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대상에 대한 내 사랑은 지나고 보면 늘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상대에게 끌려 애틋하고 그립고 매일 보고 싶어지면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 사랑이 영원하길 성급하게 꿈꿨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언제나 나 홀로 낯선 곳에서 찬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얼굴과 가슴에 몰아친 흙바람도 사랑을 위한 시련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견디며 기다렸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온몸이 모래에 파묻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난 억울하지 않다. 결실을 맺은 사랑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혼자만 영원한 사랑이라 믿고 애태웠어도, 사랑은 온전히 아름답다. ‘사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설렌다.
내가 여행을 떠나며 다짐한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각오의 모습이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은 강력한 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늘 기대하며 믿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무너져도 다시 쌓고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요새와 같은 멘탈을 만든다면 분명 상처받진 않을지 몰라도 성 안에는 홀로 살아야 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모두와 어울려 살아가는 시장과 같은 삶에서 그 안에 있는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스스로 믿는 것임을 알았다. 또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후반부로 들어서는 게 아닐까? 절집을 빠져나와 다리의 끝에서 작은 찻집을 만났다.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라는 작은 문구가 가슴을 따뜻하게 만
동화나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하며 찾아가는 곳은 대부분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실망을 가득 안고 돌아 나오면서 그래도 스스로 위안한다면 그래도 아직은 내게 세상에 대한 기대가 많이 남아 있다는 믿음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더 이상 놀랄 것도 기대할 것도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믿고 있었던 무언가가 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동화나 소설, 영화에 공감해 울고 웃는 자신을 더 이상은 발견할 수 없거나, 내가 사랑하고 아낀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서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늙어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날이 아닐까? 다시 기대하고, 무너지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생이 아름답지 않을까? 세상은 다 그럭저럭 이라는
맨살을 드러낸 산봉우리는 대부분 역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래가 쌓여 굳으면 사암, 자갈이 쌓여 굳으면 역암이 된다. 아주 오래전 바다 속에서 위로 올라갈 시간을 기다리며 만들어진 산이 그렇다. 그런 산의 바위에는 가끔 조개껍질이 보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퇴적물이 쌓이고 단단하게 굳어진 산은 서서히 바다 위로 솟아올라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 비바람에 깎이고 시간을 견뎌내며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어냈다. 산 앞에서 내가 아파하고 조급해하는 많은 문제들과 살아온 시간, 살아갈 시간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고 스스로 작아졌다. 조급해한다고 이뤄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늘 그러고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이 산을 내려가면 이 순간에 느낀 시간의 사소함과 부족함을 잊고 또 마음이 바빠지겠지만, 산에 오르는 일은
우리 삶, 산을 오르는 것. 사람마다 산의 높이도, 오르는 길도, 만나는 사람도 다르다. 어떤 이는 매우 험하고 높은 산을 변변한 장비 없이 오를 것이고, 누군가는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깎아지른 절벽을 외줄 하나에 의지해 오르고, 어떤 이는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또는 서로 같은 길을 가기도 하고, 잠시 헤어져 다른 길을 걷다 다시 만나기도 한다. 어떤 이와는 함께 도와가며 오르고 때론 서로 앞서가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이토록 힘들게 오랜 시간 오른 산 정상은 어디일까? 그곳에 행복이 있을까? 서글프지만 정상은, 그러니까 우리 삶의 종착은 죽음이다. 그러나 우린 죽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은 사유의 순간에만 인식될 뿐이다. 내일은 확신
부처의 상인지 보살인지,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의 형상인지 알 수 없는 석물들이 가득 늘어선 운주사를 걷는 것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한다. 불교든, 공부든, 삶이든 심각해지고 무거워질수록 진리와는 멀어진다. 진리는 자명하고 명징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시(詩)’와 같아서 단 한 장면, 한 표정에 몇 권의 책에 담긴 내용 이상이 담기기 때문이다. 안개 낀 아침 사람 없는 길을 걸으며 석탑과 돌부처를 만나면 누구나 본래 각자가 지니고 있는 깨달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한 부처도 특별한 깨달음도 없으며 결국 본래 그러한 것을 아는 것이 불교다. 곧 자신이 유일한 존재임을 알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즐겁게 말이다. 모든 것은 늘 즐겁지도 않고, 늘 우울하거나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이 그 형상을 거의 모두 사라지게 했지만 바위에는 분명 부처가 새겨져 있었다. 일부 남아 있는 옷의 주름과 수인, 광배가 흐릿한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절집에 있는 오래된 석물과 마애불을 좋아한다. 특히 폐사지에 남은 석불은 남아 그 자리의 시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얼굴이 거의 남지 않은 마애불, 흐릿한 연꽃문양, 날개의 일부가 남은 비천상 등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그 빈자리를 그려 넣는다. 마애불 아래 절을 올리는 젊은 스님의 뒷모습에서 문득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서산 부석사는 바다를 바라보는 산 속에 들어 앉아 있었다. 멀리 서산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서 의상대사가 건너온 바다를 보고 있다. 부석사는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와 같은 이름이다. 동일한 창건설화를 지닌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절집.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절 뒤편으로 오르니 바다가 더 가까이 보인다. 선묘낭자에겐 가족과 고향이 있는 땅, 의상대사에겐 부처가 있는 정토. 그 둘이 꾸었을 꿈을 생각하며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연이라는 것은 어쩌면 긴 시간 중에 잠시 교차하는 것일 뿐이다. 영원한 만남도 영원한 헤어짐도 없다. 돌아보니 해가 바다 너머로 들어가고 있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낙조를 만났다. ?
나는 절집에 가면 늘 곳곳에서 물고기를 찾는 습관이 있다. 법당의 벽면이나 창살에 그려져 있기도 하고, 처마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법당 안 천정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어눌하고 비율에 맞지 않은 친근한 모습일수록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아마 내 삶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리라. 눈을 감지 않고 잠드는 그들의 삶처럼 내 마음도 언제나 깨어있고 싶다. 지장전 천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바다를 듣고 있을까? ?
? ? 저녁이 되면서 다시 간월은 섬이 된다. 종일 많은 이가 들고 들어온 원(願)이 절 마당에, 대웅전에, 산신당에 가득가득하다. 언제나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안고, 품고, 이고 오는 원의 크기는 많고 무겁다. 하얀 달이 하늘과 바다에 뜨면 오롯한 섬이 되어 중생들이 두고 간 마음을 푸른 바다에 섞는다. 그래서 바다는 더 파랗게 변하고 가벼워진 절집은 내일 아침 길을 열어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는 이들을 기다릴 것이다. ?
간월암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 다른 여정 중에 잠시 들른 간월암은 언제나 섬이 되어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눈앞에 있으나 닿지 않는 그곳은 더 애틋하고 간절한 섬이 되어 나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때론 바다를 향해 길게 늘어선 소나무에 기대서, 그믐밤 시동을 건 자동차 창문 너머로, 다시 보기 힘든 연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듯 내 눈을 붙들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간월도, 간월암이 오늘은 길을 열고 육지가 되어 나를 바라본다. 오래 기다렸다고, 이제 만날 때가 되었다고 하는 듯 맑은 하늘 아래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 ?
문수전 계단 옆에, 형체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석상이 있다. 시간이 그 형상을 모두 흘려버렸지만, 분명 네발 달린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를 기려 만든 석상이었다. 폐사지의 석물은 남아 그 자리의 시간을 말하고 있기에 유달리 사랑스럽다. 부처의 얼굴이 남아 있지 않은 석불, 흐릿한 연꽃문양, 날개의 일부가 남은 비천상 등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그 모습을 그려 넣어본다. 가만히 고양이 석상의 머리에 손을 올려보니 차가운 돌의 기운이 손을 타고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 한참을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눈을 뜨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오누이가 석탑 아래서 장난을 치고 있다. 그러다가 순간 둘은 탑 아래 가지런히 서서 합장했다. 원형다층석탑 아래 가지런히 손을 모은 오누이의 원(願)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오랜 옛날부터 저 탑은 그 아래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고, 무릎 꿇은 이들의 마음을 받았을까? 그 많은 가슴 속 이야기를 받아들였기에 무수한 시간과 시련을 지내고도 여전히 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일까? ? ? ?
서해안 고속도로는 하얀 꿈속처럼 짙은 안개로 길이 나 있었다. 가야할 거리도 멀고, 주말이면 늘 막히는 고속도로라는 악명을 기억했기에 새벽길을 골랐지만 정작 내 이마를 누르는 것은 눈앞을 막는 안개도, 도로를 메운 자동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삶이 항상 이렇다. 하루하루 나아가는 생(生)에서 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은 물리적인 장애나 불행이 아닌 예측하지 못했던 불확실성, 불안감이다. 일주문을 지나 여기저기 불규칙적인 듯 규칙적으로 서있는 석불과 석탑들을 마주하니, 또 다시 안개 속에 들어선 기분이다.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부처가 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이 골짜기에 이제는 석탑이나 석불이 없는 빈자리에도 여전히 불(佛)의 기운이 가득해서 빈 공터도 그냥 밟지 못하겠다. ?
? ?고요하던 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방 불빛 때문에 날아든 나방 한 마리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나방은 아이들과 장난을 하려는지 아이들이 숨는 곳으로만 쫓아 날아다닌다. 너무 소란해진 것 같아 나방을 잡으려 했더니 죽이지 말고 수건으로 툭툭 쳐서 방 밖으로 내보내라고 난리다. 여긴 절이라고, 그럼 안 된다고 말이다. 어디서 그런 이야길 들었는지...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장이 보이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나무처럼. ? ? ?
저녁 8시 전에는 경내로 들어와야 한단 종무소 담당자의 목소리가 계속 귓속에 있는 것 같았다. 퇴근을 하고 서울을 출발해 빠듯하게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도 부족해 달리는 차안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토요일에 편하게 올 걸 그랬나하는 후회가 밤 8시가 다가오면서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 조바심이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에 들어서면서, 사위가 어둠에 들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속도를 낼 수 없는 1차선 국도 때문인지, 자동차 전조등에 의지해 나아가야 하는 어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창문을 내리고 팔을 내밀어 바람을 가르며 굽이굽이 도니 어느새 사찰 입구에 들어섰다. 시계는 저녁 7시 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절집에 들어가 가방과 옷을 아무렇게나 내려두고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 공기를 깊게 마셔본다. 냄새, 맛 등에 크게 민감하지 않지만 확실히 도시의 공기와는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소리, 밤새 소리, 풀벌레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지만 각각의 소리가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언제나 이렇게 절집에서의 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내 앞에 펼쳐든다. 오늘은 어떤 카드를 고를 것이냐고 느긋하게 달이 묻는다. ?
빗소리에 일찍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가만히 누워 비를 듣는다. 산사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다 특별한 것만 같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하는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막상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일상의 소중함, 특별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비 때문인지 경내는 아침에도 밤처럼 소리가 없다. 빼꼼히 대웅전 문을 열어본다. 등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에 부처가 가만히 웃고 있다. 합장 반배를 올리고 마음으로 말한다. 부처님, 저 잘 쉬었다 갑니다. ?
새벽, 해우소를 다녀오는 길에 달을 만났다. ‘제가 여기 계신 달님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니 달은 푸른 웃음을 짓는다. 다시 방에 들어가 남은 잠을 자기엔 아쉬운 새벽이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대웅전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에 나방처럼 다가섰다. 법당 안에는 새벽 예불을 준비하느라 불을 밝히는 노보살이 혼자 합장을 하고 있었다. 들어설까 잠시 주춤하다가 가만히 돌아섰다. 내가 오롯이 홀로 있고 싶은 순간의 마음이 날 붙들었나보다. ?
저녁 예불시간, 스님의 독경이 끝나자 죽비소리에 맞춰 모두 참선에 든다. 적막과 적멸의 순간. 겨울바람에 법당의 목재들이 내는 삐걱삐걱, 두런두런, 들썩들썩 소리도 이 순간 모두 숨을 죽인다.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집중이 되질 않는다. 세상에서 나 혼자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고요한 공간에 유리구슬 한 통을 쏟아버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기분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 느껴야하는 외로움을 다시 마주쳤다. 하지만 그 고독을 견디고 즐겨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있다. 다시 느긋하게 즐겨야 할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