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공부다. 견해만 없으면 마치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로워진다. ? 청정한 보리자성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한 생각을 일으켜 이것저것을 분별하고 헤아리기 시작하면, 천지현격으로 벌어지고 만다. ? 도는 어려울 것이 없어서 다만 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것만 그만 두면, 자연히 통연 명백해진다. ? ?만약 불도(佛道)가 배우고 닦아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전혀 옳은 견해가 아니다. 부처님의 도는 닦거나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어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여 이미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머리가 자기가 본래부터 머리였다는 것을
? 번뇌는 본래 허망하여 다만 사라지면 그뿐이지 법이라고 세울 게 없다. 본래 청정해 얻을 게 없음을 무상정등각이라 했다. 중생은 상(相)을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는 것울 붙잡아 결코 놓으려 하지 않는다 불국토에 들어가려면 모든 견해를 놓아야 한다. ? ? ? ? ? ? ? ?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가로막기 때문에 인과에 얽매여서, 가고 머무름에 자유를 잃게 된다. 깨달음[菩提] 등의 법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 정토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담아 놓고 추구하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여 국집하게 되고, 국집하면 인과에 구속되어 괴로움이 발생한다. 본래 당처에는 중생은 물론 부처도 없고, 생사는 물
? 무심을 닦는다면 분별도 집착도 없다. 마음이 바위덩이처럼 틈이 없어 일체 법이 그대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상에 집착하여 조작하려는 생각만 끊어지면 장애 받고 안 받고 도무지 흔적이 없어져 하되 한 바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 펼쳐진다. ?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벗어난 눈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을 잘못 먹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 일체시(一切時) 중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다만 무심(無心)을 닦는다면, 분별할 바도 없고 의지할 바도 없으며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어서 하루 종일 임운등등(任運騰騰) 하여 마치 어리석은 사람같이 될 것이다. ? 세간의 일은 언제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세간의 불법은
경계의 모든 인연들을 쉬어서 무심하기만 하면, 천 가지 계산 만 가지 사량이 한 순간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다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열매 먹고 풀옷 입는다 해도 자기 마음 알지는 못할 것이다. 불법은 자기 마음 아는 것이지, 난행·고행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은 윤회계를 벗어나라는 것이다. 좋은 꿈 꾸라는 것이 아니라, 잠 깨고 일어나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일체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천상·아수라·지옥 등의 육도가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무심을 배워 모든 인연을 단박에 쉬고 분별망상을 내지 않으면, 나도 남도 없고, 탐진(貪瞋)도 없으며, 증애(
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 마음은 본래 머문 바 없기 때문에, 보살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다. ? 마음이 담연하게 자기 집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기 때문에, 육도윤회하며 생사를 거듭하고 있다. ? 한 마음 사라지면, 온갖 경계도 없어진다. ? ? 만약 인연에 응하지 않을 때에도 그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인연에 호응할 때에도 또한 종적이 없다. ? 마음은 작용할 때나 작용하지 않을 때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리 찾아도 있다고 할 근거는 없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서 온갖 작용을 다하고 있기에 없다고도
? 알고 보면 마음은 너무 가깝게 있어서, 싱거울 정도로 맛이 없다. 중생들은 아무 맛이 없으니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본래 없지만, 그래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면 스스로 터져나가든 선지식에게 물었을 때 언하에 대오하든 기연이 일어나는 것이다. ? 깨달음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자기 마음을 알면 자기의 본성을 보리니,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은 수행을 가사하고 안 하고 관계없다.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것을 믿어 헛된 노력을 내려놓을 줄 알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따로 뭔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여, 자꾸 찾아 나
? 마음을 없애려 한다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없애려는 마음이 다시 티끌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본래부터 눈앞에 완벽하게 드러나 있지만 스스로 망상에 덮여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인연들이 이런 저런 천차만별을 그림 그리듯 펼쳐낸다. 그래서 모든 공부는 이 마음 하나를 밝히는데 집중된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삼계를 부수기 위해서이다. 여래께서는 늘 여여해서 오고 가는 바가 없다. 여래께서 세간에 짐짓 출현하셨다는 것은 출현한 바 없이 출현한 것이다. 삼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없는 것인데, 없는 것을 또 부순다는 것도 방편설이다. 중생들은 삼계가 있는 것으로 속아서 고해에서 헤매고
만약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곧 경계가 잊혀지고 마음이 저절로 사라져 다시 찾을 바가 없다. 생멸(生滅)이 적멸(寂滅)하면, 적멸이 위락(爲樂)이 된다. 공부가 되면, 무심을 짓는 게 아니라 저절로 무심이 되는 것이다. 방편으로 욕계·색계·무색계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 빨리 벗어나라 했지만, 사실 삼계가 그대로 법계라 따로 벗어날 삼계란 본래 없다. ?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구하는 것을 일러 ‘가리왕(歌利王)이 사냥놀이를 좋아함’이라 한다. 마음이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곧 인욕선인(忍辱仙人)이며, 몸과 마음이 모두 없음이 곧 불도(佛道)다. 〈금강경〉 ‘이상적멸분’에 가리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도 여래는 인욕
높은 차원의 자비는 불이의 중도를 깨닫게 해주는 ‘무연자비’ 수행자라면 부끄러움 알고 뼈저리게 정진하면, 갈수록 넉넉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이 공부다 불법이 중심에 딱 서면, 마치 매사가 벼릿줄을 잡고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쉽고 간단하게 풀려나간다. 인과를 훌쩍 벗어나 인연을 살펴 쓸 수 있는 힘을 지녀야 몸과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비로소 굳건한 정진이 된다 ? 자(慈)란 이룰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비(悲)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입장에서 자비심을 말할 때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해서 고를 뽑아내어 즐거움과 더불어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중생이 고해 속에서 한량없는 괴
만법이 다 합쳐도 다만 하나의 둥근 원이고, 모조리 흩어져도 각각이 다만 하나의 원이다 천차만별 변하는 것은 인연 따라 겉모양 변하는 것 성품은 변한 적이 없다 육도 윤회 어떤 곳에 있더라도 불법을 만나 믿으며 스스로 안목을 열고 남에게도 전하는 인연을 살펴 쓴다면, 보람 있는 삶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자비를 베푸는 주체도, 받는 대상도 없는 무연자비이기에 진정한 대자비가 되는 것이다 ? 그대는 지금 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을 일으켜 부처를 배워 얻으려고 한다. 그렇게 부처가 되려고 애쓴다면, 삼아승지 겁을 닦는다 해도 다만 보신불이나 화신불만 얻을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원진성(本源眞性)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종일 말하면서도 일찍이 말한 적이 있던가? 종일 들으나 언제 들은 적이 있던가? 하루 종일 얘기한다 해도, 근본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하루 종일 들어도, 근본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 밝은 거울에 사물이 비췄다 지나가듯이, 여여부동한 그 자리에 만사가 흘러가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한 글자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이다. ? 마음을 알고 쓰면, 인생 백년 삼만육천 일 아침마다 다만 이 자리의 반복일 뿐 달리 다른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무상히 흘러가지만, 그 흘러가는 자리는 일찍이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는 것이다. 늘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석존께서 평생을 설법하셨어도, 실상으로는 한 글자도 말
모든 생각과 소리, 빛깔이 그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다. 깨닫지 못하면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고롭게 끌려 다니다 한 생을 다하게 된다. 법 밖에 마음 없고, 마음 밖에 법이 없다. 누러면 누렇고, 푸르면 푸르다 무심히 고개 들어 앞을 보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다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에 의지해 생기니 경우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 왜 이러한가? 그대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라는 견해를 짓기에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여기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기에 곧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그대의 견해일 뿐이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아직 공부가 익지
불법은 본래 무위법 무심 알아 홀연히 깨쳐야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면, 변견(邊見)에 떨어져 불이법의 중도에 어긋난다 망상은 실체가 없지만 근본 모르면 상(相)에 떨어져 허망한 그림자에 매달려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망념을 알아챘을 때, 그 자각이 바로 부처다 ? ? 이 하나의 문(門)을 얻는 것을 이름 하여 무위법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선 오직 ‘한 마음’의 법만을 전하셨는데, 그것은 모양이나 색깔로 드러내 보일 수 없어서 다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묵연히 계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법문을 무위법문이라 한다. 반면에 주객의 양변이 갈라져서, 주관이 객관을 상대하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이다. 세상사는 대부분 주관이 작위를 일으켜
? 그대의 마음이 부처다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마음을 증득해야 일체가 그림자뿐임을 자각해서 안심입명 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관계없이 늘 함께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번 정확히 계합하여 체득하지 못하면 늘 대상에 집착하여 헐떡거리며 살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가르침하고 상관없이 나고 죽는 바 없이 인연 따라 흘러오고 흘러간다. ? 10.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진짜 뼈저리게 이 문제를 붙들고 밤낮으로 씨름하는 사람한테는, 선지식이 방·할만 해주
법이나 본심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법·마음 전하는 바 없이 전하는 도리를 알게 된다 ? 도량이란 오직 일체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 하나의 법도 얻을 수 없는 곳 진정한 도량임을 알면, 어디를 가나 걸음걸음마다 연꽃 피는 정토가 된다 불법은 있다, 없다는 상대적 개념 붙일 수 없는 것 미혹도 없고 보리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 다함도 없다 ? ? 선사께서 말씀하셨다.?“그대가 만약 말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는 것’이 된다. ? 말할만한 어떤 법이 있다고 착각을 하면, 곧 〈금강경〉 ‘사구게’에서 사도(邪道)라고 이른 ‘음성으로써 부처님을 찾는 것’이 된다. 음성이든 뭐든 일체가 부처 아닌 것이 없는 줄 알면 그만이다
볼 수 있는 것을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 하며 부처·법 함께 없는 것 ‘승’ ? 정진해 깨달은 사람이 ‘승려’ 부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 ? 눈앞에 법 살펴 깨달으면 집착하라 마라 할 것 없이 저절로 구하는 바 끊어진다 ? 본래 마음자리에는 그 무엇도 법이라 정해진 것 없어서 깨닫기 전에는 불·법·승도 망상이고, 마음을 열면 일체가 불·법·승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다른 견해도 없다. 부처라는 견해를 내기만 하면, 바로 중생이라는 견해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교법을 설명하기 위해 마지못해 일컬은 ‘부처’나 ‘중생’이라는 말인데도, 어리석은 중생은 그런 말들이 마치 실체가
不二 의 도리 밝히면 그 자리는 늘 여여해 고해가 피안임을 알기에 어디서든 ‘안심입명’ ? 장애가 곧 ‘알음알이’ 이것이 망상 만드니 모든 지견 내려놓고 청정한 본심으로 돌아가야 ? 불법 안팎이 따로 없으니 구족해 새로 얻을 바 없다 일심(一心)일 뿐이어서 중생과 부처가 무차별 ?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하여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다.”고 하였다. ‘태허공’이라는 것은 일체의 모양이 만들어지기 전 본래의 모습이다. 이것은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한계 그어질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비유하여 겨우 ‘허공과 같다’고 표현해보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구절은 삼조 승찬(僧璨)스님의 〈신심명〉에 나오는 말이다. ? 그저 한가로워 일삼을 것이 없어
무변신보살이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못 보는 것이다 ? 불법은 무념, 무상, 무주 이런 저런 말들은 어디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게 가르치는 방편 불법은 불이의 중도 ? 견해만 없으면 즉시 무변신 견처가 있으면 곧 외도 여래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 ? 낙처를 살필줄 알아야 묵연히 계합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오직 이 일승(一乘)의 도가 있을 뿐,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다. 단지 부처님의 방편설 만은 제외한다.”고 하셨다. ? 한 마음에 대한 안목이 투철해지면 오직 일승만 실상일 뿐이고, 이승이나 삼승은 이미 구질구질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선은 오직 불이(不二)의 실상만 직지(直指)할 따름인 것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어리석
마음의 눈 못뜬 입장에선 성품봐야 ‘정등·정각’ 확인 말로 표현 못해 ‘불가사의’ ? 모양은 인연 따라 드러나 범부는 겉모습에 속아서 간택하며 얽매인다 마음자리 분명히 봐야지 더이상 흔들리지 않아 ?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 한마음 일뿐 다른법 없다” 32상 형상, 80종호 색깔 만법이 평등하므로 ‘불이법’ ?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보리’라 한다. ?불법이란 어떤 법을 새삼 얻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있는 법을 확인한 것일 뿐, 없는 무엇을 찾아서 구해온 것이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확인하는 것이다. “아! 이것이구나. 그런데 허망한 데에 나도 모르게 속아서, 넋 나간 짓을 하고 살았구나. 알
“얻은바 있어도 일체 견해 버려라” ? 본래 없는데 무엇을 버리나 이런 경지의 사람은 취사의 양면 함께 내려놔 ? 부처를 이루려고 애쓰면 경계 만들어 발등 찍는다 성품 자각한 도인들은 범부·부처 둘로 안 보기에 의연히 자기 길을 갈 뿐이다 ? 마음은 허공과 같다 과거·현재·미래 없는 허공 마음도 그와 같아 하염없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 마음을 깨달아야지 변화에 시비할 까닭 없어 ?? 이 같이 일심(一心) 중에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모든 이룩되어진 모습은 시설된 것이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불이(不二)의 중도실상 가운데서 인연 따라 수처작주 해야 한다. 위의 말은 《범망경》에 나오는 다음 게송의 일부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