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야? 윤회관을 인정한다는 말이야 부정한다는 말이야?심 작가였다. 그가 정말 헷갈린다는 듯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어금니를 씹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윤회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늬? 난타의 업장이 만들어낸 무늬? 그 무늬가 오늘의 이석원을 만들었다?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씹어 뱉었다.-뒤쪽 선반 위를 봐. 거기 바랑이 있을 테니.돌아서서 올려다보자 선반이 머리 위에 있었다. 약병 나부랭이와 헝겊들…. 거기 바랑 하나가
-어느 날 한 사문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부처님은 있다고 했는데 왜 없다고 했을까? 그 소리야.심 작가를 놀리듯이 알겠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알겠는가?-무엇을?심 작가가 되받았다.-이와 같다. 부처님은 영혼이 없다고 했고 나는 있다고 한다. 어쩔 테냐?나는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인가?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저 언덕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쩔 테냐? 그 문제를 풀어야 내 본래면목을 볼 수 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내 심중을 읽은 듯이 입
-국가 보조 말이 쉽지요. 세월이 세월이라 그 옛날보다야 사람 사는 곳이 되었지요. 의학도 많이 발전했고요. 그러나 아직입니다. 달나라 별나라 가는 세상이지만 한센병은 잡기가 어려운 병이라오. 예방과 관리가 첫째인데 정부 관리 놈들 어디 이곳에 한 번이라도 와 봤어야지요. 그 사람들이 환자들입니까. 그 사람들 이곳 사정 몰라요. 아무리 구명해 달라고 울며 매달려도 소용없어요. 그저 사무적일 뿐이지요.그렇다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원시적인 형태의 어쩌고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걸 나는 억지로 참았다. 인도는 단일 국
내가 묻자 오오스마 기자는 정말 못 믿을 정도로 생기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밤새 생각하다 보니 그 생각이 났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가봅시다. 가보면 그 어떤 해답이라도 나오겠지요.오오스마 기자가 힘차게 말했다.마을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나는 의외로 사건이 쉽게 풀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어디를 어떻게 헤맨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나환자촌이라니. 우선 느낌부터가 좋지 않았다. 일이 풀려가도 참 더럽게 풀려간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저절로 머리가 내저어졌다.차가 너무 덜컹거려 나는 창 쪽으
-아마 우리는 전생에도 부부였을 거예요. 일주 씨가 그리는 그림 속에 저를 넣어 주세요.-그렇구나. 너를 그리기 위해 내가 이 길로 들어섰구나.-내생에 우리는 우리가 그린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그래. 우리들의 사랑이 영원하다면….대학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마저도 그림쟁이에게는 시집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내 품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림을 그리면 그녀의 얼굴이 그림 속에 떠올랐다. 그것을 칼로 찢었다. 찢고 또 찢었다. 그러나 그녀의 잔영은 지울 길이 없었다. 절로 절로 떠돌았다. 그리고 내
봄이면 라일락 향기가 자우룩했을 큰 라일락 나뭇가지가 방 앞까지 늘어진 곳에서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열었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간 스님이 벽장 속에서 책을 꺼내는 것 같았다.-이 책입니다. 제가 간직해 둔 겁니다.네 사람의 시선이 책으로 쏟아졌다. 경전이 아니었다. 사무엘 다커스의 불의 제전이었다. 소설이었다. 드륵하고 책갈피를 넘겼다. 책 중간쯤 종이쪽지 하나가 끼워진 것이 보였다. 종이쪽지를 집어 보다가 멈칫했다. A4용지 몇 장을 네 겹으로 접은 것이었다.-뭡니까?오오스마 기자라고 생각하며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모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그림쟁이 오빠가 시오레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안 것은 술집 생활을 시작한 지 꽤 지나서였다. 오빠가 처음 우리에게 접근했을 때 한국에서 들어온 여행객인 줄 알았다. 여행비가 떨어져 떠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오레 언니가 빚이 있어 쫓기고 있었는데 그 빚을 오빠가 갚아 주었다. 이 바닥을 잡은 오빠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배운 선무도로 세 명을 때려눕히고 시오레를 구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보기에는 비실거려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모르겠소.-모르겠다? 정말이오?이상하게 여인이 미워져 내가 심통 사납게 물고 늘어졌다.여인도 심기가 상했는지 벌컥했다.아 가보면 알 것 아니오? 그년 여기 살 때 그럽디다. 집을 빼려고 하는데 나가질 않는다고. 누가 이런 썩어빠질 놈의 집구석에 들어오려고 해야지. 몇 달 머물 여행객이나 들여야 하는데. 문제는 그놈이야. 어느 날 이상한 사람들을 잔뜩 끌고 나타나서는 난리를 피우더니 그 길로 가고선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요. 누군가 그러는데 가꿈이라던가? 거기 있는 트라트웬인가 하는 사원에서 보았다고 합디다.-그가 누굽니까? 그를 보
-맞네!원주 스님이 적어 준 주소는 뉴델리역 부근이었다. 번지까지 정확히 적혀 있었다.-정말 그를 만날 수 있을까?역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서야 심 작가가 오오스마 기자에게 물었다.-왜 기대되는가?심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봐. 어째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무서운 건 자네의 환상일세.-환상이라니?-그에게는 그만큼 절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그래? 자네 혹시 이석원인가 뭔가 하는 자가 난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예사롭지는 않아.-허허 정말 사람 미쳐가는 거 시간문제라니까. 왜 이러나? 정신 차려. 그 사
그럼 망가진 만다라를 손볼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그가 보고는 그냥은 쓰지 못하겠으니 틀은 그대로 쓰고 비단을 다시 입혀 그려야 하겠다고 하드라오. 그래 실력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했더니 기가 막히더라오. 그날로 그에게 새 만다라를 맡겼다고 하오. 그와 똑같은 만다라를 그려 달라고 했던 거요.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리고 그는 홀로 그 속에서 만다라만 그렸는데 내가 갔을 땐 이미 그 한국 젊은이는 없었소.-그럼 젊은이가 가져갔다는 말인가요?심 작가가 물었다.-그건 모르겠소. 그와 똑같은 만다라를 그려달라고 해 금줄이 쳐진 그 속에서 젊
-이상한 것은 그해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는 거요. 내가 불교도이다 보니 그 친척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후손이 없었소. 정부가 그곳을 장악했고 그 후는 모르겠소. 일 년 후인가 그리스도의 지팡이라며 공개되었으니 보디 아이슈 무쿠암이 잊힐 수밖에.-그럼 보디 아이슈 무쿠암의 성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기신 칼이 맞군요?확인하는 듯한 내 물음이 너무 컸던지 늙은이가 꿈틀 놀라는 것 같았다.-처음에는 두 무쿠암의 성물이 예수의 지팡이라는 추측이 있었소. 하지만 무엇보다 이 땅에 불교가 먼저 들어왔고 나중에 예수가
그가 가리켜준 대로 이 골목 저 골목을 한참 헤매 돌았다. 전형적인 인도풍으로 지어진 집들 사이로 판자촌이 나타났다. 아무리 계급층이 두꺼운 나라라고 하지만 좀 전의 풍경에 비하면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으리으리한 집 저쪽과는 달리 골목길이 좁았다. 마주 오는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좁아지는가 하면 어느새 우마가 지나다닐 만큼 넓어지고는 했다.왈리 슈트라 쉼라가 사는 집은 어지러운 거리 구석 자리에 안쓰럽게 처박히듯 끼어 있었다. 판잣집은 아니었다. 흙으로 벽을 세워 필시 나무껍질이지 싶은 재료로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본
심 작가의 말에 내가 웃었다. 오오스마 기자와 심 작가를 안 지 꽤 되었어도 이런 말을 나누어보지 않았는데 그만큼 가까워진 것인지도 몰랐다.-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이 문제를 지혜나 어리석음으로 풀어 버리는 보살이….-그가 누군가요?심 작가가 사심 없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바로 뇌천(雷天)보살이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지혜(明)와 어리석음(無明)이 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고 하더군요.-어렵네요.-어렵지요.-어리석음의 본성은 곧 지혜요, 이 지혜를 지혜로써 집착하지 않을
그러자 그의 제자들은 무상사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어 교단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쟈타삿투왕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자신이 믿었던 왕에게 외면당하자 그는 다시 무상사를 시해하려다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때 그가 떨어진 지옥의 갱도가 그 탑 주위에 있다고 했다.-그렇다면 어서 가봐야 하겠군요.송 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그러시구려. 여기까지 와 그것을 보지 못하면 안 되지. 어서 가보시구려.-아이고, 너무 감사합니다.-감사할 게 뭐 있겠소. 어서 가보시구려.그때 저 만큼서 ‘아버지’ 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청년이
-멀리 가지 마.물고기처럼 헤엄쳐 나가는 그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갑자기 싸아한 냉기가 전신을 엄습했다.-나 잡아봐요.그녀가 영화 속의 여배우처럼 웃으며 소리쳤다.헤엄에 자신이 없던 나는 추운 아이처럼 팔짱을 끼며 소리쳤다.-멀리 가지 말라니까!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출렁거리고 있는 것은 부표인가 그녀인가?갑자기 그녀가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왜 그래?내가 소리쳤다.그녀가 계속 허우적거렸다.-왜 그래? 장난치지 마!-살려줘요.그녀가 소리쳤다.그제야 누군가 물속에서 그녀를 당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번쩍 눈을 떴다. 나는 사방을 둘러
차는 잘도 달렸다. 오오스마 기자의 핸드폰이 드디어 터졌다. 말이 없던 오오스마 기자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왜 그렇게 전화가 안 돼?분명히 심 작가였다.-아무리 인도가 인터넷 강국이라고 하더라도 스리나가르 골짝까지야 핸드폰이 터질 리가 있나 이 사람아.-지금 어디야?-뉴델리로 돌아가는 중이야.-그쪽 일은 어떻게 됐어?-몰라.-왜?-암튼.-왜 무슨 일이 있는 거야?-이상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어. 갑자기 예수의 지팡이가 등장하는 바람에.-예수의 지팡이?-무쿠암 석관 속의 검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검이 아니고 예수의 지팡이라는
시종들이 달려들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술을 들이부었다. 스님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자 여왕은 스님을 농락하려 하였다. 하지만 스님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자 여왕은 스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그럴 수는 없소이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소.-사랑하는 사람?되뇌던 여왕이 허공으로 얼굴을 쳐들고 까르르 웃었다.-아니 사문이 여자를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냐?-아내요. 아내와 자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소. 내가 깨달음을 얻어 돌아가야 하오.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니 놔 주시오.
식사나 하자며 다섯이 인근 식당을 찾았다. 허름한 간이음식점이었다. 차와 자빠디를 시켜 먹으며 좀 전에 오오스마 기자와 나누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렉스와 말을 나누게 되었다. 먼저 알렉스에게 입을 연 것은 오오스마 기자였다. 그도 나와 나누던 말을 곱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이곳이 이슬람 문화권이긴 한데 그보다 먼저 불교 문화권이라는 것은 모르시지는 않으셨을 텐데…?오오스마 기자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맞습니다. 알고 있어서 더 이상했습니다. 이곳으로 와보니 이곳
그렇게 말하고 오오스마 기자가 관리인을 향해 다가갔다.그들은 잠시 무슨 말인가를 나누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던 관리인이 앞장서서 어디인가로 갔다. 그들이 모퉁이로 사라지고 한 십여 분 되었을까.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한 사내와 함께 오오스마 기자가 나타났다. 키가 작은 사내는 이제 오십이나 되었을까? 오오스마 기자의 신문사 편집장 형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허리춤에 찬 열쇠로 문을 땄다. 푸른색의 나무문이었는데 자파티처럼 넓적한 쇠 장식 열쇠였다.문이 열리자 오오스마 기자가 우리를 불렀다. 한걸음에 다가갔는데 키가 작은 사내는 이미 안
취재차 와봤던 곳이라고 하더니 기사가 아니었으면 고생깨나 했을 길이었다. 기사가 주민청을 금방 찾았다.지저분한 거리의 길 끝에 낡은 블록 건물이었는데 오오스마 기자가 안으로 들어간 사이 셋은 길가에서 팔고 있는 차로 더위를 식혔다. 무슨 차인 줄도 몰랐다. 그저 시원하다기에 시켰는데 별로 차지도 않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다.삼십여 분을 기다렸을까. 주민청에서 나온 오오스마 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혼자가 아닌데요?송 서화가가 바라보며 말했다.-누구죠?송 서화가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가까이 다가온 낯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