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경16관변상도〉(속칭 극락도) 속의 모든 성자들은 연화대 위에 있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앉거나 서거나 모두 연꽃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이는 본 그림에만 해당하는 사실이 아니다. 지구상의 불교미술 전체를 통틀어 적용되는 핵심 특징이다. 만약 부처님이 연꽃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 위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사이비(似而非, 겉은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불교미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렇듯 연꽃은 불교에 필수불가결한 도상이다. 연꽃은 어디에 피는가? 본 그림 가운데의 아미타3존을 둘러싸며, 화면의 사면 외곽
불교에서는 불사음·불음주 등의 금욕적 계율을 기본으로 하고, 제상비상(諸相非相)의 공(空)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의 이상향 ‘극락’의 표현을 보면 이렇다. “금·은·유리·파려 등의 칠보 보배로 만들어진 나라, 연못 바닥 가득한 금모래, 황금으로 이루어진 땅….” 온갖 보배로 치장된 곳이자 화려함의 극치를 만난다. 〈아미타경〉에는 그나마 간략하게 서술되었고, 보다 세밀하고도 방대한 극락 묘사는 〈관무량수경〉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안팎이 투명한 유리로 된 땅을 상상하십시오. 그 땅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받치고 있습니다 알
‘투명 사라(紗羅)’, 이는 고려불화의 전매특허이다. 고려시대 수월관음은 사라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있다.(그림①, ②) 가늘고 윤기 나는 명주실로 짠 비단 베일을 ‘사라’라고 한다. 관음보살 그림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유행했던 불화 장르로 유명하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의 무수한 관음보살 그림, 그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특징이 바로 ‘투명 사라’이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흉내 낼 수 없었던 투명 사라. 이는 고려시대의 관음보살 그림에 공통하는 고려불화 유일무이의 요소이다.투명 사라는 요즘 유행하는
관음보살(또는 관세음보살)의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있다.(그림①) 보관은 ‘보배로운 관’을 말한다. 그리고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항상 ‘아미타불’이 있다. 고려시대 수월관음의 경우에도, 보관 한 가운데에 붉은 법의를 입고 있는 아미타 좌불을 발견할 수 있다.(그림②) ‘붉은 법의의 아미타 좌불(坐佛)’, 이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 45점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되는 특징이다. 꼭 붉은 색깔 법의에 좌불 형식이 아니더라도, ‘보관 속 아미타불’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관음보살상의 필수불가결 도상(圖像)이다. 아니, 보
지장보살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많은 보살 중, 유일하게 머리를 깎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을 밀어서 파스라니 두피가 드러난 삭발의 형상이다. 보통 보살의 조형은 화려하게 장엄된다. 특히 머리 장엄은 해당 보살의 역할 및 상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상이다. ‘보살’이라는 존격은 ‘세상을 장엄하는 아름다고 고결한 에너지’ 그 자체이기에, 그것을 보관과 장식, 그리고 의상으로 최대한 눈부시게 표현한다. ‘스님’ 모습의 지장보살, 어째서?그런데 지장보살은 삭발 머리에 단출한 차림새이다. 그래서 다양한 보살 형상 중
우리나라 〈지장보살도〉의 단독상 그림으로, 시대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 중 하나가 미국 땅에 있다. 미국의 스미소니언(Smithsonian)의 아시아 미술 박물관인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 of Art)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아시아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소장된 〈지장보살도〉는 고려시대 귀족불교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우아하고 고상한 풍모가 단연 최고의 품격이다.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Smithsonian Institution)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위치하고, 총 19개의 다양한 국립박물관을 총괄한다. 특히 스미
‘광명편조(光明遍照)!’ 이 말을 불자라면 무수하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표적 대승경전인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에 공통으로 계속 나오는 주요 용어. 이는 광명, 즉 ‘깨달음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진리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나의 안팎으로 이미 깨달음이 충만해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불성이 여여(如如)하게 충만한 것이 보이는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말이겠다. 티끌 속의 한량없는 불성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읽은 경전
‘온건히 깨달은 상태’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까? 탐진치(貪瞋癡)가 소멸되면 무엇이 남는가? 또는 어떤 상태가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는 마음’만 남는다. 주지하듯이, 이 ‘아는 마음’을 각성(覺性) 또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아는 마음은 아는 마음인데 반응하지 않는다. 무색무취의 이 희한한 마음은 부동(不動)이다. 온갖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으나, 온갖 사물과 분리되어 있다. 이것이 허공에 가득할 뿐이다. 깨알 같은 무수한 부처님들이렇게 ‘허공에 가득한 불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놀라운 고려불화가 있다. 바로 〈
“인간은 이 세상 애욕의 바다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가는 것이다.” 〈무량수경〉 ‘부처님의 권유와 경계’에는 부처님 눈에 비친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설해져 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저속하고 옹졸하여 하잘 것 없는 세상사에 골몰하고 시기하고 서로 다툰다. 죄악과 고통 속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생활에 허덕인다.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한결같이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애쓰고 있다.” 그래서 재물이 있으면 뺏길까 두렵고 닫힌 마음에, 또 재물이 없으면 궁색하고 불만의 마음에 안달한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부족하여, 가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보살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투명한 광배다. 물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가늘고 가는 금선묘의 문양. 그것이 고려불화 특징 중 최고 압권이지만, 이와 동시에 또 하나의 손꼽을 만한 특징은 투명한 요소의 표현이다.화려한 보관의 두 협시보살과 금빛 보상화문 넘실대는 가사를 입은 부처님.(그림1) 아미타 삼존의 장엄한 공덕을 완성시키는 화룡정점은 투명한 금테의 광배이다.(그림2) 마치 커다란 보름달 3개가 순차적으로 뜬 것처럼 교교(皎皎)하고 영롱하다. 일본 호도지(法道寺) 소장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내영도〉(그림
부처님이 내민 후덕한 손.(그림2) 죽음의 순간, 두려움에 떠는 중생에게 ‘두려워 말거라. 너 원대로 극락으로 가자’며 손바닥을 내보이고 계시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쥐어 극락세계를 설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계시고, 왼손은 ‘네 뜻대로’라는 의미의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계시다. 나를 향해 ‘내영(來迎, 맞이함)’한 모습이다. 손목까지 초록색 납의(衲衣)가 넘실대고, 옷 위에는 금빛 극락조가 물결치듯 날고 있다. 실제로 나투신 듯, 등신대 크기의 아미타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에 넋을 잃는다. 〈아미타 내영도〉 다양한
“내 손을 잡아라”라는 듯, 아미타부처님이 왼 손을 내밀고 계시다. 왼팔의 길이는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게 과장하였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네 뜻대로”라는 의미의 여원인(如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네 뜻대로, 네 원하는 대로, 극락왕생할 것이다!” 오른팔은 가슴 정도 높이로 접어 올려 손바닥을 보이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두려워 말라. 극락세계가 여기 있다”라며 그 세계를 설법하신다. 죽음의 순간, 꿈에도 그리던 아미타부처님이 맞이하러 오셨다! 그리고 극락의 풍경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다. 원만한 상호, 푸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한국 고려불화 〈원각경변상도〉는 〈원각경〉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그림1) 그림 한가운데에 노사나 부처님이 아름답게 장엄을 하고 설법인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무엇을 설법하는 것일까? 우선 부처님을 둘러앉은 청중을 보기로 하자. 노사나 부처님의 양옆으로는 문수보살(정면에서 보아우측)과 보현보살(정면에서 보아 좌측)이 협시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푸른 얼굴의 용맹스런 사자를 타고 있고, 보현보살은 하얀 색의 우직한 코끼리를 타고 있다. 문수와 보현의 밑으로는 각
고려불화 대논란! ‘卍字 방향’ 고려불화를 논할 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만자(卍字)의 방향’이다. 만자의 방향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에 따라서, “만자가 잘못 그려졌다”, “역(逆) 만자이다”, “거울에 비친 듯 뒤집혔다” 등 격렬한 토론이 오간다. 왜 이런 논란이 불거지는 걸까? 보시다시피 〈원각경변상도〉의 상단 한 가운데 장엄 문양(그림1)을 보면, 그 핵심에 ’만자‘가 있다. 만자에서는 ‘깨달음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것을 여섯 겹 빛깔의 둥근 광배로 표현했다. 이것을 ‘육색 광명’이라고 한다. ‘육색 광명’이란,
미국 보스턴 미술관(Boston Art Museum)에는 독특한 주제의 우리나라 고려시대 불화가 있다. 총 2점으로, 한 점은 지금 이 지면에 소개하는 〈원각경변상도〉(그림1)이고, 또 한 점은 〈치성광여래왕림도〉이다. 약 15년 전, 필자가 직접 조사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을 때, 당시 보스톤미술관 관장이 직접 유물창고에 들어가 이들 작품을 꺼내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해외 여타 박물관 또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 또는 〈지장보살도〉 등 흔히 보는 주제의 그림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특이한 주제의 특이한 도상의 작품은
지난 연재 〈오백나한도〉의 글에서, 화면 정중앙 삼존불 위에 눈에 띄게 위치한 스님이 ‘원효 대사’임을 논한 바 있다. 붉은 의자에 앉은 원효 대사를 중심으로 그를 보위하는 나한 여덟 명이 빙 둘러 있다. 따로 이 같은 무리의 단위로 구획을 형성하고 있어서 작품 속의 원효 대사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효 대사만큼이나 또 눈에 뜨이게 별도의 구획으로 그려진 스님이 두 분 더 계시다고 지난 연재에 언급한 바 있다. 잠시 지난 연재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원효) 대사의 모습이 고려불화,
오백나한 물결치는 파노라마 〈오백나한도〉를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산세 풍경은 무수한 나한들로 해체되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나면, 제 각각 개성 넘치는 나한들은 배경으로 융해되어 버린다. 산봉우리가 나한이고 나한이 산봉우리다. 고려불화 〈오백나한도〉는 길이 2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 독특한 구도와 기상천외한 형식으로 이름 높다.중국 남송 시대에 대유행한 나한신앙은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서 두루 유행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만, 오백나한을 한 폭에 모두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또 구도적 측면에서,
멀리서 보면 한 폭의 산수화다.(그림1) 병풍처럼 두른 산봉우리와 기암괴석 속에 석가삼존이 앉아계신다. 그림 윗부분의 울뚝불뚝한 봉우리들은 아래까지 그러한 산세를 이어가서 전체로 둘러있다. 아! 그런데 봉우리의 능선들이 꿈틀 꿈틀 움직인다.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멀리서 봉우리와 계곡으로 보였던 것이 다름 아닌 무수한 나한님들의 무리였다.(그림2) 나한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석가삼존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다. 무한 군중으로 그려진 나한들은, 물방울이 모여 파도치듯 그렇게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절묘
파도치는 기쁨, 법계의 풍경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며 푸른 연꽃 위에 아미타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낸다.(그림1) 그 몸체에서는 상서로운 빛이 발산된다. 다가가 세부 문양을 들여다보니, 700년이 넘도록, 금빛 반짝이는 문양은 여전히 너무나도 생생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고려불화의 비밀은 ‘디테일’에 있다. 그 세부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찬란하고 화려한 마이크로 세계가 펼쳐진다. 아미타부처님이 두른 붉은 납의(衲衣, 가사 또는 대의)에는 동그란 원 문양이 가득하다. 원의 지름은 약 5cm. 이렇게 작은 원 안에 소우주
Interbeing의 세상세상에서 가장 긴 영어 단어로 ‘Floccinauci nihilipilification’라는 용어가 있다. 그 뜻은 ‘뜬구름처럼 여기기’. 발음을 표기하자면 ‘플럭시-너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이다. 이렇게 긴 단어가 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뜻 또한 놀랍다. 특히, 재물을 뜬 구름처럼 여긴다는 것이지만, 나아가 세상의 것 무엇이든 무상(無常)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는 틱낫한 스님은 그의 설법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하늘의 구름이 흩어지는 것’에 자주 비유하셨다. “마치 사라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