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모든 수행도는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제시한다. 삼십칠보리분법도 예외는 아니다. 초기불교의 이 수행도도 부처님이 증득한 열반의 세계에 다다르기 위한 여러 관점의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칠각지(七覺支)도 그 중에 하나이다. 범어로는 “sapta-bodhy-an.ga (쌉따보디앙가)” 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깨달음에 다다르기 위한 일곱 가지의 종류의 수행도를 의미한다. 그 일곱 가지에는 염각지ㆍ택법각지ㆍ정진각지ㆍ희각지ㆍ경안각지ㆍ정각지ㆍ사각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각지(覺支)라는 것은 깨달음의 갈래라는 의미로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의 수행항목을 가리킨다. 초기불교에서는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통일하는 수식관(數息觀)을 행하고 난 뒤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고 그 다음에 바로 칠각지를 수행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혹은 사람을 고용해서 그 일을 시키고자 할 때에 흔히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건 자신, 혹은 피고용인이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자질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유치원선생님을 고용하고자 할 경우, 고용주는 우선 지원자가 이 직업이 아이들을 교육하고 보살피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지를 먼저 볼 것이다. 그 다음 이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지, 초심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지, 매순간 집중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지, 상황에 맞게 적절한 판단력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할 것이다. 이러한 자질이야말로 훌륭한 유치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표인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의 자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
?명상을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명상에서 깨어나면 다시 번뇌에 휩싸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꼼짝 않고 명상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다. 이렇듯 명상 그 자체는 수단일 뿐 목표인 열반은 아니다. 그래서 붓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연기법을 ‘통찰’했고 중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붓다가 의식을 집중하는 명상인 선정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정은 열반을 증득하려는 수행자에게 필수적이다. 선정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의 깊은 곳까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정을 위한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실천행이 바로 사신족(四神足)이다. 사신족은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며
?언제나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그 동안 세운 계획들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미련이 남아서 일 것이다. 그러나 한 숨 내쉬며 후회해도 시간은 이미 지났다. 과거를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다가온 새해를 희망차게 보낼 계획을 다시 한 번 세워보자. 그런데 단지 계획만 세운다면 예전처럼 용두사미, 작심삼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좋은 계획을 세우고 또 잘 실천하는 길일까? 불교에서는 이를 사정근(四正勤)으로 설명한다. 특히 불자들은 이 사정근을 바탕으로 새해의 좋은 계획들을 반드시 이루도록 노력하자. 사정근은 ‘바른 노력’의 방법론이다. 원시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도인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중에 사념처가 몸[身]ㆍ감수작용[受]ㆍ마음
?원시불교에서 명상수행을 나타내는 말로는,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집중하는 선(禪)과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흔들림이 없는 상태인 정(定), 그리고 잊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마음에 새기는 념(念; sati) 등이 있다. 이 중 념은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의 네 종류로 분류돼 사념처(四念處)라 하는데 원시불교에서는 이것을 수행하면 다른 수행도는 필요 없다고 여겨 일승도(一乘道)라 부를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사념처는 몸[身]ㆍ감수작용[受]ㆍ마음[心]ㆍ마음의 대상[法]의 네 가지가 무상ㆍ고ㆍ무아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진리를 다 망라해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몸은 부정한 것이며
?불교는 번뇌로 괴로워하는 중생들의 의지처로서의 종교이기도 하면서 매우 심오한 철학체계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45년간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깨우치고자 한 뜻은 단지 불교의 철학적이고 교학적인 사상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그랬듯이 중생들도 개개인이 스스로 마음의 움직임을 통찰하고 행동을 다스려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팔만사천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들은 모두 이를 위해 설해진 것이다. 바로 이점이 원시불교와 아비달마 불교, 그리고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행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별로 수행도의 내용이 완전히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원시불교나 아비달마 불교에서
?수번뇌에는 전회에서 설명한 방일(放逸)ㆍ해태(懈怠)ㆍ불신(不信)ㆍ혼침(昏沈)ㆍ도거(掉擧)ㆍ실념(失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의 대수번뇌 8종류에 이어 2종류의 중수번뇌와 10종류의 소수번뇌(小隨煩惱)가 있다. 중수번뇌(中隨煩惱)는 무참(無?)과 무괴(無愧)이고 소수번뇌는 분(忿)ㆍ한(恨)ㆍ뇌(惱)ㆍ복(覆)ㆍ광(?)ㆍ첨(諂)ㆍ교(?)ㆍ해(害)ㆍ질(嫉)ㆍ간(?)이다. 이들 번뇌를 전부 합하면 수번뇌는 20종류가 된다. 이 중에 중수번뇌는 진리를 따르지 않는 오염된 마음이 번뇌가 일어날 때 항상 따라 일어나는 상태를 말하고, 소수번뇌는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무참(無?)과 무괴(無愧)는 근본번뇌가 일어날 때 항상 따라 일어나는 중수번뇌이다. 이 중에 무
번뇌에는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와 그 근본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가 있다. 수번뇌의 번뇌를 혹(惑)자로 대체해 수혹(隨惑)이라고도 하고 근본번뇌에 종속된 부수적인 번뇌라는 의미로 지말혹(枝末惑) 또는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근본번뇌를 세분화한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번뇌를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수번뇌는 초기불교에 이어 불교를 교학적으로 연구한 시대인 아비달마 시대에 이르러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다섯 가지와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두 가지 그리고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열 가지와 부정지법(不定地法) 두 가지의 열아홉 가지로 나뉘었다가 아비달마의 교학불교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학파의 하나인 유식불교에 이르러 다시
?탐욕[貪]ㆍ분노[瞋]ㆍ어리석음[癡]에 이어 근본번뇌의 다음 세 가지는 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이다. 이중에 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그 보다 높이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낮추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비교하거나 비교 당함으로써 괴로움을 느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비교에 의한 괴로움은 세상의 수많은 번뇌 중에서도 그 비중이 크고 그로부터 또 다른 번뇌들이 파생되기도 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만을 근본번뇌로 분류했다. 이와 같이 남과 비교해서 마음이 스스로를 더 잘났다고 생각하게 하는 만(慢)에는 다시 3만, 7만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3만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아승만(我勝慢)과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불교에서는 인간의 번뇌를 가능한 모든 측면에서 거론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느끼고 괴로워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마음의 상태를 하나씩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번뇌의 절반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번뇌의 원인을 통찰하고 체득할 수 있다면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번뇌의 완전한 소멸이야말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열반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증득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교에서는 번뇌에 관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번뇌에 빠져있는 그 마음의 상태에 대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그 첫 번째가 근본번뇌이다. 근본번뇌는 말 그대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다른 번뇌들은 이 근본번뇌로부터 파생되어 부수적으로 일어
불교에서 인간의 삶이란 괴로움[苦]의 세계이다. 그 괴로움의 근원에는 번뇌가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근원인 번뇌에 대해 명확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대해 알아 채지조차 못하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고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경전에는 번뇌에 관한 수많은 설명이 있다. 우선 번뇌(煩惱)는 ‘극심한 고통’ ‘분노’ ‘무지’ ‘탐욕’ ‘집착’ 등을 의미하는 범어 ‘끌레샤(kle?a)’의 한역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번뇌의 근원인 것이다. 예컨대 살인, 도둑질, 사음의 세 가지 몸의 번뇌, 거짓말, 비방, 욕설, 궤변의 네 가지 말의 번뇌, 탐욕, 분노[원한], 회의[의심]의 세 가지 마
?지난 회에서는 번뇌의 사전적 의미와 개론을 설명하면서 108번 번뇌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했다. 하지만 불교에서 번뇌를 논할 때 ‘108번뇌’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108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많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번뇌의 종류를 하나씩 나열해 총 108개를 합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복잡한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먼저 108이라는 숫자의 근원이 정확히 어디에서 설명되는지 현재에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는 점과 불교 교단이 분열되면서 형성된 각 부파(部派)마다 108 번뇌의 체계를 나름대로 세움으로서 다양한 108번뇌의 종류가 생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또한 명확하게 불교 어느 부파에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평생 번뇌를 느끼고 경험하며 그렇게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것이 불교에서 번뇌와 번뇌의 원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유이다. 불교의 목표는 번뇌를 끊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많은 번뇌론은 단순히 철학적인 분석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생활에서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괴로움들을 실제로 없애기 위한 것이다.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먼저 번뇌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번뇌(煩惱)란 말은 범어 끌레샤(kle?a)를 뜻풀이한 말로 본래 ‘고통’ ‘무지’ ‘욕망’ 등을 의미한다. 혹은 ‘더럽히는 것’이란 뜻으로 염(染), 오(汚), 염오(染汚)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창틀에 달라붙어 있는
불교에서는 과거의 업은 현재에, 현재의 업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자신이 짓는 업의 작용력을 인식하고 노력여하에 따라 미래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업의 주체는 말할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자신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에 걸쳐 사제와 연기법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수행하게 되면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그런데 불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 중에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존재에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말은 업을 짓는 행동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삼세에 걸쳐 행하는 업의 주체는 무엇이고,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선한행위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결과가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생긴다는 자업자득의 윤리가 불교의 업설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선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 가는 경우도 있고, 악한 행위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온갖 영화를 누리다 가는 경우도 많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렇게 불합리한 현상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관계[三世因果]로 설명하고 있다. 삼세인과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재에 괴로움이 지속되는 것은 과거에 행한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이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누리는 부귀영화는 과거에 행한 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전생까지 포함시킨 과거를 말한다. 그리고
?불교에서 업(業, karma)은 일반적으로 업보(業報)라는 말로 통용된다. 업은 의도적으로 지어진 어떤 행위나 일을 뜻하고 보는 범어 ‘비빠까(vip쮄ka)’의 번역으로 다르게 무르익어간다는 의미이다. 다르게 무르익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도적인 행위나 일을 원인으로 해서 그 원인과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불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는 말을 살펴보자. 상식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면 결과 또한 선한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악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응당 악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선인락과 악인고과’는 원인과 결과가 조금 다르다. 선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즐거움의 과보를 받고, 악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의 과보를 받
?십이연기(十二緣起)란 인간이 경험하는 괴로움[苦]의 전개과정을 열두 가지의 인과관계로 분석해 놓은 것이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는 이 열두 항목을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로 나누고 이들의 관계를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와 괴로움을 없애는 원리의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전자를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하고 후자를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한다. 유전연기에 의하면 십이연기는 사성제(四聖諦)나 연기의 이치를 알지 못함[無明]으로 인해 신체와 생각과 말의 잘못된 행위[行]가 있게 되고, 이러한 행을 원인으로 해서 인식주체로서의 식[識]이 있게 되며 마지막에는 태어남으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모든 괴로움이 일어난
?인간의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를 원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연기설이라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은 이 연기설에 기초하여 모든 현상의 인과법칙을 열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아비달마의 교학중심 불교로 역사의 흐름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부처님이 설한 인과의 가르침을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해석하려는 불교 논사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이다. 먼저 초기불교의 경전에서 연기설은 대략 세 종류의 유형으로 설명된다. 첫째는 십이지분(十二支分) 혹은 그 이하의 지분으로 설명된 일반적 유형의 연기설이다. 두 번째는 감관 기능[根], 감관기관의 대상[境], 그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識]과 이 셋의 화합에 의한 인식[觸], 그리고 그 인식에 의한 느낌[受]으로 연속하는 인식관계에 기반을
?부처님이 연기를 설한 이유는 이 세상의 작동원리나 우주의 탄생과 같은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苦)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연기설은 개인의 내면적인 작용뿐만 아니라 인간과 관련된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를 포괄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는 무아와 무상을 자각하게 하고 그로 인해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연기설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크게 네 가지 관점에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로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해석이다. 인과율이란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에 관한 법칙이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마음의 작용이 원인이 되어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법칙을 말
?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인 연기설(緣起說)의 산스크리트어는 쁘라띠뜨야-쌈우뜨빠다(prat?tya-samutp?da)이다. 이 말을 풀어보면 ‘연해서 혹은 의존해서[쁘라띠뜨야]’, ‘일어나다, 발생하다[쌈우뜨빠다]’는 의미이다. 즉 ‘상호의존해서 일어난다’는 뜻이며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상호의존해서 일어나는 원리를 차연성(此緣性) 혹은 상의성(相依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기설은 사법인(四法印)의 가르침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사법인의 가르침 속에서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없고 생멸변화하는 것이지만 그 변화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기반 해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작용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이 법칙은 부처님이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