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고유 특성 형성하며 전개 한국사회 현실 속에서 미래 여는 종교로 변해야 한국은 지리적·문화적·역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태생적으로 주변부의 속성을 지녀왔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다층적 공간 속에서 중화문명의 수용자이면서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한편 근대 이후에는 서양문명의 이식과 적용 과정에서 ‘탈전통’의 혼돈과 ‘탈주체’의 정체성 균열을 경험하였다. 근현대기에 나타난 맹목적 근대화 지상주의는 동양이라는 주변성, 더욱이 식민지의 아픈 상처를 탈피하고 넘어서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한국사의 흐름을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면, 특수(로컬)와 보편(글로벌)이 교차하면서 양자의 갈등과 융합이 되풀이된 과정이었다. 한국
영욕의 세월로 점철된 현대불교사 각종 탄압으로 발전 동력 잃어 철학적 사유와 이타행 중심 불교 유토피아 구현 위한 꿈 가져야 현재 한국불교는 기로에 서 있다. 출가자 수는 점차 줄고 있고 신도는 고령화되었으며 도시, 청년, 지식인층에서 더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교를 포함한 종교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과연 수십 년 후에도 불교는 현재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불교와 사찰에 대한 호의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불화, 불상 특별전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템플스테이가 성공한 것은 전통문화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스타급 스님들의 대중강연과 책이 인기를 끄는 것도
기독교 지지한 정부 행태에도 기득권 세력 유지 위해 협조 타율적 정화로 비전 제시 없이 수준 낮은 승려 이미지만 부각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감격스러운 광복의 환희를 맞이했다. 불교계도 식민지의 잿빛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종교, 전통종교로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했다. 해방과 함께 독립된 민족국가 탄생이라는 벅찬 기대에 들떠있던 1945년 9월에 전국 승려대회가 열렸고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교단의 중추적 세력이 모인 이 자리에서 불교의 장래와 개혁 방향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찰령과 같은 식민지 유제를 혁파하고 중앙 교단기구를 설립하며 교헌을 제정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또 교구제와 교도제 시행, 사찰재산의 통합,
근대불교학 서양서 역수입 돼 日 이어 조선도 연구에 박차 오리엔탈리즘 인한 ‘열등’ 각인 다각적인 접근으로 해소해야 근대불교학은 19세기에 서양에서 탄생하여 아시아의 수입도매상인 일본을 통해 20세기 초 한국에 전해졌고,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에 의해 불교 전통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근대에 들어 서양은 오리엔탈리즘 시각에 의해 타자인 아시아를 열등하게 바라보았다. 서양의 오랜 문헌해석학 전통과 실증주의적 학문 풍토에서 비롯된 동양학에도 동양에 대한 편견과 서양의 우월의식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근대학문으로서 불교학은 불교의 원산지이자 오랜 역사전통을 자랑하는 아시아에 역수입되었고, 기존의 절대적ㆍ교조적 신념체계 대신 창시자 붓다와 불교의 사상 및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시도
일본불교 받아들인 우리나라 암암리에 대처식육 승려 늘어 전통불교 근간 뒤흔들었지만 용인하는 풍조 크게 확대돼 19세기 말 이후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조선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한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불교 근대화와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내세운 승려의 결혼과 육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문명개화론, 사회진화론의 유입과 함께 승려의 결혼과 교단의 확대를 인구 증식, 생산력 제고와 연결시킨 근대화 지상주의가 풍미하였고 대처 허용론의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 강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위해 신도 국교화를 시행하였다. 이와 함께 불교에 대한 폐불훼석 조치를 단행하고 1872년
조선불교양종 30본산제 시행 본사주지 임면권 총독부 관할 정치적 종속에 비판 일었지만 식민지 체제 불교 속성 심화 1910년 8월 29일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원종의 종정 이회광은 종단의 정식 인가에 협조를 얻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0월 6일에 그는 일본 조동종과 원종 간의 연합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연합조약의 성사는 일본 조동종의 한국포교사 다케다 한시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는데, 내용상 한국불교 전체를 일본불교의 한 종파에 종속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이 12월 무렵 국내에 알려지자 개종역조의 매교 행위라는 성토가 이어졌다. 이에 1911년 1월 이후 한용운, 박한영 등 선각적 승려들이 주도하여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불교 억압 상징 도성출입 해제 후 일본불교 추종하며 근대화 꿈 꿔 전통 벗어나 대중화 노력했지만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 안 보여 19세기는 정치사회적 위기의 시대였고 현실적 변혁 요구와 함께 종교적 갈망이 강하게 분출한 시기였다. 조선적 전통의 일부였던 불교도 서학과 동학, 기독교와 신흥종교의 발흥에 맞서야 했고 여러 계층에 걸친 신앙활동과 결사운동이 행해졌다. 그렇지만 불교는 시대적 과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고, 스스로의 가치를 성찰할 겨를도 없이 근대화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국과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 단행 후 서양을 답습한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 나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역사서·족보 등 간행 급증 수요 따라 불교계에도 영향 삼보종찰 관념 형성 이뤄져 조선후기에는 불교 전통에 대한 자료 집성과 불교사 인식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각종 전등 계보와 승전, 사찰의 역사를 담은 사지 등이 만들어졌고, 이들 불교역사서의 찬술은 대부분 18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학과 서학을 필두로 하여 외래 신사조가 조선에 신속히 유입되었고 사상과 문예 등 여러 분야에서 전환기적 모색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적으로 역사전통의 집성 작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즉 역사서, 백과전서식의 유서, 족보, 문집 등의 편찬 및 간행이 급증한 것이다. 이는 그에 대한 수요와 관심을 보여주는데 불교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나온 불교역사서 중 대표적인 책
선 분류·우열 두고 100년 논쟁 ‘선 수승 주장’ 백파에 초의 반박 中 없는 ‘진귀조사’ 관념 계승돼 禪과 敎 병렬구도 한동안 이어져 ? 19세기에는 선의 분류와 우열 관계를 둘러싸고 거의 100년간에 걸친 선 논쟁이 펼쳐졌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3종선 분류를 주창한 백파 긍선이었고, 이에 대해 초의 의순이 반박하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거시적 관점에서 선 논쟁은 교학의 성행, 특히 18세기 화엄교학 이해의 심화가 선종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 논쟁에서는 선의 종류를 나누고 상호 관계를 설정하면서 선에 대비되는 교, 그 중에서도 화엄의 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선
중국 표착선에 실린 1천여 불서 화엄교학 전성시대 크게 기여 관련 판목 마멸될 정도로 인출 조선 사상계 접점에도 일익 담당 18세기 이후에는 이력과정을 중심으로 강원에서 강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교과에 속한 화엄의 강경과 교학 연구가 중시되었고, 화엄 및 이력과정 교재를 대상으로 한 강의노트이자 주석서인 ‘사기(私記)’가 다수 저술되었다. 화엄학 유행의 계기가 된 것은 중국 불서의 우연한 전래였다. 1681년 전라도 임자도 앞바다에 풍랑으로 좌초한 중국 상선이 표착하였다. 배 안에는 사람은 없고 의문의 불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때 표류해 온 중국 배는 황벽판일체경(철안판) 판각을 위해 중국의 가흥대장경(가흥장) 간인본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었다. 가흥장은 1589년부터
학승-유학자, 사상적 교감 심성 논쟁 두고 설왕설래 불교 옹호론 유학계 등장해 西學 대비한 새 가치 모색 성리학이 정치와 사상, 사회와 문화를 주도한 조선시대에도 유학자와 고승 사이의 인적ㆍ지적 교류는 지속되었다. 유교사회에서 유불의 접점을 찾기 위한 불교 측의 노력도 계속되어 일심을 매개로 한 유불도 삼교의 합일이 주장되었고, 유교의 ‘성즉리(性卽理)’에 대비되는 ‘심즉리(心卽理)’의 심성 이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일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승려들의 문집이 대거 간행되었고, 각 문파에서 고위 관료와 유명 문사들에게 비문을 의뢰하여 고승의 비가 다수 세워졌다. 조선시대 학승들은 대개 유학에 대한 기본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명사들과 시문을 주고받거나 사상적 교류를 한 이들이 적지
17c 승려 노동력 국역 활용 균역법 시행에 승역 과중화 전문기술 갖춘 승려 배출도 17세기 이후 문파가 형성되고 법통, 교육 및 수행체계를 세우면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데는 승려의 자격과 활동이 인정되고 사원경제의 토대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는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대가로 승려의 특수신분을 용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쟁에 참여한 의승군에게는 도첩에 상응하는 선과를 지급하였고 팔도도총섭 휘하에 도별로 2명의 총섭을 두어 의승군을 조직, 통솔하게 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재조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광해군대에는 궁궐 등의 조영에 승군을 동원하였고 인조대에는 보다 제도화된 방안이 시행되었다. 즉 벽암 각성을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고 삼남지방의 승도를 동원하여 남
내세 기원·정토왕생 염원 구축 승속 어우러진 신앙공동체 결성 기독교와 근대종교 생존 각축전 조선시대 불교는 여성과 서민 위주의 신앙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왕실과 중앙의 세도가, 하급관리와 아전, 각 지역의 토호 등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불교신앙이 이루어진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불교식 제의와 내세관이 유교의 제사와 선조관, 죽은 후 정신은 기와 혼백으로 흩어져버린다는 관념으로 바뀌게 된다. 즉 지식층 및 사회주도층의 경우 사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불교와 유교의 일대 각축전에서 유교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신앙은 업과 윤회로 상징되는 세계관, 죽은 이의 명복과 안녕을 비
간화선 중심 수행법 이력과정 반영 마음-이치-조사풍 습득 순 정리 종합적 성격 삼문체계 필요 따라 교단 결속력·선종 정체성 다져 17세기에는 문파와 같은 교단 조직이 형성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화되면서 이를 토대로 선교겸수(禪敎兼修)의 방향과 간화선의 선양을 기조로 한 승려 교육과정과 수행체계가 확립되는 등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청허계(淸虛系)의 조사이자 조선중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청허 휴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이후 교단의 사상 및 수행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학을 입문으로 삼아 선과 교를 함께 수행하되 지해(知解)에 얽매이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간화선의 화두를 참구하라는 ‘사교입선(捨敎入禪)’ 방식을 주창하였다. 그 요체는 간화선 우위의
17세기 전반 ‘임제태고법통’ 정립 한국불교 정체성, ‘선종’ 자리매김 청허, 부휴계 문파가 먼저 형성돼 법통, 유교 ‘도통론’과 유사 구조 당시 시대상·역사인식 그대로 담겨 조선불교의 전통과 법맥에 대한 인식이 최초로 표명된 것은 17세기 전반으로 이때 확정된 것이 바로 ‘임제태고법통’이었다. 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종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당시 공인된 법맥 계보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임제법통에 내재된 불교사 인식은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의식을 투영한 것이었고, 앞서 정립된 사림의 도통론과 정통주의라는 면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한편 17세기 전반에는 청허 휴정(1520~1604)과 동문 부휴 선수(1543~1615)의 계보를 이은 청허계와 부휴계의
1592년부터 7년 간 왜군 침략 휴정, 도총섭 임명… 승군 모아 영규의 승군, 금산 혈투서 전사 사명 스님 戰後 외교서도 활약 승군, 전투·산성 조성 성과 보여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한 후 정확히 200주년이 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을 거쳐 1598년 일본군의 퇴각까지 무려 7년간이나 조선 땅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전국토가 유린되는 가운데 명과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반복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만주에서는 후금세력이 발호하여 1636년에 청을 세웠고 명은 1644년에 몰락하였다. 조 선은 국가재조를 위한 각고의 노력과 함께 후금 및 청에 대처해야 했으며 결국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다. 또한 일본은 임
명종 5년 선·교 양종 다시 세워져 승과도 부활… 휴정·유정 등 배출 봉은사·봉선사, 선·교종 본사 담당 보우·수진, 각각 선·교종판사 맡아 문정왕후 서거 후 양종 모두 혁파돼 16세기는 법제적 폐불이 단행되고 선교양종이 일시 재건되었다가 혁파된 격변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변동과 지속의 양상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파악할 것인가에 따라 조선시대 불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카하시 토오루는 〈이조불교〉에서 이 시기를 폐불기, 그리고 청허 휴정과 같은 고승이 일부 나와 명맥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결국 쇠퇴와 멸절의 길이 가속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일반적인 한국불교사 개설에서도 조선전기는 억불과 폐불을 특징으로 하며, 그 정점을 찍은 시기가
유교 국가 조선, ‘숭유억불’ 기조지만 왕실 일반인 신앙 관념은 불교 ‘숭불군주’ 세조, 〈석보상절〉 편찬해 한양 가운데 원각사 창건 사리 봉안 불교식 상장례 의식·49재도 지속돼 조선은 이념과 정책, 의례 등의 공적 영역에서 유교 국가를 지향하였고 불교는 주류질서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숭불과 불교 후원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고 국왕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왕실과 유학자 관료 사이에서 불교신앙 및 후원을 둘러싼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이는 불교가 국왕의 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역대 국왕과 왕비 등의 사후 명복을 빌고 추숭하는 역할을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왕실 구성원의 다수가 비빈과 모후, 공주 등 국왕을 둘러싼 여성이었던 것도 불교신앙의 지속
조선 건국 태조는 유화책에 가까워 태종부터 본격적인 억불정책 시작돼 세조는 호불군주… 개인적 신앙 깊어 연산군, 사화 일으키며 폐불정책 시행 16세기 임란 거치며 부활 전기 만들어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의 시대로 표현되는데 억불의 강도와 정책의 방향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불교정책의 기조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먼저 태종부터 성종대까지는 강도 높은 억불정책이 시행되었고 이어 연산군, 중종대에는 불교 관련 법제가 사문화되면서 공식적 폐불이 단행되었다. 16세기 중반 명종대에 일시적으로 선과 교의 양종이 재건되었는데, 이는 승려의 인적 계승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불교 존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법제상의 변화는 없었고 불교를 공인하지도 않았지만, 현실적 필요에 의해 국
‘조선=배불’ 이란 통념은 ‘자학사관’ 국가·민중·문화 등 불교 역할 ‘충실’ 日 다카하시, 불교 부정론 정형화 식민사관 덧씨워져 이미지 고착돼 조선시대 불교 역사 신앙 재조명해야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의 오랜 기간 동안 사유와 가치, 종교와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국적 전통의 근간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고 1392년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세워지면서 불교의 위상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는 유불교체, 즉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고 그것은 사회와 일상의 여러 측면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여말선초, 즉 14~15세기 전반에 일어난 유불교체의 시대적 배경과 당시 집중적으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