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달은 분이다. 우리도 깨치면 생사 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누구든지 깨칠 수 있다. 선(禪)은 본래성불을 말한다.그런데, 이 깨달음에 대하여 너무나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여 불교의 정체성에 혼란이 적지 않다. 예수교야 하나님을 믿으면 그만이지만, 불교는 믿음에서 나아가 깨달음으로 가야 한다. 불교의 근본은 깨달음으로 생사 윤회를 해탈함이다. 믿음을 넘어선 깨달음, 그 깨달음이 불교만의 특색이다.근래에 우뚝한 선지식들이 하나둘 가시면서 불교의 정견 자체를 비방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말이 있다. 큰 도에는 문이 없다. 무슨 뜻일까? 대도무문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를 알고 선(禪)의 지혜가 열리는 것이니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 대도무문에 대하여 알아보자.김영삼 대통령의 대도무문 일화흔히 ‘YS’라 불리운 김영삼 대통령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아 붓글씨도 자주 썼다. 그는 교회 장로로 널리 알려졌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가 선어(禪語)인 대도무문을 즐겨 썼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은 김영삼 대통령은 과연 대도무문의 뜻을 바르
불자라면 누구나 ‘삼매(三昧)’란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삼매란 무엇일까? 불자가 아니더라도 삼매란 말은 친숙하다. ‘독서 삼매’, ‘게임 삼매’ 같이 무엇인가 몰두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삼매인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이 삼매에 대하여 바른 안목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삼매는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자라면 삼매에 대하여 바른 공부를 하여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도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삼매를 체험하면 지혜롭고 평화로운 삼매의 마음을 계발
▶ 한줄 요약선(禪)에서는 깨달음을 단박 깨침, 돈오(頓悟)라 한다. 다른 말로는 직지(直指),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란 누구인가? 깨어난 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중도, 팔정도, 사성제, 무아를 깨달았다.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가? 부처님은 누구나 깨달음의 성품인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으니 마음을 닦아 깨치면 부처가 되어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를 누린다고 하셨다.부처님의 설법을 모아놓은 팔만대장경에서, 초기경전에 근거한 남방 상좌부 불교와 대승 교학에서는 일
앞에서 우리는 좌선이란 마음이 안과 밖으로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는 것이라 했다. 그럼 왜 좌선을 하는가? 부처님처럼 밖의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도 어지럽지 않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의 고난에도 늙음과 병의 괴로움에도 죽음의 공포에도 평상심으로 여여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좌선이고 참선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일러 마음을 깨쳐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 하셨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 덕분에 물질적인 풍요는 날로 좋아졌으나 빈부와 갑을, 남녀와 노소 양변의 대립과 갈등은 점점 늘고
▶ 한줄 요약참선의 방법 중 하나인 좌선은 앉은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질을 향한 끝없는 집착과 갈망을 비워 본래 갖춰진 마음을 밝히는 것이 참선이고 좌선이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앉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며, 좌선만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참선하면 좌선(坐禪)이 떠오른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고요한 산사나 선방에서 가부좌하고 마음 공부하는 것을 참선이라 말한다.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하면 좌선을 생각하기 쉽다. 실제 사찰의 대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화제를 모은 배구 국가대표 리더 김연경 선수는 ‘기독교는 성경, 불교는 불경, 배구는 김연경’이라는 슬로건으로 자존감을 드러내었다.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경(佛經)에 담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려는 불제자라면 누구나 불경을 공부하고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그런데, 불교에서 부처님 말씀이 아닌 그 제자의 말을 모아 경(經)이라 붙인 경전이 딱 하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종의 종전(宗典) 〈육조단경(六祖壇經, 이하 단경)〉이다.〈육조단경〉은 선
6조 혜능, 화두 원형을 제시하다5조가 〈금강경〉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 행자 혜능은 확철대오한다. 5조는 혜능에게 달마대사의 주어 6조로 부촉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은둔하라 한다. 6조는 고향 광주로 간다.다음 날 오조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방앗간 오랑캐 행자가 5조의 가사와 발우를 몰래 훔쳐 남쪽으로 도망갔다고 엉뚱한 소문이 났다. 대중은 행자에게 5조의 발우를 찾아오자며 수백 명이 쫓아왔다. 이리하여 혜능이 영남의 큰 고개인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다른 대중은 다 돌아가고 오직 혜명스님 만이 끝까지 따라와 잡히게 된다.
인도의 달마대사가 머나먼 동쪽으로 와서 마음을 바로 깨치는 선법을 전한 지 100여 년이 지나 4조 도신대사 대에 안정적인 선 도량이 마련되었고, 곧 5조가 나왔다. 5조 홍인은 홀어머니 밑에서 살다가 도신대사를 만나 마음을 깨치고 달마대사의 가사를 물려받아 5조가 되었다.동산으로 가서 바로 부처되는 법문을 설하다홍인(601~675) 대사는 스승이 있는 서쪽 쌍봉산에서 동쪽으로 옮겨가서 도량을 여니 이것이 저 유명한 전설이 된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시작이다. 4조 대에 이미 신라 법랑 스님을 비롯하여 500여 명이 넘는 구도자들이
인도의 부처님 이후 28대 달마 조사가 동쪽으로 와서 초조(初祖)가 되어 본래성불의 선법을 혜가대사에게 전하고, 2조는 다시 불치병의 거사가 깨치자 출가시켜 3조로 삼아 선의 씨앗이 동토에 뿌려지고 있었다.하지만, 초조 달마의 독살(毒殺), 2조 혜가의 장살(杖殺)에서 보듯이 선은 아직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에서 혼란기를 거치며 수나라(581~618)의 통일, 그리고 당나라로 바뀌며 점차 안정되어 갔다. 불교계는 경전을 읽고 외우고 설법하는 교학과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 행하는 율종, 그리고 부처님
달마와 2조 혜가대사 문답과 도(道)선종의 2조 혜가(慧可, 487~593) 대사는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고 소림사에서 9년 동안이나 달마대사를 모셨다. 지금도 중국 숭산 소림사에는 달마와 혜가 대사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선풍보다는 달마대사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한 체조가 더 성하다.소림사 주변에는 무술학교가 수십 개나 되고 전 세계에서 온 청소년 수만 명이 소림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 지금 소림사에는 선의 안목을 갖춘 눈 밝은 선지식이 없다. 중국 불교가 스스로 선종의 탄생지라 자부할지는 몰
부처님이 깨치고 첫 설법을 할 때 꼰단냐를 비롯 다섯 수행자가 모두 깨달아 인가받은 기록은 〈초전법륜경〉과 〈무아상경〉에 나온다. 이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친 이들이 수없이 나왔는데, 부처님은 그중에서도 마하가섭을 당신의 수제자로 삼았다.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이후 그 말씀을 결집할 때 좌장 역할로 그 소임을 다하고 아난존자에게 그 법을 부촉한다. 이 전법의 기록은 초기경전에도 나오고 남방과 북방 불교에서도 공히 인정하는 전등 법맥이다.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1천 년이 되는 무렵에 27대 제자 반야다라 존자가 있었다. 반야다라
코로나19 대유행과 지구 이상 기후로 세계 인류가 극심하게 병과 죽음의 고통을 받는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를 바로 알아 마하 지혜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대자유로 속히 건너가야 한다.불교 ‘무아 공’과 힌두교 ‘아트만’의 핵심은 앞에서 강조하였듯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다’이다. ‘나’라는 오온(五蘊)이 모두 연기, 무아이니 공하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이다.그런데 부처님 당시 브라만(지금의 힌두)교에서는 ‘나’를 아트만(我, tman)이라 하여 우주를 주재
마하 반야, 큰 지혜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건너 영원한 행복을 누린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반야심경〉은 큰 지혜의 핵심을 말한다. 중도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고 말한다. 참 어려운 말이다. 많은 불자들이 이 구절에서 막힌다. 물질과 공이 다르지 않다. 물질이 어떻게 공인가?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불교의 지혜에 눈을 뜨니 어렵더라도 이해할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물질(色)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 만물을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아 생사윤회를 해탈하시고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셨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의 마음을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로 말씀하신다. ‘금강반야’란 우리 마음이 다이아몬드 같이 밝고 단단한 지혜로 온갖 분별망상을 벼락같이 부셔버리는 것이다. 이 다이아몬드 금강 지혜를 〈반야심경〉에서는 ‘마하반야’라 하는데, 바로 큰 지혜다. 큰 지혜로 생사고해를 건너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핵심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이 〈반야심경〉의 반야 지혜가 바로 禪이다.〈반야심경〉이란 무엇인가?〈반야심경〉은 〈
산 중에 산이 금강산이고, 경전 중의 경전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이다.이 무주(無住)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中道)이다. 앞서 우리는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중도를 깨달았노라 한 ‘중도대선언’을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이 첫 설법에서 말씀하신 중도가 바로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이다.우리 마음이 ‘나-너’ ‘있다-없다’ ‘선-악’ 등의 양변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지(止, 사마타)라 하고, 그 머무름 없는 마음에서 관(
보시·봉사서 진정 발현이 시대의 철학자 김용옥 선생은 〈금강경 강해〉라는 저서에서 〈금강경〉과 선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책에 ‘서문’을 쓴 법정 스님은 〈금강경〉을 선종의 소의경전이라 하며 도올을 거사라 상찬한다. 알고 보면 이런 아이러니도 드물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불교의 정견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금강경〉 공부를 계속해 보자.〈금강경〉의 깨달음과 한국불교의 깨달음 논쟁〈금강경〉 2분에서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이렇게 묻는다.“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부처님 말씀을 모아 놓은 경전은 다 귀중하다. 좋고 나쁜 경전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불자들이 가장 많이 공부하고 독송하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심지어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에서도 소의경전으로 삼았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도 〈금강경〉이다.〈금강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금강(金剛)’은 인도말 ‘바즈라’를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벼락’ 또는 ‘금강석’을 말한다. 벼락 같이 번뇌망상을 부숴버린다. 또는 금강석 같이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보석 중의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상징한다. 반야는 ‘프라즈나(prajna)
중도 연기에서 초기·대승·선 하나로 회통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방대한 경전이 있다. 기독교는 성경, 회교는 코란, 그리고 유교는 사서삼경으로 간단하나, 불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전이 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불교의 방대한 경전은 다양하고 풍부한 가르침의 장점이 있으나, 너무 방대하여 초심자들이 불교 공부에 혼란이 없지 않다. 이런 까닭에 선에서는 말을 끊고 문자를 떠나 바로 마음을 보라 한다.하지만, 초심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너무나 많은 경전이 있고, 또 부처님 제자들의 논소와 어록까지 있으니 어느 경전과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