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 만공 스님, 스승의 뜻밖의 말에 당황 사미승 죽음에 ‘살인누명’ 변명없이‘못난 중생 지은 죄 대신 받자’ 갑산으로 떠난 후 결백 밝혀져 살인 혐의를 쓰다 경허 스님은 화광동진(和光同塵) 직전에 살인 누명을 쓰게 된다. 경허 스님이 시봉인 사미 영주 스님을 데리고 충남 공주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연천봉(連天峰) 등운암(騰雲庵)에 갔다 올 때의 일이었다. 연천봉(連天峰)은 계룡산의 한 봉우리로 동학사(東鶴寺)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다. 등운암은 초가 한 칸으로 양화리 방향으로 10리 가량을 다시 내려가면 신원사(新元寺)가 나온다. 영주 스님이 경허 스님과 함께 등운암에서 신원사로 향하던 때였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영주 스님의 걸망은 퍽 두둑했
“모르면 용궁 경전도 잠꼬대 일뿐” 스님 무애행에 日헌병대장 감탄 관음보살이 북으로 행한 뜻 묻자 법제자 삼아 불조의 밀전 지도 관헌(官憲)에 잡히다 을사조약 이후 한일합방으로 일본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할 때의 일이다. 비로관을 크게 만들어 머리에 쓰고 검은 장삼을 걸친 한 스님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구척장신의 그 스님은 맨발에 한손에는 담뱃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고기를 주장자에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 괴승(怪僧)의 정체는 바로 경허 스님이었다. 마침 거리를 순찰하던 일본 헌병 보조원 두 명이 정체불명의 행색을 한 스님의 괴이한 행색에 산적 괴수로 오해해 다짜고짜 경허 스님을 체포했다. 스님을 헌병대로 끌고 가려 하는데 경허 스님이 입을 열었다. “이놈들아, 끌고가
세상풍속도 마음따라 달라 어려서 예쁜 것 커서 싫다니 경허 스님 어머니 노기는 특별 법문에 대한 상놀음 ?모친 위한 해탈 법문 하루는 천장사에서 경허 스님이 어머니를 위해 법문을 한다고 대중을 불러 모았다. “우리 어머니를 모셔 오도록 하라.”시자는 스님의 뜻을 연만한 할머니께 전하며,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아드님의 법회에 가시기를 청했다. 모친 되시는 할머니 또한 희색이 만연해 옷을 갈아 있고 대중이 모인 큰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며 정성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우리 경허가 나를 위해 법문을 설한다 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하며 특별 법문을 청했다. 그 때 스님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어찌된 셈인지 어머니를 맞이해 부시럭부시럭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스님
100리 오가며 탁발 굶는이들 도와 군자와 광녀는 모두 같은 도반 묵향과 썩은내 구분할바 있으리 말하지 않음 속에 법거량 있고 한데 뒤엄킴 속에 불법 나퉈 탁발과 보시행은 다르지 않아 굶주림 앞엔 부처도 없어 ?묵군자(默君子)와 광녀(狂女) 해인사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은 경상도 지방에서 유명한 묵군자(默君子)의 소문을 듣게 됐다. 경허 스님은 그가 있다는 한 암자를 찾아갔다. 경허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암자의 방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묵군자는 방 안에 혼자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경허 스님이 들어가 앉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벽을 보듯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몇시간을 두 사람은 나란히 보며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을 서로 말없이 앉아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묵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물으니 경허 스님 말없이 주장자로 갈겼다 태평 스님도 주장자로 후려 갈기니 “사자는 사람물고 개는 흙덩이만 쫓네” ??곡차 동이의 법력 보은 법주사에서 진하(震河) 스님과의 일화다. 법주사에서 강백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던 진하 스님은 평소 경허 스님을 좋지 않게 평하고 있었다. 진하 스님운 학인 스님들로 하여금 경허 스님을 혼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우연히 경허 스님이 법주사를 찾았다. 벼르고 벼르던 학인스님들은 경허 스님에게 봉변을 줄 계획을 짜 놓고 있었다. 형세와 분위기를 감지해서일까. 경허 스님은 큰 방에 좌정하자마자 느닷없이 우렁찬 사자후를 토했다. “자고로 종사(宗師)가 선사(禪師)에게 이런 법이 없다!” 경허 스님의 한마디에 진하 스
바랑에서 돼지 뒷다리 꺼내니 황소만한 호랑이 법당 난입 경허 스님 법당 밖 바위에 가부좌 호랑이들 설법 듣듯 스님 앞에 엎드려 경허 스님의 명성이 방방곡곡을 울릴 즈음 송광사에서 스님을 청했다. 경허 스님을 불사 점안, 즉 불상이나 탱화를 조성하고 불상의 안정에 점을 찍는 의식의 증명법사로 초청한 것이었다. 경허 스님의 무애행이 파격적이라 스님을 초청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많았지만 스님의 경지를 알고 있는 대중들에 의해 초청된 것이었다.자연히 송광사 점안법회는 큰 관심을 끌었다. 송광사에서는 증사단(證師檀)을 호화스럽게 꾸민 후 경허 스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경허 스님의 점안을 보기 위해 대사찰인 송광사와 그 주변의 말사, 암자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법당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경허 스님이 나타났
스승의 무애행에 질색한 행자 곡차 안주에 비상가루 뿌려 경허, 비상 털고 태연히 드신 후 함구 후일 행자는 만공에게 고백 참회 ⑭ 행자 관섭의 흉계 경허 스님을 모시던 관섭(寬燮)이라는 행자가 겪은 일이다. 행자 관섭은 짧은 식견이지만 경허 스님의 법문을 좋아했다. 하지만 스님의 무애행 만은 질색했다. 행자 관섭이 경허 스님의 곡차 심부름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이 안주를 사오라며 돈을 건넸다. 행자 관섭은 안주를 사고 나머지 돈으로 몰래 비상(砒霜)을 샀다. 행자 관섭은 술심부름에 시봉에 너무나 힘들어 경허 스님이 비상을 먹고 죽었으면 하는 막된 생각으로 흉계를 꾸몄다. 행자 관섭은 비상을 빻아서 구운 닭고기 안에 골고루 뿌려 넣었다. 그리고는 곡차와 닭 안주를 경허
막걸리 한 동이를 단숨에 비우니 상주 “무애행의 도높은 스님들망인의 명당을 잡아주십시오” “썩을 고기 덩어리에 명당이라니…” ⑫상여 가로 막은 무상설법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함께 먼 길을 나선 어느날이었다. 한 낮에 민가는 눈에 띄지 않는 첩첩산중의 길이었다. 두 스님은 시장기가 들기 시작했다. 굽이진 산길을 돌아 어느 산마루턱에 당도했을 때 길 저편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색 포장과 깃발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는 상여의 행렬이었다.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 상여 행렬로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을 이끌고 다가갔다. 경허 스님이 상여 앞에서 염불 한 다음 음식을 청했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한 상여꾼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 밖에 더 있겠습
“그 도지사란 놈 당장 목을 벨…” 서슬퍼런 호통에 일본 관원도 머뭇 바위 내려앉을 리 없단 말에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 ⑩?속인들의 탐심에 일갈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여러 날 째 멀리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는데 그만 여비가 똑 떨어졌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행장을 풀고 하룻밤을 쉬게 됐다. 다음날 여관주인이 경허ㆍ만공 스님에게 숙박비와 식대를 내라고 했다. 그러자 경허 스님이 “우리가 법당을 중수하려고 화주를 나왔습니다. 주인께서도 시주를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여관주인이 잠자코 있다가 답했다. “그러면 그 화주 책을 한번 봅시다.” 만공 스님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허 스님에게 화주 책이 없었다. 화주 책도 없는데 시주하라고 말을 꺼냈으니 큰일이었다.
빨리 가게 해 준다며 도망치게 해 목숨 위협 받자 고통 잊는 도리 보여 타심통 부리던 만공 스님에게는 “술법 부리면 믿지 못할 사람” 꾸중 ⑧ 길을 빨리 걷게 한 희롱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다리는 아파왔다. 만공 스님이 시주자루를 메고 무겁다고 끙끙대며 투덜거렸다. 만공 스님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자 경허 스님이 말했다.“내 빨리 가는 방법을 한번 써 볼 터이니 자네 빨리 따라와 보게나.” 얼마 후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은 한 촌락에 이르렀다. 동네 사람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다들 쉬고 있었다. 한 처녀가 우물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 경허 스님의 눈에 띄었다. 경허 스님은 느닷없이 쫓아가 어린 개구쟁이 같이 처녀의 양쪽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
제산 스님 남몰래 안주 올리고 남전 스님은 그 소식에 한소식 만공 스님 몸바쳐 스승공양 다짐 격외도리에 ‘법따르기’이어져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⑥제자들의 격외법담 경허 스님의 법을 신봉한 직지사 제산(齊山) 스님은 청정한 지계행과 높은 덕행을 겸비해 제방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제산 스님은 경허 스님이 합천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시봉을 도맡다 시피했다.당시 400~500명의 대중이 상주하는 대사찰에서 경허 스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경허 스님을 위해 대중 모르게 곡차를 마련하고 안주감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산 스님은 입소문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깊은 밤이면 몰래 절 밖으로 나가 안주를 만들어 경허 스님에게 올렸다.
④ 지장암 토굴에서 “경전을 뜯어 도배해도 됩니까” “자네들도 이 경지 이르면 해 보게” “살려 줄테니 속히 떠나시오” 경허 스님 말없이 개심사로 “어디에서 이런 고초를 겪으셨어요” “갯가에 구경 나갔다가 해풍에…” 경허 스님이 지장암 토굴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천장암(天藏庵)에서 조금 떨어진 산모퉁이 골짜기에 작은 초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암자가 바로 지장암이었다. 스님은 그 곳 토굴에서 한 겨울을 혼자 정진했다. 지장암은 수리를 하지 않아 벽 사이에 틈이 나고, 문창이 뒤틀린 고옥이었다. 그런 토굴에서 한 겨울을 지내게 된 스님은 불장에 보관된 〈화엄경〉을 뜯어서 문도 바르고 벽도 발라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스님을 뵙기 위해 찾아간 제자들이 이 광경을 둘러보고 깜짝 놀라 여쭈었다.
천장암서 누더기 입고 1년 장좌불와 숨쉬는 등신불 같던 용맹정진 끝에 심신 습기 조복받아 생사자재행함 없고 한가로운 오도가 불러 동학사 법회서 강주 스님이 “곧은 나무라야 쓸모 있다” 하자 경허 스님 법석 올라 말하기를 “삐뚠 것은 삐뚠 대로 곧은 것” 계룡산 동학사에서 젊고 유능한 강사로 명망이 높은 경허 스님에게 수학하려고 밀려드는 학인들의 수는 나날이 많아져 갔다.하지만 발심한 경허 스님은 강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수도처를 찾았다. 이는 생사의 무상함을 깊이 느껴 장부의 대사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동학사에서 주장자와 발우를 거둔 뒤 스님이 찾은 수행처는 홍주 내포였다. 오늘날 충남 서산군 연암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이다.바랑을 풀고, 경허 스님은 마음껏 용맹 정진했다. 천장암은 학인·
나하나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중생을 인도 하겠다니참으로 어리석은 것 날카로운 송곳 턱밑에 놓고수마 쫓으며 참선 정진 백천법문 문득 재가 되니한국 근대선의 서막 올라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은 한국불교 중흥조이다. 스님은 1849년 전주에서 출생해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했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경허 스님은 억불숭유로 바람 앞 촛불과 같던 때 선맥을 되살린 선지식이다. 큰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의 경지에 오른 스님의 도리가 얼마나 깊고 높은지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경허 스님의 행적은 어떤 때는 심산유곡에 깃들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끄러운 저자 한복판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