만 200만명이 거주할 뿐이다. 사원과 수행처라는 비하르란 이름의 주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카스트로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낙후되어 인도에서 가장 못사는 지역이 되었다. 파탈리푸트라의 세가지 재난 중 상호불신, 인도에서 계급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부처님이 말하신 파트나의 세가지 재난 중 하나가 아닐까.

파트나 간디 대교에 오르는 입구, 수많은 차량들로 정체된 모습이다. 상습 정체구간인 이 곳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뻥튀기 등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순례단은 행선이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 대교 구간을 차량으로 이동했다.
파트나 간디 대교에 오르는 입구, 오른쪽이 대교 입구로 수많은 차량들로 정체된 모습이다. 순례단은 행선이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 대교 구간을 차량으로 이동했다.
평일 1~2시간 넘게 정체가 이어지는 파트나 간디교 진입구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뻥튀기를 팔고, 신문이나 음료를 파는 상인들이 차량 사이를 누볐다.
평일 1~2시간 넘게 정체가 이어지는 파트나 간디교 진입구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뻥튀기를 팔고, 신문이나 음료를 파는 상인들이 차량 사이를 누볐다.
순례단 차량은 불교기와 상월결사기를 차량에 달고 대교에 올랐다. 

파트나까지 이날 순례단은 고속도로를 지날 수 밖에 없었다. 새벽 행선이었던 NH19번 도로와 달리 평일 오전 8시 경이라 경찰의 통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차량들로 상습 정체구역인 이 곳에서 행선을 고집할수는 없었다. 도보로 행선하고 싶은 순례단의 바람에도 안전의 위험으로 회주 자승 스님이 결단을 내렸다.

결국 차량에 나뉘어 탄 순례단은 36km를 이동했다.

순례단은 부처님이 빔비사라왕의 초청에도 멀지도, 그리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대중을 섭수한 것처럼 파트나 외곽 하지푸르의 힌두교 사원에 숙영지를 차렸다.

부처님이 강물을 보며 설법하시고, 아소카왕의 주도 하에 일어난 3차 결집 역사의 현장, 그리고 참회하는 승단의 상징인 포살법회를 있게한 파트나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순례단은 오늘도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하는 하루를 보냈다.

순례단의 3월 1일 부처님이 좋아하신, 그리고 각별한 인연이 있는 바이샬리, 경전에는 베살리로 전하는 곳 까지 행선한다.

순례단 스님들이 버스에 나눠타고 대교 진입로에서 대교에 오르고 있다.
순례단 스님들이 버스에 나눠타고 대교 진입로에서 대교에 오르고 있다.
순례단은 파트나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하지푸르에 숙영지를 세웠다. 파트나 시내가 번잡한 것을 고려하여 조금 더 외곽까지 하루 이동거리를 늘려 숙영지를 예정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