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통의 업장소멸 경전으로 유명한 〈지장경〉. 〈지장경〉은 오랜 세월 동안, 악업 중생의 구제와 교화의 최전선에서 그 역할을 해왔다. 교화되기 힘든 하(下) 근기 사람들의 무지한 악습은 어떻게 타파되는가? 경전 속에도 이러한 질문이 나온다. 지옥으로 물밀 듯 밀려들어 오는 악업 중생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천왕이 묻는다. 악업 중생, 구제불능 아닌가요“세존이시여, 지장보살은 오랜 겁을 지내오면서 그와 같은 큰 서원(大願)을 발했는데, 어찌해 지금에 이르도록 아직도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 못하고 또 광대한 서원을 발하옵니까?”
불교에서 나를 윤회하게 만드는 ‘이것’을 ‘업(業, Karma)’이라고 한다. 업이란 무엇일까? 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대장엄경론〉 속 어느 바라문의 질문을 살펴보자. “친교 바라문이 (붓다의) 무아(無我)의 설을 듣고 의심이 나서 물었다. ‘만약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면, 윤회에 있어서 누가 후세에 태어난단 말입니까?’ 제석천은 ‘과거세의 번뇌로 말미암아 여러 업을 지은 까닭에, 그 ‘업’에서 ‘현재의 몸’이 생겼거니와, 현재에 있어서도 다시 여러 업을 짓는다면, 내세에서 다시 거기에 해당하는 몸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대승불교의 전통에는 석가모니불 이외에도 아미타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미륵불·약사불·연등불 등 다양한 부처님이 등장하게 된다. 무수한 부처님들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식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수인)이다.(도판 ⓛ~④)‘항마촉지인’은 한자 그대로, ‘촉지(觸地, 땅을 가리키다 또는 어루만지다)’하자 ‘항마(降魔, 악마가 항복하다)’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땅을 가리켜 악마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모든 장애를 물리침과 동시에 정각의 일어난 순간이기에 ‘석가모니가 도(道)를 이룬
석굴암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대각상’(또는 석가모니성도상)은 석가모니 붓다께서 대정각(大正覺,큰 깨달음 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모습이다.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기까지 총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무수한 전생에서부터 붓다는 정진해 왔다. 특히 가까운 전생에서는, 아라한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 6바라밀의 공덕까지 갖추는 데 여념에 없었다. 내게는 믿음과 노력과 지혜가 있다. 어찌 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몸과 피는 말라도 지혜와 하나 된 마음은 더욱 편안할 것이다. 보라, 이 마음과 몸
지난 연재에서는 석굴암 건축에 담겨있는 비밀을 알아보았다. 어째서 화강암의 ‘돌’ 건물을, 그것도 ‘원형’의 형태로, 토함산 그 높은 곳에 올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을까? 원형이라는 모양에 담겨있는 종교적 상징은 무엇일까?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지난 연재에) 풀어보았다.(도판① 돔Dome 형식의 천개와 천개를 둘러있는 감실 도안. 천개는 연꽃이 만개한 모습인데, 감실 공간은 마치 연꽃잎이 둘러 핀 것처럼 배치됐다. 도판② 석굴암 원실의 도면. 본 법당은 거대한 여의주의 공간이 구현됐다.) 그럼, 이번 연재에서는 석굴암 내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경주 석굴암.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유산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석굴암은 어떤 이유로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석굴암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는 걸까? 그 특징과 상징을 알아보도록 하자. 영원불변 ‘돌’이라는 소재먼저 석굴암은 건물이 전체가 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주 토함산의 사뭇 높은 위치에 건축됐다. 사찰 건물은 통상적으로 나무 기둥과 기와 지붕으로 만들어진 사각 형태의 건물이다. 그런데 석굴암은 화강암이라는 경도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인 ‘관세음보살32응탱’에는 관세음보살이 뭇 중생을 구제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등장한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자는 혹 큰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니, 이는 보살의 불가사의한 힘 때문이다. 혹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으로 가게 되며, (중략) 혹 큰 폭풍이 불어와 배가 뒤집혀 떠내려가더라도, 누구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觀世音)’이라고
우리는 5가지의 몸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석가모니 붓다는 5온(五蘊)이라 했다. 다섯 가지의 덩어리 또는 무더기란 뜻으로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이다. 우선 물질로서의 색신(色身)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본래 용어는 색온(色蘊)이나,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색신이라는 용어를 본 글에서 쓰기로 한다.) 색신이라는 물질로서의 몸체(물질체) 이외에도 수신(受身), 즉 감각 또는 감정의 몸체(감정체)가 있다. 감정의 몸체는 긍정적인 면모보다 대부분 부정적인 면모로 형성되어 있어
‘사유상’의 주인공은 고타마 싯타르타 태자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석기모니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태자 시절의 본명(속가 이름)이다. 그래서 이 존상을 ‘태자사유상’이라고도 한다.또는 석가모니가 아직 붓다가 되기 이전 보살의 상태이므로, 경전에서는 ‘석가보살’로 칭하고 있다. ‘사유상’은 태자의 어떤 모습에 근거한 것일까? 태자가 사유를 한다는데, 무엇을 ‘사유’하는 것일까? 또 ‘사유’란 무엇일까? 석가모니 붓다의 생애 전체를 대大 서사시의 형태로 최초 저술한 마명(馬鳴, AD 1~2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손꼽히는 것 중 하나가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를 풍미했다. 약 100년 동안(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남아있는 다양한 삼국시대 조각상 중, 조형적으로 가장 높은 완성도를 이룬 것으로 보아, 당시 종교 미술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이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정립하여 약진할 당시, 그 한가운데에서 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사마타 수행과 그것의 과정에 대해 간략히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심-사-희-락’의 초선정으로 가는 과정을 〈관무량수경〉에 기술된 비유와 함께 쉽게 풀이했다. 사마타 수행은 선정 수행 또는 (특정 대상에 집중하기에) 집중 수행으로도 불린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 펼쳐지는 주요 풍경 2가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보배 구슬’ 보주의 향연 아미타3부경(무량수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에는 무수한 ‘보주(보배 구슬)’에 대한 언급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보주로 장엄된 땅·당(幢)·누각·나무·연못·동자·연화대 등. 중중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수행법은 계(戒)-정(定)-혜(慧)이다. 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느낌을 많이 느낄수록 그것은 더 큰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픈 몸과 아픈 마음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파도친다. 여기에 불을 붙는 격이 되는 언행이 곧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계를 지키기 않았을 경우, 그것은 몸과 마음의 고통이 되어 다시 파도친다. 서로 상승 작용하여, 아주 작은 썰물이라도 몇 배의 밀물이 되어 후려치게 된다. 그 이유는 잠재의식 속의 유사 고통을 자극하여 그것과 함께 증폭 작용을 하기 때문이
부처님의 형상(形像)을 조성할 때, 필수 도상으로 여의주를 언급한 바 있다. ‘깨달음의 본체’로서의 여의주가 불교에 있어 핵심 도상(종교적 기호 또는 상징)임을 설명하였다. 청정범행의 완성이자 궁극의 불성인 법신(法身)으로서의 표상임을 논하였다. 본 글에서는 ‘깨달음의 작용’으로서의 빛(光, 광명)에 대해 풀이하고자 한다. 깨달음의 작용으로서의 빛 또는 광명은 부처님 형상을 조성할 때 ‘광배(光背)’로 나타낸다. 즉, 여의주와 광배가 없는 불상은 없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여의주와 광배가 없으면, 부처님형상이라 할 수 없겠다.
‘궁극의 깨달음’은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 불교 미술과 불교 경전은 모두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다. 미술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조형(그림이나 조각)으로, 경전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문자(또는 언어)로 그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불교 그림의 시원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중생들을 위해 그려진, 아잔타(기원전 1세기에서 7세기까지 불교 예술로 장엄된 인도 석굴)의 벽화로 잘 알려져 있다. 직관적 전달력에 있어 미술은 문자를 앞서기도 한다. 깨달음의 세계를 시각적 조형물로 표현하는 것은, 어느 시대이건 어느
사납게 생긴 머리의 뿔로 방자하게 으르렁거리며/ 시내와 산골로 치닫고 달리니 길에서 점점 멀어만 가네/ 한 조각 검은 구름은 골짝 어귀에 비켜 떠있는데/ 치닫는 걸음마다 아름다운 싹을 침범할 줄 누군들 알리요.-‘미목(未牧)’ 〈목우십송〉‘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지난 연재 회차에서 붓다께서 통찰하신 ‘12연기’에서 그 답을 찾았다. 12연기가 일어나는 과정 중 ‘유형(有形)의 삶(生)’이 나타나기 직전, 그것의 유발 요인으로서의 ‘갈애’(또는 愛取)를 소개했다. 삶을 거머쥐려는 집착의 갈애. 그것은 막강하
우리를 윤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왜 자꾸 다시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이다. 윤회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도 되겠다. 나의 근원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존재의 비밀은 무엇일까?기독교·유교·도교 ‘존재’ 창조설‘나는 무엇인가’ 또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존재의 창조설 또는 근원설에 대해 대표적 종교별로 간략히 살펴보자.우선, 기독교의 경우, ‘나
지난 연재에서 ‘존재의 바탕(법신)과 그것의 예술적 표현’에 대해 언급했다. ‘바탕 의식’의 특성은 ‘여여(如如)하다’ ‘고요하다’ ‘순수하다’ ‘청정하다’ ‘반응하지 않는다’ ‘부동(不動)이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사마타 수행을 통한) 바탕 의식에 대한 눈 뜸으로 인해, 고통의 개체의식(자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다는 원리를 논했다.이러한 바탕 의식을 ‘법신’이라 하고, 대승불교의 불신관 또는 우주관은 법신에서 시작한다. 법신에서 보신이 일어나고, 보신에서 응신이 일어나는 ‘법신→보신→응신’의 ‘삼신(三身)의
‘물고기는 물을 아는가?’ 즉, ‘물고기는 자신이 바다라는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물음이다. 답은 ‘모른다’이다. 단, 깨달은 물고기는 ‘안다.’ 이는 ‘사람은 자신이 허공(또는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물음과 같다. 답은 ‘모른다’이다. 단, 깨달은 사람은 ‘안다’이겠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바탕 공간과 그 안의 기체(공기)를 매양 인식하고 살지는 않는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죽듯이, 사람도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 하지만, 물의 바탕 공간, 공기의 바탕 공간을 일상에서 자각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극락왕생 또는 연화화생이란 ‘업장을 맑히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무명(또는 업장)을 얼마만큼 맑혔나에 따라, 〈관무량수경〉에는 9품(9등급)으로 나뉘어 왕생한다. 이에 극락왕생을 9품 왕생이라도 한다. 업장을 맑힌 자리에는 깨달음이 드러난다. 청정해진 바탕에서는 청정한 에너지가 피어난다. 이것을 연꽃이 피어나는 것에 비유하기에 ‘연화화생’이라고도 한다. 시커먼 무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투명한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중생은 업장의 습(習, 되풀이하여 행하다)대로 세세생생 자궁에 들어가 태생(胎生)의 과정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누가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갑자기 했을 때 하는 표현이다. “철들면 죽는다”라는 말과도 같다. 그만큼 자신의 악습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사람이 진정 변했을 때는 (물론 육신은 그대로이나) 그의 마음이 죽은 것이다. 마음의 재탄생! 이를 ‘화생(化生)’이라 한다. 극락왕생, 우리 중생의 공통된 염원이다. 극락왕생은 연화화생과 상통하는 말이다.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곧 ‘연화에서 화생한다’는 말과도 같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