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 상관 없는 불교 위상선종 성·쇠 반복 결국 쇠퇴원대를 뒤엎고 새롭게 건립된 나라는 명나라로서, 명대의 태조는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던 이유로 인해서 한 때 절에서 사미로 지낸 적이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서 그는 불교의 내부 및 불교와 사회적인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원대한 포부와 현실적인 이상을 종교를 이용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명교(明敎)와 미륵의 구호를 내걸고 원나라를 반대하는 궐기를 통해서 승리를 했고, 끝내는 원나라
선·교·율 중 敎 우선북방은 조동중 남방은 임제종원나라는 중국내 소수 민족인 몽고족이 세운 나라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신봉했다. 때문에 많은 종교 가운데 라마교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반면에 중국불교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하지만 중국불교는 인구비례로 볼 때 여전히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원나라 초에 북방에서 중국불교인 선종(조동종)과 도교가 격렬한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이 논쟁은 한족불교도들과 도교의 신자들 간에 ‘노자화호(老子化胡)’를 중심에 놓고 발생한 논쟁이다. 선종 측
스승 밀운과 견해 달라자유분방한 선법체계 추구“선종 오가는 원상 각각의 일면”한월법장(漢月法藏ㆍ1573-1635)은 명대의 고승으로 자는 한월(漢月)이고 호는 우밀(于密)이며 만년에 천산(天山)으로 고쳤다. 속성은 소(蘇)씨이고 무석(無錫)인이다. 대대로 유학자 집안의 출신으로 소년시기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덕경원(德慶院)에서 출가를 했다. 19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불교에 대한 연구 및 선종의 어록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유교와 선학의 관계를 융합하는 것을 중시하기도 했다. 또 그는 29세 때 운서주굉(雲棲宏)으
화두 참구와 화두 염 결합화두 참구와 염불 결합해화(解話)와 화두 참구 결합소암덕보(笑岩德寶ㆍ1512-1581)는 명나라 중엽 선종에서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임제종의 선사이며,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수정하기도 했다. 소암덕보의 자는 월심(月心)이고, 호는 소암(笑岩)이다. 속성은 오 씨이며 금대(金台)사람이다. 그는 명문귀족[錦衣世家] 출신으로 일찍이 부친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공맹의 서적을 배우지 못했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失讀孔孟之書, 缺承父師之訓). 그는 ‘십지품’의 한 구절을 보고 홀연히 출가의 뜻을 가
원, 티베트불교 숭상 선종 쇄락화두참구 간화선으로 선종 부흥중봉명본(中峰明本ㆍ1263-1323) 혹은 천목중봉(天目中峰)선사는 원나라 때 승려이다. 속성은 손 씨이고, 호는 중봉(中峰)이며, 법호는 지각(智覺)이고 전단(지금의 항주)사람이다. 9세에 모친을 여의고 15세에 출가의 뜻을 세웠고, 후에 〈법화〉, 〈원각〉, 〈금강〉 등을 열심히 학습하기도 했으며, 아울러 선정을 좋아해서 자주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좌선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출가 전에 이미 불교수행을 할 기초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24세에 고봉원묘(高峰
북방 선종 대부분 쇄락남방 선종은 활력 회복고봉원묘(高峰原妙ㆍ1238~1295)는 원대 남방불교의 거두로서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선사로 〈선요〉를 지은 선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주장한 화두 참구는 대혜종고와는 조금은 다른 화두참구 방법을 주장하였다. 고봉원묘의 구법행각의 이력을 보면, 그는 북송시기의 대혜종고 이후의 간화선을 계승하였다. 그 후 간화선은 남송 이후의 선림의 주류 선학으로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고봉원묘의 선법은 바로 이러한 바탕을 배경으로 발전하여 왔다.원나라시기의 중국불교
천동여정과 조동종 양대 종장혜만 참방 한 달만에 철오송원 이후 선정쌍수 성행 만송행수(萬松行秀·1166-1246)선사의 속성은 채(蔡)씨이며, 현재 하남성 회경(懷慶)사람이다. 남송때의 청원 문하의 22대로서 조동종의 승려이다. 자는 보은(報恩)이며, 호는 만송노인(萬松老人)이다. 15세 때에 형주(邢州)정토사 찬윤선사(贊允禪師)에게 삭발 후에 출가하고 오래지 않아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원정 종원 원년(元定宗元年ㆍ일설에는 단평ㆍ1236) 연경(燕京ㆍ지금의 북경)에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81세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입적을 하자
삼교융합… 불교 생존의 문제문서·체계화한 첫 인물 중국불교에서 심성론은 중국 전통사상인 철학사상이 계합된 사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심성론은 중국 불교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송 때의 유명한 선사인 계숭선사는 심성론을 기초로 해서 삼교를 융합하였다. 삼교융합은 당시 불교의 생존과 발전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문에 계숭선사의 심성론 사상에 대한 이해는 곧 북송불교의 전면적인 이해와도 깊은 연관성이 존재한다. 계숭선사의 심성론 사상의 근원은 당연히 유불도(儒佛道) 삼가에 기초하고 있다.명교계숭의 중요한
오계·십선계로 유교5상 비교“理·行 불가분 관계”송대는 중국 전통문화가 전환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며, 동시에 인도불교가 중국화로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명교계숭(明敎契嵩ㆍ1007~1072 혹은 佛日契嵩)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북송 불교계에 많지 않은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많은 저서를 지었는데 핵심 의제는 바로 불교와 유교의 조화 및 회통 융합이다. 특히 불교 관점의 효도관은 불교사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유가의 효도관과 불교의 효도관을 비교 분석하고 회통한 새로운 시각의 작품이
선종은 중국불교 주류중국문화 전반에 영향송대의 사대부들은 당의 사대부들이 행하던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계승하고 확장 발전시킨 이들로서, 선종과 밀접한 교유를 유지하면서, 중국 선종사에서 선문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특히 송대 사대부들이 참선을 배우고 선승들과 교유하는 것은 당말 오대에 들어서 이미 하나의 풍조로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송대에 이르러서 전성기를 누렸다.선종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주류 종파로서 불교의 중국화에 역사적 임무를 철저하게 완성하면서 사상ㆍ언어ㆍ시가(詩歌)ㆍ예술(藝術) 등 각 방
선종의 전파 사대부 주도백거이 등 당대문인 선종 추종선종에서 추구하는 선오(禪悟)의 경계는 바로 본래 나와 자연과 합일 내지 현실과의 일체가 되는 경계를 추구하기도 하며, 동시에 자심(自心)의 본성을 개발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티브는 당시 문인이자 사대부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즉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며, 동시에 선종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나라 중엽(盛唐)으로 접어들면서 사대부 문인들은 보편적으로 불교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불교는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사유방
정중·보당·우두종 등 출현정중선은 무억·무념·막망보당선은 ‘무망’을 종으로 중국선종은 8~9세기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과 전파를 하면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종과 북종의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을 때 사천성 일대에서 정중(淨衆), 보당(保唐) 및 우두종 등 기타 유파가 출현하였다. 보당선(保唐禪)은 우두선이 한창 성행하고 있을 때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오조홍인의 문하 가운데 한 지류를 말한다. 보당선의 시조는 자주 덕순사 지선(資州 德純寺 智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창시자는 성도 보당사
홍인, 초기 선종 승단 초석 마련도신과 홍인의 선법 ‘동산법문’〈문수사리반야경〉 ‘일행삼매’의지〈능가경〉 오종관심 방편법문 기본 5조홍인(601-675)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산법문’의 가풍일 것이다. 즉 그는 도신이 건립한 도량을 재정비하는 한편 대중이 모여서 수행하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홍인은 7세에 출가를 해서 13살에 사미계를 받았고, 도신이 입적하자 바로 법석을 계승하고 도량을 건립 했다. 홍인이 지향한 동산법문은 적교오종(藉敎悟宗)과 교외별전(敎外別傳)등 점수돈오를 겸한 수행형태로 선종의 남돈(南頓), 북점(北漸)을
단체생활 등 수행풍토 수정〈능가경〉 위주 탈피 대승경전 수용선종의 사상적 체계와 틀 넓혀〈능가경〉 〈반야경〉의 합일염불과 성불·禪과 戒 합일5조 홍인과 ‘동산법문’ 완성 창시도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송고승전(續高僧傳)〉이고, 그 외도 〈정법보기(傳法寶記)〉,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 〈전등록(傳燈錄)〉 등에서 그에 관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4조 도신은 중국 선종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중국선종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하기도 한다. 농선병중(農禪?重)을 주장했고 두타행을 이
〈신심명〉, 깨달음의 정수 기록달마선의 기본사상 바탕으로여래장과 반야, 남방 현학 융화도교의 ‘자연회귀’까지 담아〈신심명(信心名)〉은 3조 승찬 대사의 저술로서 깨달음의 정수를 기록한 것이다. 〈신심명〉은 중국 초기 선종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승찬 개인의 업적으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심명〉의 내용은 전체적인 불교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도교의 자연회귀사상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우리들은 〈신심명〉을 통해서 3조 승찬의 선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신심명〉과 유사한 이름의
선종 핵심은 ‘명심견성 견성성불’달마선은 마음의 본성 깨치는 것인도선과는 현저히 다른 수행법달마선을 여래선 혹은 능가선이라고 칭하는데, 달마선이 중국에 전파되기 전인 북조시대까지는 여전히 많은 선승들이 신통을 사용했다. 제왕은 물론이거니와 일반백성도 이 신기한 이적에 매료 되어 갔다. 그러나 달마대사가 중국에 출현하면서 이러한 신비적 요소들이 많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은 곧 벽관안심(壁觀安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벽관선법은 안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며, 안심은 곧 반야실상과 불성(심성)사상을 결합한 선법체계로 자성불성을
중국 선종사에서 육조혜능선사(638-713)의 출현은 선종의 중국화 내지 탈 인도선법의 요인 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특히 혜능 스님의 출현은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 자리전환 혹은 위치전환의 분기점이라고도 한다. 또 〈능가경〉은 신수 계통의 선법과 연관을 짓고(점수-북종), 〈금강경〉은 혜능 계통의 선법과 연관을 짓는(돈오-남종) 분수령이 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혜능 스님 이후 선종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따라서 중국 선종이 선법의 우열을 논하는 표준을 삼을 때 크게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나누어서 분류를 한다. 그리고
각현·달마 양대 선법 형성북방서 다양한 방편의 선법 발달밀주(密呪) 결합된 비정통 선법 등장북방 선법 동쪽으로 이동 발달승조·현고·담무참·담요 이끌어 동한 말엽에 안세고가 전한 ‘안반선’과 ‘12문’등 소승선법, 지루가참이 전해준 ‘반야선’과 ‘수능엄삼매’등 대승삼매선법(염불선)은 중국불교사 및 선종사에서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당시의 정황으로 비교해 볼 때 안세고의 초기선법인 ‘안반선’은 상대적으로 시대를 주도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러한 선법들은 중국선법에 용해되어서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양진시대 이르러 선법수용구마라즙·각현 이후 선학 발전달마선 서서히 부각승조대사 이후 ‘격의불교’ 퇴각당나라 중엽 선종 비약적 발전200여 년 중국불교의 주류정토종과 선종 실참수행불교에서 선(禪)은 번뇌를 극복하고 지혜를 계발하고 세속의 모든 잡된 인연을 끊어 피안에 도달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불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시고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신 것도 역시 선정(禪定)을 통해서다. 따라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선(禪)법도 함께 전해져서 중국에서 특수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나라 때 규봉종밀 선사는 선정[三昧]은 불교도
염불삼매?역시?큰?공덕있어?????? 실상염불과?유심염불의?합일???? 혜가~혜능?모두?염불도?방편으로? 염불선법은?초창기?중국불교에서?매우?중요한?수행?방편?중에?하나였다.?특히?염불삼매는?대소승의?수행시기를?거치면서?중국에서?뿌리를?내리게?되었다.?또?각각의?시대를?지나면서?조금씩?변화하기?시작?했다.?이?염불삼매?수행법은?중국?초창기의?선종은?물론?이거니와?후대?선종에도?많은?영향을?주면서,?선종의?역사와?함께?지금도?면면히?이어져?오고?있다. 대승삼매는?염불로?인해서?定(삼매)에?들어갈?수?있다고?하는?것이?공통된?주장이다.(여기서?달마선법?내지?중국의?선종에서?주장하는?것과는?수행과정에서?약간의?차이점이?존재하는?것?같다)?당나라?때?도작(道綽)이?지은?〈안락집(安樂集)〉에?보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