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재가자 무문관 수행독방 격리! 그렇게 난 5일을 지내보기로 했다. 무문관 수행 5일 후스님: “잘 살았습니까?”수덕화: (합장하고 나오며) “밥이 법이고 법이 답이다”아니다 싶으면 이것저것 앞뒤 잴 필요 없이 작은 배낭 메고 떠난다. 자연에서 우리는 참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를 볼 수 있다. 내 영혼에 향기로운 우물이 넘치게 하고 싶다면 떠나서 지칠 만큼 지내보는 것이 최상의 보약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벽송사 선강법회자연과 더불어 이론과 실참(實參)을
초삼 스님‘왜 푸른 산에 사느냐 묻거든 그저 웃지요.’하는 옛 시가 생각난다. 오래전 유명한 스님도 열반하셨고, 얼마 전 많은 여자들을 설레게 했던 유명한 모 배우도 갔다.“연기(演技)하며 살다 / 연기(煙氣)되어 보니 / 연기(緣起)로 남는다”“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 강물이 흐르며 내는 소리 / 도망간 입맛을 찾아야겠다”다들 간다는데 안가는 놈은 누구냐. 소공거사이 글을 쓰기 전에 거사님이 살았던 전향원(향기밭을 가는 집)에 다녀왔다. 겨울이 오고 있는지 화단의 나무는 이미 마당 가득 낙엽으로 쌓인 게 세속을 벗어난 이야기를
숭산 스님우리는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욱 어렸다. 인사를 드리자 스님께서는 ‘오직 모를 뿐’에 대해 말씀하셨다. 중국에서 1700 공안을 들여와 공부하는데 우리도 스스로 화두를 만들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게 엊그제 같다. 이제는 화두라는 단어를 이해하며 수행의 초입에 서 있다. 스님의 덕화를 기리며 생각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며칠 전 도반과 옛이야기하며 그때는 그랬지 하고 맞장구치며 파안대소하였다. “스님. 나뭇잎이 아닌 꽃잎에 새겨 보냅니다. 물에 던져버렸다고.” 엄남포 보살하루가 무사해서 다행이고 하루를 잘 견뎌내서
무진장 스님우리 시대의 부루나 존자이시다. 불교대학원에서 포교학을 강의하실 때 인연이 되었다. 진리는 밥상의 밥그릇처럼 늘 우리 곁에 있는 법인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둡고 먼 탓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또한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중생을 위해 다 써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첫째도 포교, 둘째도 포교, 마지막도 포교”라고 말씀하실 때는 결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엄숙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간혹 선승(禪僧)다운 유머로 풀어 주실
혜암 스님스님은 나비 모습으로 나에게 들어왔다. 스님께서는 “나비가 되어 이 꽃 저 꽃을 마주하며 공부하다 죽어야 해.” 하는 말씀을 화두 아닌 화두로 삼으라 하셨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각인이 되었다. 나는 다음달 11월 말이면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는다. 글을 쓰는 시간이 용맹 정진하는 시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공부하다 죽어라”라고 말씀해주신 스님, 그립습니다. 박순금 아줌마박순금 아줌마는 30년 째 우리 집 일을 거들어 주고 있다. 순금(順金)으로 왔지만 성실하여 지금은 ‘박성실(誠實)’로 불리며 ‘보현행’이라는 불명
명성 스님어느 날 길을 가다 미술관이 보여 들어가니 화가에게 묻는 글이 입구에 쓰여 있다.“무엇을 하는 사람이오?까치 그리는 사람이오.”이 글을 보는 순간 스님이 겹쳐졌다. 하늘에는 명성(明星)의 별이 떠있고 땅에는 명성(名聲)의 이름이 떠돌고. 스님, 무엇을 하는 스님인지요? 마음으로 묻고 마음으로 답을 받으며 삼배를 올렸다. 목정배 교수님미천당 철우 법사로도 불린다. 생전에 세제(世諦)불교 운동을 하시며 많은 법사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교수님이 창간하신 포교지 〈법수레〉는 올해 제300호가 출간되었다. 지난 10월 3일 정각
지허 스님산에 가서 나무 해다 불 때고 아궁이 불꽃 보며 놀다가 고구마 구워 껌정 묻히고 입가 데어도 그 맛이 산해진미, 더는 없다고 혼자 노시며 가끔 소식 주시는 스님이다. 그 중 한 소식 지면에 실어 본다.지난번 백양사에 오셨다가 여기까지 이 소납을 찾아오시니 옛 도반이 온 듯 정회가 깊었습니다. 지난해 서울에서 이 시골 산중까지 몸 다친 변변찮은 중을 위하여 끓여 오신 죽은 아직도 몸속에서 식지 않고 자비의 맛을 지니고 있으며 나무에 박힌 공이처럼 뚜렷합니다. 업장을 짓지 않는 것이 향상의 길이라 하나 선업은 지어 보는 것이
정오 스님스님이 계시는 절은 높은 산이나 심산유곡에 있는 절이 아니다. 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와 서로 곁을 내어주며 물에 젖은 솜을 건져 짜내어 말려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사시는 스님이다. 가끔 도심 속에서 살며 지내는 사람들에게 짧지만 오랜 여운의 청량감을 주시니 감사하다. 마냥 앉아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털고 일어나는 그날, 앉고 서고가 없는 그 자리가 여여(如如)하다고 일어나 걸으실 그날을 기다린다. 선선(禪禪)한 바람이 불어오기를. 삼현거사삼현거사는 나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병원놀이를 즐겨하며 자랐다. 내가 일하
불모 석정스님의 편지다녀갈 때면 늘 대문 밖에까지 나와 배웅해 주시던 석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원상, 달마대사, 관세음보살 등 작품 세 점을 편지 한 통과 함께 보내 주셨다. 그 편지를 그대로 옮겨 본다.보살님, 무덥고 비 나리는 삼복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나는 요즘 죽은 뒤에 몸을 동대병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죽은 뒤에 몸을 썩혀 내버리거나 태워버리는 것보다는 피 한 방울, 털 한 개라도 쓸 수 있으면 좋고, 몸을 학습용으로 써도 보람 있는 일이고, 이 일이 나의 마지막 작은 효도라 생각했습니다. 보살님에게 알려드리고
서암스님대나무가 수명을 다하면 꽃을 피운다는데, 스님 어디 계십니까?詩 한 수 올립니다.꽃물이 진다잎을 떨구려고눈물이 마른다나를 놓으려고꽃물과 눈물은꽃으로 찾으라 한다 동네 목사님어느 날 동네 목사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이웃 종교도 또한 이웃사촌이려니 생각하고 그에 응하였다. 그곳에 목사님, 권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집사님 등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는 내심 놀랐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불교에 대한 질문에 아는 대로 대답을 하며 친교를 다지는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교회에서 법문(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 사람
스님을 뵙고 말씀을 받들다 보면 ‘꽃 처방(염화미소)’을 받는다. 음성엔 활기가, 웃음엔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어느 곳에 있든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서 있는 모든 곳이 참되리라(隨處作主, 立處皆眞).’고 일러 주고 쥐어 주셨다.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실이 진리임을 말씀하시곤 일상 속에서의 참선을 노래하듯이 들려주셨다. 그동안 마음의 그네를 타고 곳곳을 둘러보았다. 지금도 비록 천국같이 평화로운 곳에 늘 다리 내리고 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 달콤 쌉싸름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뭔가가 기다리고
철산스님선방 대중공양을 다니다 여러 번 인연이 되어 ‘돼지보살’(기도는 하지 않고 잠만 잔다고 해서)이라는 별호를 붙여주신 스님이다. 하늘을 보지 않는 돼지는 넘어져봐야 하늘을 볼 기회가 생긴다. 어려움을 겪어보고 행복의 의미를 알 때쯤 찻자리가 꽃자리 되어 꽃이 되라 하네. 호경거사음악을 좋아하는 큰아들(이재성)이다. 어릴 때, 팔베개를 해 주면서 숫자 세기를 자장가로 대신했고 젖 물리고 재울 때는 ‘주인으로 살래, 종으로 살래’를 노래하듯이 토닥여 주면서 키웠다. 불교를 전혀 모르는 일상이었지만 은연 중 그때 佛씨가 심어졌나 보
종진 스님부처님께서 가정법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가까운 도반들이 모여 경전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가정법회는 한 달에 한 번 20여 년을 한 차례도 거른 적 없이 얼마 전까지도 이어졌다. 법회 횟수로 말하자면 1년에 12번씩, 20년만 했다 해도 240회 이상 가정집에서 법회를 본 셈이다. 각자 전생의 연(緣)이 있어 귀한 불법을 만났다고 생각한다.이 공부 모임에서 조그마한 심부름이라도 한다는 사실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만 하고 세상 어떤 일보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말할 수
봉철스님 무척 궁금했다. 일명 욕쟁이 스님이시고 언제 어디에 어떻게 나툴지 모른다는 스님이….어느 절에 잠깐 들르신다는 정보(?)로 28년 전 어느 날 지체 없이 비행기를 타고가 남도 어느 절에서 처음 뵈었다.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둥둥 떠있는데 저○은 왜 서 있냐고 일갈하셨다.내가 “스님이 욕을 하신다면서요?” 하니 “야, 이○아, 아무나 보고 욕을 하냐!” 하시면서 “너는 내생기도나 해라.”하고 말씀하셨다.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어 가끔 양백정사로 가서 스님을 찾아뵙고 지도를 받았다.성정주 보살 당신과 나는 지금 40세 된
대희 스님길에서 만났기에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지요.(步步談) 만날 때마다 잊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큰 대(大), 기쁠 희(喜)라고. 은사스님께서 크게 한 번 웃으라고 지어 주셨답니다. 어느 순간, 문을 열고 크게 웃으려니 웃음이 지워지며 닫힌 문만 그리움으로 고였답니다. 길(道), 길(道), 길(道)에서 만나 보보담(步步談)한 스님이 길인가요? 저 길인가요? 어느 길에서 크게 웃고 계십니까? 크로바 아파트 회장님물건과 사람은 서로 인연을 맺고 살고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분이
활성스님스님은 법이다.고요한 소리를 보고 듣고 삼키신다.나는 따라쟁이다.밥짓는 소리로 향기로 뜸을 들인다. 소윤아가태어나는 것도 인연만나는 것도 인연떠나는 것도 인연인연을 맺고 인연의 끈으로 인연을 불러옵니다.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손녀아가의 웃음이 식구를 자석처럼 빨아들입니다.아가의 존재는 가족을 한데 묶는 강한 끈이기도 합니다.그래서 당신은 땡큐. 땡큐 보살입니다.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도견스님 일주문을 바라보고 예를 갖추니 스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계단을 한발 한발 옮겨 가까이 가니 스님은 냉큼 손을 잡고 굽은 등으로 걷기 시작하셨다. 스님 방에 도착한 순간, 첫 말씀. “나랑 공부합시다.”그렇게 기연(奇緣)이 되어 스님께서 남기신 밥도 먹어 보았고 입으셨던 옷도 걸쳐 보았다.그리고 누군가 평상에 놓고 간 주장자도 건네받았다. 스님이 열반하신 후 다비식에서 습골의식에도 여러 스님들의 배려로 동참했다. 스님께서는 담박함을 즐기셨으며 나옹선사의 게송을 자주 말씀하셨다.“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
법산스님법산 스님은 웃음이 법문인 스님이시다. 동국대 정각원에서 ‘자아와 명상’ 시간이었다. 만학도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학생 신분이기에 수업 시간에 모자 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는 적잖이 난감했다. 자아와 명상시간이지만 나는 내 머리에 이고 있는 모자를 내려놓아야 할지 계속 쓰고 있어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수업이 끝나자 스님 방에 가서 차 한 잔 하자고 하시는 말씀에 순간 나를 풀어 주시려는구나 하는 마음 또한 들었다. 스님께서는 모자 쓴 내 모습이 밝고 단정해서 좋다고 하시며
간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햇살에 빛나는 흰 눈에 눈이 부시다.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눈꽃을 피우고 산길은 발자국 하나 없다. 내소사 일주문을 들어서니 묵언 팻말을 목에 건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들고 있던 지팡이로 널려진 하얀 광목천 같은 눈 위에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다’고 쓰셨다. 분필 닿는 소리를 또박또박 내며 칠판에 쓰는 글씨처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용문사에 갔다. 가족 모임이 있어서 그 동네에 다녀오다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래전에 가보았던 은행나무가 있는 용문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만 해도 1
⑤ 성수 스님·여래심 보살성수 스님어느 날, 직지사, 청암사, 황대선원을 정하고 순례길에 나섰다. 서울에서 거리가 있는 관계로 황대선원은 30분을 정하고 스님을 뵈었다. 짧은 시간에 스님께서는 사람의 도리를 말씀하셨다. 도(道)라 하면 무슨 요술이나 마술로 오해하고 있는데, 인간으로서 인간됨을 벗어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손에게 자신의 일생을 둘러보아 부끄럼이 없는 생활을 사는 것이 바로 도(道)라고 말씀해 주셨다. 말씀 말미에는 보살은 배고픈 중생들을 보면 “야, 이놈아! 젖이나 한통 먹어라!”하며 보듬어 주는 보살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