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은 제34회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다.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이뤄졌다. 내가 회장 소임을 맡고 있는 ‘KINHA(한국 HIV/AIDS 범종교연합)’에서도 유관기관 간담회를 개최하고 환자들의 외로움과 그에 따른 돌봄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장애인들은 장애등록제 폐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반해, HIV감염인들은 장애자가 되기를 오히려 원하고 있는 실정이니 환자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하고 고립돼 있는지를 알 수 있다.얼마 전 병원 법당에 다녀간 50대의 남성 환자는 약 두 시간을 대화하며 한
위드코로나로 돌아서면서 환자들을 맞이할 생각에 법당을 정리하며 새로 단장을 하게 된다. 물티슈 등의 물품도 헤아리고, 뭐가 부족한 것은 없는지 꼼꼼히 챙기게 된다. 5년을 넘게 장엄으로 두었던 한 보호자의 선물을 정리하게 됐다. 봉사자들이 버리자고 해도 못 버리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던 한 환우분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병실을 라운딩할 때 1인실 병실을 들어갈 때는 조심스럽다. 그래도 문을 노크하며 들어선 병실은 마침 임종을 앞둔 불자가 있는 병실이었다. 딸이 어머니의 간병을 도맡아
지난 여름 한 간호사를 통해 인연이 됐던 환자에게 안부 문자가 왔다. ‘스님 가을비 내리면 더욱 가을이 깊어질 것 같아요. 환절기에 감기 유의하세요.’ 시를 읊조리는 듯한 표현들이 유난히 우수에 젖은 목소리여서 기억에 남는 환자였다. 젊었을 땐 한창 잘나가던 사업가였는데 사기와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고 그 충격으로 건강까지 악화되어 의지할 곳 없이 기초수급자로 살아가는 50대의 여성 환자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언니와 동생이 있었지만 서로 소식을 끊고 단절된 채 살아온 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부모님의 산소에 오가며 자매들은 서
한 환자가 법당에 내려와 하는 첫 마디가 “스님 저는 죄가 많은가봐요”였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2년 사이에 4번의 수술과 자궁암을 비롯하여 유방암, 갑상선암까지 3개의 암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정말 얼마나 많이 놀라셨을까요? 고생 많으셨네요”하고 위로하자 환자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암이라는 병명을 듣고 사람에 대한 분노와 사회에 대한 비난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암수술을 한 환자들의 5인실 병실의 밤풍경은 낮과는 사뭇 달라요.” 자궁 적출하는 수술을 하고 자신의 슬픔과 고통에 매몰되어 있
작년 추석 무렵 한 노부부가 법당을 찾아왔다. 거사님은 80이 넘었지만 정정하신 데 반해 아내분은 걸음도 부축해야지 걸을 수 있을 만큼 보행이 힘들었고 보고 듣는 것도 어려워 보였으며 말하는 것까지 어눌하였다. 약 6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고 깨어난 뒤 온전한 몸으로 회복되기엔 어려운 상태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공덕으로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이렇게라도 살아주어서 고맙지요.”라며 거사는 얼굴에 굵은 주름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난 후 추석명절이 가까워 오는 근래 거사님은 또 법당을 찾았다. 이번엔 혼자
얼마 전 72시간 탑돌이를 하는 도량에 다녀왔다. 꼬박 3일 동안 탑돌이를 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부처님께 참회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힘든 기도의 시간은 ‘정화’라는 선물을 주는 것 같다. ‘나무묘법연화경’을 정근할 때 내 곁을 스쳐간 많은 환우들이 생각났다. 그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특히 한 환자를 떠올렸다.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일반병동에서 투병을 하던 중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급하게 1인실로 옮겨 그곳에서 임종을 맞게 된 환자였다.아직 나이가 50대였고 늦게 암을 발견하여 손을 쓸 수 없는 상태
지난 7월 4일 전국비구니회 CPE센터는 8명의 첫 교육수료생을 배출했다. 16주간의 장거리 마라톤 같은 교육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5주 동안은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했고 마지막 주인 16주에는 대면으로 CPE센터 강의실에 모여앉아 평가하며 조언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육을 시작할 때는 자신들의 약점에 민감하였는데 어느새 학생들은 자신의 약점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의식을 확장해가는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자신을 ‘작은 돌’로 비유했던 한 학생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이 아니라, 큰 돌의 중심을 잡아주고
코로나19시대를 맞아 많은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산지가 어느덧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감염인을 위한 한국범종교단체의 회장이라는 소임을 맡음과 동시에 코로나 19를 맞닥뜨리게 되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활동을 멈추라는 사회의 요청 속에서도 움직여야하는 우리의 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염인들을 위한 요양원·요양병원 시설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감염인들의 사회적 낙인과 방치의 현실’은 계속되고 있기에 어떻게 이 실타래를 풀어야 할 것인가가 가장 큰 화두였다.‘유관기관 간담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기관들의
몸이 불편하신 스님을 모시고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드린 후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원내 식당을 찾아 들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스님”하고 부른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바로 며칠 전 전화 통화를 했던 한 보살이었다. 눈에 반가움의 눈물이 금새 맺히는 것을 보며 나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어쩐 일이세요”하고 물으니 “아들 외래진료차 왔습니다. 뒷모습을 보는데 꼭 스님 같다고 하니 우리 아들도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제가 막 달려 온 겁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친다.코로나19로 인해 환자 방문뿐 아니라 병원의 출입까지 힘들었던 지
코로나19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부처님오신날 강당 행사를 중단하고 직원들을 위한 떡과 음료수 나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행사를 앞두고 준비를 위한 회의를 위해 몇몇 병원 봉사자들을 사찰에서 만나게 되었다. 봉사자들은 서로 반가워하며 지난 부처님오신날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지난해 코로나19가 터진 후 처음 몇 달은 마스크 품절로 인해, 병원 의료진들도 마스크 부족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다. 불자들과 힘을 모아 마스크를 모아 병원에 기부했던 일을 얘기하며 봉사자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아휴 그때 마스크 몇 개 가지고 스님을
올해 1월 1일 전국비구니회관 내 ‘전국비구니회 CPE센터’를 개원하고 3월부터 8명의 학생들과 첫 CPE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한 학생이 임종기도의 케이스(Case)를 준비해 와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 임종을 진행 중이고 또 가족들은 오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에게 ‘임종기도’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중에 나의 경험 속 한 환자와 가족들이 떠올랐다. S병원의 병원지도법사로 있을 당시였다. 도선사에 다닌다는 한 보살이 남편과 함께 병원법당을 찾았다. 남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해 동네 병원의사의 추천서를
전국비구니회CPE센터를 개원하고 드디어 CPE봄학기 기본과정을 들어갔다. 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을 비롯하여 비구니회 교육부 등 많은 스님들의 도움으로 첫 출발을 시작한 것이다. 둘째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스님들의 CASE STUDY 등 적극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한 스님께서 호스피스 환자를 만나고 온 사례를 가져오셨는데, 사례 속의 환자는 자신의 임종을 받아들이고 계신 분이었다. 나는 교육생들에게 “아무리 임종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도 모든 호스피스 환자가 자신의 임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는 설명을 하던 중 5년 전,
설날 합동차례를 지낸 후 떡과 과일 등을 포장해서 병동 간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작년과는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병실은 텅텅 비어서 어느 병동은 환자보다 간호사들이 더 많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작년 이맘때 만났던 환자가 생각났다. 어느 병실에서 한 환자가 나의 모습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이웃 종교의 신자인가 싶어 고개 인사를 하자, 환자는 “스님”하고 나를 불러세웠다. “아, 혹시 불자님이세요”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다가가자 반가움인지 모를 눈물을 떨구는 환자를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스님
“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년 만에 걸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나의 목소리 톤도 올라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황을 물었다. “매일 똑같죠. 목요일은 아내에게 갑니다.”거사는 아내를 보낸 지 어느새 3년이 되었다. 집 가까이 있는 납골당에 아내를 안치했다고 한다. 목요일마다 아내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 그 정성에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4년 전에는 아내와 함께 몇 번 만났었다. 아름다운 아내였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내는 30년 째 투석중이어서 물 한모금도 마음대로 먹을
“스님, 저 조금 더 살게 부처님께 기도 해주세요. 고비 넘기기 힘들어요. 욕심많은 중생, 고맙습니다. 스님 성불하세요.”노(老)거사의 문자를 보고 깜짝 놀라 전화를 드렸다. 거사는 반가워하며 방문하겠다는 내게 주소를 불러주셨다가 금방 다시 취소해 버리신다. “저 있는 곳까지 100리길입니다. 제가 살아나서 우리 스님 꼭 찾아뵙고 좋은 법문 잘 받겠습니다.”반가움과 미안함과 불안 등의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하는 노거사님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거사와의 인연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내가 입원하여 일반병실에서 중환
어느덧 올해도 달력 한 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정신없이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한 해를 보내게 되는 것 같다. 1.5단계에서 2단계로, 그리고 다시 2.5단계로 위험수위가 격상되면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이별의 고통은 이산가족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일산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있다가 지금 현재 다른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 임종의 여정에 다다른 동생 때문에 가슴 졸이는 한 거사가 법당을 찾았다. 그 곳 병원은 일산병원보다 출입의 제한이 훨씬 엄격하여 가족들이 전혀 병문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 어느 기자분이 “병원 일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어왔다. 순간 ‘아, 잊고 살고 있었구나.’하는 한 생각이 들며 소록도 작은 섬이 떠올라왔다. 강원과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처럼 세상 밖으로 막 첫걸음을 내딛던 시절이었다. 선방의 방부를 들이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다 만행을 계획하였다. 일 년만 봉사만행을 해보자 하고 찾은 곳이 ‘소록도’였다. ‘걷다가 손가락 한 마디 땅 위에 떨어지다.’ 한하운 시인의 싯구절을 읊조리며 봉사를 낭만으로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병동을 지정받고 봉사를 시작했는데, 서툰 나의 행동을
내가 사용하는 요령과 목탁은 호스피스에서 돌아가신 한 보살님의 사연을 담고 있다. 한 병실에서 불자님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반갑게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환자분이었다. “저도 불자입니다. 스님”하며 합장한다.나는 잠깐 ‘내가 불자 환자 명단을 잘못 보았나보다’하는 생각에 당황하며 “아 그래요? 불자인줄 몰랐습니다. 죄송해요”라고 합장하며 다가갔다. 불자님은 신심있게 다니던 사찰의 이야기를 하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잠시 얘기한 후 관세음보살 정근도 한 후 기도로써 마무리 하고 돌아왔다.다음날 다시 봉사자실에 들러 환자명단
재활병동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이 법당을 자주 찾는다. 보호자들은 재활을 받고 환자와 함께 법당에 들러 부처님을 뵙고 가기도 하고, 환자를 돌보다 지친 그 가족들은 부처님 품안에서 잠시 영혼을 쉬기도 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60대 후반의 거사님은 목숨은 건졌으나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의식은 있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들을 수 있기에 그의 아내는 더욱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눈물을 달고 살았다. 저녁 즈음 그의 아내가 법당을 찾았다. “스
두 달 전 인연이 된 원만행 보살님은 췌장암 말기와 백내장·녹내장 말기증세로 시력까지 잃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의식마저 있다 없다를 반복하는 위급한 상황이다. 두 달의 짧은 시간동안 보살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 보살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인자한 외모와 내면에서 풍겨져 나오는 진실된 신심과 겸손한 자세에 감동을 받았다. 따님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원 입구에서 1미터 간격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누었다. 첫 마디가 “스님 저는 절에서 30년 공양주를 살았습니다”였다. 부처님과 스님들을 시봉하며 살아온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