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좌우 석주, 인도 유일 양식 기원정사 최초 건물터 간다쿠티 아쇼까 스투파들 흔적만 아쉬워 부처님 이적 기린 ‘천불화현탑’ 신통은 방편… 이성적 사유해야 답사일행을 태운 버스는 부처님이 교화를 펼쳤던 꼬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로 향해서 달리고 있다. 쉬라바스티의 옛 이름은 사왓티이고 한역으로는 사위성이다. 그런가 하면 현장은 쉬라바스티를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이라고 음역했고, 고 이기영박사는 ‘실라벌’을 신라의 국호와 연관시켜 보기도 했다. 운전수에게 쉬라바스티 도착시간을 물어보니 밤 9시쯤이라고 말한다. 나는 일행을 위해 차내 마이크를 잡는다. 순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도 되고, 아쇼까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였던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팔상록〉을 참고하여 설
성 인근 세워진 아쇼까왕 석주 부처님 생애 대한 흠모 느껴져 칠불사상 까삘라성 중심 전파 슛도다나왕도 깨달음 얻은 곳 까삘라성 두고 벌이는 네팔·인도 고고학계 논쟁 일행은 룸비니 북서쪽에 있는 틸라우라꼬트(Tilaurakot)로 간다. 까삘라성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부 고고학자는 룸비니 남서쪽 14.5km의 거리에 위치한 인도의 삐쁘라하와(Piprahwa)에 까삘라성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학설은 1975년 이후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누구나 네팔의 틸라우라꼬트에 고대 까삘라성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틸라우라꼬트가 고대 까삘라성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고고학자는 1896년 룸비니에서 아쇼까왕 석주를 발견한 휠러다. 그는 현장과 법현의 순례기를 참고하여 발굴
아쇼까왕이 룸비니에 세운 석주 “위대한 분의 탄생에 경배”기록 마을에는 조세 면제 등 예우도 악룡으로 묘사된 외도에게 파손 아쇼까왕 룸비니에 4개의 스투파, 석주 조성 답사일행을 태운 버스가 인도에서 네팔로 건너가는 국경 도시인 소나울리(Sonauli)에서 멈춘다. 오후 4시 55분이다. 네팔 정부의 입국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급행료를 지불했는데 지금은 1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통과된다고 한다. 국경 도시답게 상점이 즐비하다. 주로 네팔의 보따리장사꾼들이 인도의 물품들을 사가는 모양이다. 국경을 통과하고 나니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예약한 숙소는 네팔 쪽에 있다. 네팔 거리에도 예전과 다르게 숙박업소들이 많다. 룸비니를 찾는 순례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
독이 든 버섯 요리 공양하고도 시주자 걱정한 붓다의 자애로움 쿠시나가라에 조성된 열반상서 맨발로 설한 거룩한 역사 느껴 전생 부처님이 왕으로 살던 쿠시나가라 부처님은 왜 말라족이 사는 쿠시나가라를 열반지(涅槃地)로 정했을까? 부처님 인과법이란 한마디로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따른다는 진리이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를 열반지로 선택하셨던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연적인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인과법이 아니다.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머무시다가 우연히 쿠시나가라로 가시게 되어 그곳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이란 맹신이 아니라 이성적인 확신이기에 그렇다. 이 한 가지 예를 보더라도 불교란 물음표에서 시작하여 온갖 우여곡절 끝에
부처님 인연 깊은 바이샬리 아쇼카왕 석주 온전히 남아 사자상이 북쪽 보는 이유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리는 것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쿰나하르를 나온 일행은 파트나 시내를 관광하지 않고 바로 바이샬리로 행선지를 정한다. 파트나 도심지 북쪽으로 흐르는 강가강은 강폭이 바다와 같이 넓으므로 유람선을 타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일행은 바이샬리로 가 아쇼까왕 석주를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파트나의 강가강 강폭이 바다와 같은 까닭은 네 개의 강이 만나기에 그렇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칸타키강과 골고라강, 그리고 야무나강과 데칸고원에서 시작한 손강이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비유하여 신분차별이 없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는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아쇼카왕‘佛法 통치철학’ 현대 정치인에게도 귀감 지계 지킨 공덕 5가지 현재 수행자들 자문해야 7년 간의 야육왕사 분란 승단 정화의 어려움 전해 행실 바른 사람, 죽을 때 허둥대지 않는다 라즈기르에서 파트나까지는 90km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인도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파트나는 비하르주의 주도로서 강가강 남쪽에 있는데, 일행이 그곳을 답사하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에도 아쇼까왕 석주가 있기 때문이다. 파트나의 옛 이름은 빠딸리뿌뜨라, 혹은 꾸수마뿌라이다. 한역경전에는 꽃들이 많다고 해서 화씨성(華氏城)으로 나온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왕이 수도를 라자그리하(왕사성)에서 빠딸리뿌뜨라로 천도한 이후 도시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마가다국이
부처님 머물었던 왕사성 장림 1천명 귀의시킨 위의 느껴져 설법 듣고 감격한 빔비사라왕 최초 사원 죽림정사 건립 기증 아쇼까 석주는 사라지고 탑만 남은 신 왕사성 터 현재 인구 10여 만 명의 라즈기르 거리에서 가장 번잡한 곳이 죽림정사 앞 같다. 사람을 태운 마차와 승용차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주로 힌두사원이나 자이나교 사원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불교신자는 우리 일행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죽림정사에서 북쪽으로 2km쯤 가면 빔비사라왕이 조성한 신 왕사성 터가 있다. 신 왕사성이 조성된 이유가 흥미롭다. 빔비사라왕이 구 왕사성에서 살 때였다. 화재를 내는 사람에게는 성문 밖 시다림으로 추방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 적
부처님이 〈법화경〉설한 영축산 왕마저 걸어 올라가 설법 들어 골육상쟁의 빔비사라왕 감옥터 왕의 佛心 진하게 배어 있어 눈을 떠라, 빛이 보일 것이다 컴컴한 새벽이다. 답사일행은 영축산으로 가는 중이다. 이른 시간에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은 영축산에서 좌선하며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영축산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부처님이 빔비사라왕을 처음 만났던 곳이고, 제자들에게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을 설했던 산이다. 또한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위해하기 위해 돌을 굴린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산 정상에 아쇼까왕 스투파가 있는데, 왜 그곳까지 아쇼까왕이 힘들게 순례했는지 궁금하다. 영축산은 나에게 뜻 깊은 산이다. 15년 전 첫 순례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은 영축산
당시 최고 상아탑 날란다대학 수천명 학승중에 신라 구법승도 아쇼까왕 건립 사원이 ‘날란다大’ 로 1199년 무슬림 침공으로 황폐화 종교가 파괴 도구 된 아픈 역사 라즈기르 역시 아쇼까왕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라즈기르의 옛 이름은 라자그리하이고 한자로는 왕사성(王舍城)이다. 라즈기르에도 아쇼까 스투파가 여러 개 있고 11킬로미터쯤 떨어진 날란다에는 아쇼까왕이 건립한 사원이 있다. 그 사원이 큰 승가람으로 번성하여 굽타왕조 때 날란다대학이 된 것이다. 현장은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구법승들이 찾아가 공부했던 승가람이기도 하다.? 일행은 보드가야에서 라즈기르로 이동한다. 먼저 날란다대학 터를 가볼 예정이다. 날란다마을은 사리불 존자의 고향이다. 그래서 날란다에
부처님 정각 기린 마하보디 사원 세계 각국 순례자 ‘형형색색’ 장엄 한글 반야심경 독송하니 법열 젖어 고행처 유영굴서 ‘중도’ 의미 되새겨 시간의 덫을 벗어난 인도인의 행복 버스는 어김없이 아침 6시에 보드가야(Bodhgaya)로? 출발한다. 보드가야의 옛 이름은 부다가야(Buddhagaya)이다. 서둘러 가는 까닭은 보드가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이다. 보드가야에도 아쇼까왕의 유적이 있다. 아쇼까왕은 수자타가 살았던 마을에 수자타스투파를 조성했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장소에 사원과 석주를 세웠던 것이다. 보드가야가 다른 곳보다 더 의미가 깊은 것은 아쇼까왕의 첫 순례지이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은 재위 8년에 깔링가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겠다
현장·혜초 스님 순례한 녹야원서 다메크탑 돌며 ‘탑이름’처럼 되길 합장 최근 조계종 추진 ‘아쇼까 선언문’? 부처님법에 부합하는지 잘 살펴야 강가강에서 해맞이를 한 일행은 바라나시의 아침을 여유롭게 즐기다가 사르나트로 이동한다. 사르나트에는 아쇼까왕이 조성한 탑과 파괴된 아쇼까 석주가 있기 때문이다. 사르나트를 한역한 말이 녹원(鹿苑) 혹은 녹야(鹿野)다. 우리말로 풀자면 사슴동산이다. 부처님이 전생에 사슴의 우두머리였을 때 새끼를 밴 다른 사슴이 이곳을 다스리는 왕의 사냥감이 되자 대신 나서서 죽기로 하여 그 왕을 감동시켰다는 전생담을 근거로 녹원이라고 했을 터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셨을 때는 시신을 버리는 공동묘지 즉 시다림(尸茶林)이
답사일행이 탈 열차는 부바네스와르역에서 바라나시 부근에 있는 무갈샤라이역까지 달리는 밤열차다.? 인도의 특급열차는 장거리용 라즈다니와 12시간 미만을 운행하는 샤따브디가 있는데, 우리가 탈 열차는 침대가 있고 출발과 도착시각이 정확한 라즈다니다. 열차는 오전 11시 30분에 출발하여 무갈사라이역에는 새벽 1시 40분에 도착할 예정이니 14시간 10분 동안 열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 역사 안은 장바닥 같다. 역사 안까지 들어온 소가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비루먹은 개는 한 쪽에서 졸고 있다. 인도 승객들은 큰 눈을 무심하게 희번덕거리고 있다. 쓰레기가 뒹굴고 구걸하는 아이들이 낯선 이국인들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호텔과 역사의 풍경이?? 극과 극이다. 부처님은 양극을 여읜 진리를 중도라고 했는데, 내
현장법사 순례한 불교성지 우다야기리와 날리타기리 라트나기리를 답사한 일행은 버스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우다야기리로 서둘러 간다. 우다야기리는 비루파 강변에 자리한 고팔푸르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불교 유적지다. 우다야기리도 역시 부처님과 아쇼까왕이 다녀갔을 터이고 7세기 중엽에는 현장이 순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새 점심시간이다. 우다야기리는 오지인 데다 아직 참배객이나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가게나 식당이 한 군데도 없다. 답사일행과 동행하고 있는 현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출발 전에 간편한 도시락이라도 준비한 게 다행이다. 현지인을 섭외한 도곡거사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우다야기리 입구 양편의 풀밭은 그늘이 없고 짐승들의 분비물이 널려 있어 일행이 편안하게 앉
진흥왕·광개토대왕이 닮고자한 왕 '대당서역기' 아쇼까탑 조성 기록 라트나기리 승가림 밀교 수행 교육 아직도 발굴 진행, 출토물 걸작 평가 이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왜 아쇼까왕의 유적을 답사하는가 하고 묻는 분이 있다. 답사의 명분이 궁금하다는 것인데, 나와 혹은 우리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일 터이다. 불교를 믿지 않는 분의 궁금증은 더하다. 당연히 일리가 있는 질문이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불교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니까 4세기 후반이므로 기원전 3세기 때 활동한 아쇼까왕은 우리와는 역사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이 그리스나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으로 전법사신을 파견하였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때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이었던 것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의 임무" 사람·동물 위해 약초 재배하라 칙령통해 평화·생명존중 천명 ? 답사일행은 부겐빌리아와 빠또리아 꽃들이 만발한 다울리 언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코끼리 바위 주위로 모인다. 코끼리 바위에 아쇼까왕의 담마칙령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위에 왕명이 새겨져 있다 고해서 ‘바위 담마칙령’ 혹은 일본식 한자어로 ‘마애법칙(磨崖法勅)’이라고 부른다. 인도인 로이 청년이 영자 안내문을 보고 설명하지만 그 자신도 담마칙령(담바삐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나중에라도 가방에 챙겨 온 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쇼까왕의 생생한 유적지에서 책을 참고하고 의지하는 것은 고지식한 백면서생에게서나
고대 인도불교를 알기위해 아쇼까 연구는 필수 과제 부왕사망 왕장의 난 평정 등극 전쟁참상 목겨 정법 통치 서원 델리국제공항 부근에 있는 호텔에서 잠자는 흉내만 내고 일행은 컴컴한 새벽에 버스에 오른다. 동인도에 위치한 도시 부바네스와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새벽 5시 50분 비행기라고 하니 수속을 마치려면 출발 2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버스는 불빛 들이 가물가물한 공항 쪽으로 은밀히 잠입하듯 달린다. 긴 타월을 붕대처럼 머리에 두른 운전기사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다. 아쇼까왕의 유적을 찾는 첫날 일정부터 강행군에 들어간 셈이다. 답사일행 중에 몇 명은 이미 소임이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곡성 관음사 주지 대요스님은 원만한 답사를 위해 기도와 법문을 맡고, 경희대 양덕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