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년 문수보살 감응 받아 서당지장 스님 가르침 사사 백상회해 스님 선법도 이어 827년 37년만에 귀국길 올라 불립문자 등은 당시 파격 설악산에서 40년간 수행 보조체징 스님에 이르러 꽃펴 가지산문과 선불교로 이어져 도의 스님은 중국 6조 혜능 선사의 남돈선(南頓禪)을 신라에 최초로 전래한 스님으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도의 스님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하대가 시작되는 제37대 선덕왕(780-784)대에서 제41대 헌덕왕(809-826) 사이에 활약했다. 〈조당집〉(祖堂集) 권7 〈설악산진전사원적선사전〉(雪嶽山陳田寺元寂禪師傳)에 따르면 도의 스님의 성은 왕씨(王氏)로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다. 북한군(北漢郡 또는 北漢山)에서 태어났
중국에는 4대 불교성지가 있다. 바로 아미산, 오대산, 보타산, 그리고 구화산이다. 그중 구화산은 지장성지로 이름이 높은데 바로 지장왕보살로 불리는 김교각 스님으로 인해서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 성덕왕(698년)의 아들로 당나라 고종 영회 4년 24세에 출가, 흰 개(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입당구법(入唐求法)은 그 당시 신라 스님들 대다수가 서원했던 것으로 김교각 스님도 그중 하나였다. 중국에 건너와 각 지방을 돌며 불법을 구하다 스님은 먼저 오대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님이 오대산에 오르자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오대산은 갑자기 기우뚱 하면서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이에 오대산이 자기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안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은 다시 사방을 운유
당나라 4년 유학 후 귀국 밀교 진언으로 당군 물리쳐 사천왕사 ‘풀입 설화’ 남아 금광사 건립에서 도력 보여 밀교종파 신인종 개창·보급 광학·대연 등 고려까지 법맥 명랑 스님은 신라 문무왕대에 활약한 밀교승려이다. 우리나라에 밀교가 들어와 자리잡는 데 명랑 스님의 공헌이 컸다. 아울러 그는 밀교 특유의 문두루비법을 써서 국난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도 하였다. 신인종을 창시하여 독자적인 밀교 계보를 만들었는데,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명랑 스님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이었다. 에서는 ‘금광사(金光寺) 본기’라고 출처를 대며 명랑 스님의 출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명랑 스님은 신라 출신으로 자는 국육(國育)이며,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이고, 자장 율
화엄종 정수 갖고 신라 귀국 교단 정비·왕권 강화에 기여 통일신라 혼란 막고 화합 이끌어 보살 상주 신앙 불국토사상의 기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사회 혼란을 극복하는 중심사상으로 자리한 불교의 기반을 다진 이가 있다. 바로 ‘해동화엄초조’로 불리는 의상대사가. 의상대사는 화엄종의 교리를 집대성하고, 교단을 정비해 통일신라에서 불교가 융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의상 대사의 아버지는 김한신(韓信)으로 신라의 귀족이었다. 진평왕(眞平王) 47년(625)에 태어난 의상 대사는 일찍이 선덕여왕 13년인 644년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의상대사의 한자표기를 ‘義湘(의상)’으로 하고 있지만 ‘義相(의상)’이나 ‘義想(의상)’으로 기록되고 있는 문헌도 있다. 화엄종 지엄
대신 자리 거부하고 당나라 유학 신라도 문수성지 오대산 있음 밝혀 귀국해 계율 정비, 불교 부흥 계기 통도사·월정사·신흥사 등 창건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한느 문수보살. 이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이 중국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정립한 이가 있으니 바로 자장(慈藏) 율사다. 자장 율사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워 신라의 기상을 널리 떨쳤으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에 걸쳐 계율을 정비해 신라의 국력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지 않으리 〈三國遺事〉 ‘慈藏定律’ 條의 기록에 따르면 자장율사의 속성(俗姓)은 김 씨로서 이름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공의 아들이다. 무림공은 진골 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으나 늦
신라왕자 출신…출가해 唐 유학 정중종 열고, 새 흐름 만들어 마조 도일에 영향, 구산선문 원류 중국 사천(四川)에는 남종(南宗)도 북종(北宗)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일문(一門)이 전해진다. 바로 정중종(淨衆宗)이다. 지난 일들을 되새기지 않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항상 지혜를 간직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정중종. 이 정중종을 일으킨 이가 바로 정중 무상(淨衆 無相, 684~762) 선사다. 정중종은 사천성 정중사(淨衆寺)에 머무른 무상 선사의 선법을 말한다. 사실 정중 무상 선사가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08년 금세기 불교사의 큰 수확인 돈황의 발굴과정에서 무상 선사의 게송인 〈무상오갱전(無相五更轉)〉과 〈무상어록(無相語錄)〉이 발견되며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그의 존재가 세
7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의 경쟁관계는 치열해 졌다. 삼국은 국력을 극대화해 정세를 주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문화역량을 키우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초 중국 구법승들의 활동도 보다 활발해 지는데 원광 스님 이후 627년 경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원측 스님(613~696)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남북조 교학연구 성과를 종합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종파불교가 형성됐으며 천태종을 필두로 화엄종과 법상종이 형성돼 중국교학의 정립기를 맞이했다. 원측 스님은 이 시기 새로운 교학의 진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측 스님은 유학 후 귀국하여 활동한 원광, 자장 스님과는 달리 신라에 귀국하지 않고 계속 중국에 머물며 사상을 선양했다. 원측 스님은 신라 진평
삼기산에서 유·불·도 수행 25세에 중국 금릉으로 유학 명성높자 진평왕 귀국 간청 돌아와 국서 제작 도맡아 現운문사에 주석하며 불법펼쳐 세속오계 등 백성 교훈 만들어 신라 으뜸 승려로 추앙받아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탑 남아 불교를 숭상한 신라는 삼국시절 한반도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중국과 소통이 힘들었다. 고립돼 자칫 나라가 어려워 질 수 있을 때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이은 스님이 있었다. 바로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다. 스님은 원래 신라 중기 진골 출신으로 스물다섯 살에 출가해 경주 삼기산에서 수도를 하다 중국에서 불교를 배워오기로 결심한다. 원광법사에 관해서는 당나라 〈속고승전〉에 전해진다. ‘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 씨로 본래 삼한에 살았는
위구르 지역서 80화엄 입수 중국 복건 지제산에 절 세워 회창법난 피해 귀국. 보림사 창건 서역·중국·신라 화엄 통섭한 선지식 중국 동남쪽 복건성 동북단 지역에 자리한 영덕 지역은 불교가 가장 일찍 들어선 지역 중의 하나이다. 진나라 때 이미 불교가 전파되어 불법 구도 활동이나 매장 풍속이 있었다. 지제산은 영덕 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천관보살과 그 권속이 상주하는 불교 도장에서 유래됐다. 지제산은 오늘날 중국에서 범어로 산명을 삼은 유일한 곳으로 천관의 지제산은 문수의 오대산, 보현의 아미산, 관음의 보타산, 지장의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오대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 이 지제산에 천관사상을 처음 전파한 고승이 신라 원표(元表) 스님이다. 원표 스님은 구도의 원력 하나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부처님 교화성지 참배… 불전 들여와 초기 간다라지역, 후기 인도 중 하부 한국출신 14명 중 귀국한 스님 2명 불과 일연 스님 “구름따라 돌아온 이 없어라” 묘사 인도로 떠난 구법승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육로와 해로가 그것이다. 해로는 바람과 해류를 잘 타면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었지만 육로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구법승들이 택한 육로는 거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으로 오늘날에도 쉽게 지날 수 없을 정도로 험하다. 장안에서 서쪽으로 돈황으로 가면 파미르고원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진다. 동서로 6천리, 남북으로 1500리라는 거대한 이 사막을 지나면 7000m가 넘는 산들이 수없이 펼쳐지는 힌두쿠시 산맥이 나온다. 이런 길을 걸은 구법승들에 대해 일연 스님은
불경(佛經)을 등에 얹고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 행각승(行脚僧)을 묘사한 구법승도(求法僧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병술(丙戌)년에 만들어진 백제 글이 쓰여진 기와. 겸익 스님은 백제에 율장 등을 가져와 계율을 중시하는 백제율종을 일으켜 세웠다. 〈부여읍지(扶餘邑誌)〉는 부여 대조사(大鳥寺)가 겸익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위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우리나라 최초의 인도 구법승 추앙 정확한 사료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중인도서 ‘계율’ 공부, 백제 율종 세워 백제불교 계율생활화운동 전개 토대 ? 구법승 중 널리 알려진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이 있지만 그보다 200년 앞서 인도로 건너가 불경을 가져온 스님이 있었다. 바로 겸익(謙益) 스님이다. 겸익(謙益)스님은 백제 무령왕(
연재에 들어가며 부처님 법을 쫓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간 스님들의 전통이 있다. 한국 역사에 있어 이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한 이들을 우리는 구법승(求法僧)이라 부른다. 온갖 위험이 기다리고 있던 미지의 세계에 그들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깨우쳐갔다. 21세기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새롭게 접하고 있다. 옛 구법승들의 치열한 인간 극복의 현장에서 우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5세 당·19세 인도로 떠난 청년정신 8대 영탑순례 등 당대 문화 선도 신라서 태어났지만 ‘세계인’으로 활동 15세 소년 혜초의 세계사 유례없는 도전정신 구법승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스님(70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