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앙! 쪼꼬미야, 미안해. 오빠가 정말 미안해!” 찬솔이는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다리를 버둥거리고, 팔을 휘저어 가슴을 쳐도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내가 너를 먹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녁 식사에 닭볶음탕이 올라왔을 때 찬솔이는 냉큼 닭다리를 가져다가 맛있게 뜯어먹었다. 엄마가 남은 닭다리를 아빠 밥그릇에 올려놓자 은솔이 누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찬솔이를 흘겨봤다. “왜? 지난번엔 엄마랑 누나가 먹었으니까 이번엔 아빠랑 내 차례라고.” 닭은 왜 다리가 두 개밖에 없는 걸까. 네 개라면 좋을 텐데. 닭 요리를 먹을 때마다 누나와 찬솔이가 다리를 서로 먹겠다고 싸우자 엄마가 규칙을 정했다. 이번에 엄마와 누나가 먹으면 다음엔 아빠
찬솔이는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화장실에 앉은 지 20분이나 지났는데도 똥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것이 사흘 전이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눈 똥이었는데, 토끼 똥처럼 작고 동글동글한 똥 세 개가 퐁퐁퐁 떨어지고는 끝이었다. 배를 누르고 쥐어짜면서 힘겹게 눈 똥이 겨우 세 톨이라니 정말 실망스러웠다. 찬솔이는 두 손을 겹쳐서 꾹꾹 누르며 시계방향으로 배를 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똥을 눠야 했다. 오늘은 과학실험이 있는 날이고, 운 좋게도 희주랑 같은 조가 됐다. 희주 옆에 앉아서 지독한 방귀를 뀌어댈 수는 없었다. 변비의 가장 심한 고통은 방귀였다. 배가 빵빵해지는 느낌이라든지, 똥을 누고 나서도 똥이 마려운 것 같은 잔변감이라든지, 움직일 때마다 배가 콕콕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청량했다.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2천 원짜리 김밥에 콜라를 마시면 딱 좋을 날씨였다. 공원에는 점심 식사를 마친 회사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이런 날은 벌이가 좋았다. 회사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색깔부터 달랐다. 은성이는 레퍼토리를 바꿨다. 최백호에서 비틀스로. 심수봉에서 저스틴 비버로. 은성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빠르게 읽어낼 수 있는 예리한 눈을 가졌다. 손뼉을 치는 회사원들 사이로 경찰 아저씨가 걸어왔다. 은성이는 먹구름처럼 덮쳐오는 불길함을 떨쳐버리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이 시간에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냐? 어른들은 어디 계셔?” “저는 AG밴드 멤버예요. 어쿠스틱 기타 밴드죠. 오늘은 공원에서 버스킹이
지희네 집에서는 늘 달콤한 냄새가 났다. 파스텔 빛깔의 솜사탕 같은 냄새. 지희의 생일파티 준비를 하느라 집안은 어수선했다. 언니와 오빠는 풍선을 불고, 엄마는 세모 모양 펠트로 가랜드를 만들고 있었다. “어이, 막내딸. 와서 이것 좀 봐봐.” 지희 아빠가 벽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빗물이 스며들어 누렇게 얼룩진 지희의 방을 핑크색 방수페인트로 칠하고, 벽이 너무 휑하다며 아빠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빠를 제외한 모두가 말렸지만. “이거 뭐 같아?” 빨간색의 찌그러진 동그라미 아래에 실처럼 늘어진 초록. 무얼까. 풍선? 지수는 다른 식구들의 표정을 살폈다. 절대 알아맞히지 못할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풍선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풍선처럼 보이니까. “글쎄요……. 꽃……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도 지희 시계에 관심 없어요.” 가영이 말에 교실이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휴대폰이나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하며 종례가 길어지는 것에 불평을 쏟아놓았다. 선생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지희를 봤다. 아이들은 가방과 사물함을 열어 각자의 소지품을 꺼내놓았고, 지희가 잃어버린 시계는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교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학원 버스에 타야 했다. 가영이 말이 맞았다. 시간도 잘 맞지 않는 오래된 태엽 시계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최신형 스마트 워치였다. 티머니도 안 되고 음악도 들을 수 없는 시계를 훔쳐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아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선생님 제가 다시 잘 찾
커다란 똥이 떨어졌다. 똥은 맑은 공기를 가르며 풀밭 위에 철퍼덕 내려앉았다. 정말 굉장한 똥이었다. 쇠똥구리 동동이는 머리를 한껏 치켜들고 더듬이를 흔들었다. 바삭바삭 마른 풀 냄새와 달콤한 이슬 냄새가 났다. 아주 맛좋은 쇠똥이란 걸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님!” 동동이가 소의 발굽을 똑똑 두드렸다. “으응, 쇠똥구리로구나.” 소는 되새김질하며 눈으로는 겅중거리고 뛰어노는 송아지를 쫓고 있었다. “제가 소님의 똥을 좀 가져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렴. 이제 그 똥은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똥을 가져다가 무얼 하려고 그러니?” “쇠똥 경단을 빚을 거예요.” “쇠똥 경단을 빚어 무얼 하려고?” “먹을 거예요. 쇠똥 경단은 아주 맛있거든요.” 소가 큰 눈을 껌벅였다.
할머니에게 조약돌을 받은 후부터 민준이는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서운 괴물에게 인사를 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민준이는 온갖 무서운 이야기들을 조약돌에게 속삭였다. 꿈속까지 쫓아와서 민준이를 괴롭혔던 수많은 괴물들은 점점 작아졌다. 모양도 색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면 돌 속으로 쏙 들어갔다. 조약돌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온몸이 나른해지며 스르륵 눈을 감고 잠드는 것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민준이는 여전히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책 속의 세계를 마음껏 상상했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화장실에 괴물 사는 거 아니?” “거짓말!” 민준이는 누나에게 말려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나는 민준이를 놀리는 걸 좋아했다. 지난번엔 냉장고 괴물 얘기를 해서 민준이는 한 달 동안이나 혼자서 냉장고를 열지 못했다. 그릇 사이에 숨어있던 괴물이 손을 덥석 물어버릴 것 같았다. 엄마가 냉장고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서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고 나서야 민준이는 안심할 수 있었다. “밤에 화장실에서 꾸륵꾸륵 소리가 나는 건 괴물이 변기 물통 속의 물을 마시기 때문이래.” “본 적 있어?” “화장실 괴물은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 “역시 거짓말이구나.” 민준이는 더는 듣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누나는 괴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누나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던지면 민준이는 거기에
분식점 앞에서 잿빛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진성 스님이 이긴 모양이었다. 등교할 때는 절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지만, 하교 때에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진성 스님이나 양 처사님이 마중을 나왔다. 예전에는 나오기 귀찮아 순번을 정했는데, 요새는 서로 나오려고 다투곤 했다. 목적은 학교 앞 분식점. 해당화 보살님이 오신 후로 두 분 다 적성에 맞지 않게 소식을 하시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허기를 분식점 핫도그나 떡볶이로 채웠다. 스님 옆에는 나무젓가락 네 개와 먹지 않고 발라놓은 소시지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석주는 소시지 한 개를 집어 먹고, 나머지를 꼬리를 흔들고 있는 분식집 강아지에게 던져 주었다. 핫도그 네 개를 드셨으니 이제 하나만 더 드시면 되겠다. 차에 오르려는데 누군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혹시 찬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린다면 이와 같은 소리가 아닐까. 석주는 옥구슬처럼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해당화 보살님은 목소리가 예뻤다. 목소리만 예쁜 게 아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예뻤고,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의 단정하게 깎은 손톱도 예뻤다. 외모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마음씨도 곱고 예뻤다. 김치 하나를 썰어도 예쁘게 썰었고, 접시에 음식을 담을 때도 예쁘게 담았다. 상을 차려놓고 보면 색색의 음식들이 꽃으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웠다. 단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식의 맛이었다. 밥은 늘 되거나 질었고, 나물에서는 비린내가 났고, 조림은 시고, 국은 달았다. 맛이 없다기보다는 이상했다. 석주가 13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먹어본 적 없
*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바람처럼 이리로 저리로 쓸려 다녔다. 시간도 공간도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과거의 어느 곳에 머물렀다가 낯선 곳, 낯선 존재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쉴 곳이 없었다. 무수한 빛과 색채의 세상. 때로는 강렬하고 투명한 빛이 두려워 도망치고, 때로는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빛에 이끌렸다. “무상아!” 시구 스님께로 달려갔다. 스님은 종종 내 이름을 불렀다. 스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나를 쫓는 무리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들, 잿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나를 두렵게 하고, 욕망하게 하며, 분노하게 하는 무리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스님은 너럭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반쯤 감은 눈빛이 고요했다. “네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재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몸이 하도 무겁고 괴로워서 밥도 먹지 않고 일찌감치 눈을 붙였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초저녁이었다. 타고 남은 햇빛이 하늘 가장자리를 붉게 물들이고, 검푸른 하늘에 조각달이 걸렸다. 복슬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두부 쪼가리라도 들어있는지 밥그릇에 아주 코를 박고 있다. 웬일인지 내 밥그릇은 텅 비어 있다.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물그릇 위로 달그림자만 어른거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아랫동네 검둥이가 와서 내 밥을 다 먹어버렸나. 고개를 한껏 쳐들고 공양주 보살님이 계신 요사채를 향해 컹컹 짖었다. 공양주 보살님은 신기하게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 배가 고프다고 짖으면 밥을 주고, 목마르다고 짖으면 물을 채워주었다. 낯선 사람이 왔다고 으르렁거리면 쿠사리가 한 됫
“엄마 나 교정기 빼면 안 될까?” “응, 안 돼.”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봐라. 눈 딱 감고 2년 보내고 나서 얼마나 예뻐졌니? 교정기 처음 끼고 그렇게 아픈 것도 참았는데 이제 와서 빼면 아깝잖아.” “난 그냥 안 예쁜 것보다 불편한 게 더 싫어.” “엄마처럼 평생 주걱턱으로 살래?” 엄마는 튀어나온 아래턱을 과장해서 앞으로 쭉 뺀 후에 위아래로 딱딱딱 이를 부딪쳤다. 엄마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을 줄 알았지만, 예린이는 말이라도 꺼내보고 싶었다. 교정기를 빼려면 앞으로 1년은 더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이 예린이에게는 10년도 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면대 앞에서 이를 살펴봤다. 역시나 고춧가루가 붙어 있었다. 위에 두 개, 아래에 한 개. 밥을 먹고 물
“음식이 맛이 없니? 왜 안 가져다 먹어?” 아영이는 세 번째 접시를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야채 쪼가리가 놓여있는 접시를 포크로 휘저으며 앉아 있었다. “스테이크는 안 나오니?” “아, 미안해. 뷔페만 먹어야겠다. 아빠가 바빠서 먼저 계산하고 가셨는데, 스테이크 주문하는 걸 깜박하신 것 같아. 아빠 배가 내일 출항이라서 정신이 없으셨거든.” “그래? 이번엔 어디로 가시니?” “으응, 러시아. 대구를 잡을 거래. 러시아 대구는 엄청나게 크대. 내 키 만한 대구도 아주 흔하대. 돌아오실 때 러시아에서 마트료시카 인형을 사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기대돼.” 아빠 얘기를 하는데도 아이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대구라는 물고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추위에 대해서, 마트료시카 인형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정민이를 빙 둘러쌌다. “빗자루를 가져왔니? “거기에 빗자루 같은 건 없었어.” 아이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빗자루가 묶여 있는 걸 내가 분명히 봤어. 지난 설날에 아빠랑 성묘 가다가 봤다고.” 재민이가 말했다. “빗자루가 없는 게 당연하지 않아? 내가 갔을 땐 이미 밤이었고, 빗자루는 도깨비로 변신한 후였으니까.” “그럼 도깨비를 봤다는 거야?” 윤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보기만 한 줄 아니? 이야기도 했지.” 아이들은 일제히 재민이를 봤다. 눈빛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허풍이야. 호, 혼자서 거, 거, 거길 다녀왔을 리 없잖아.”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는 재민이의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럴 줄 알고 증
엄마는 오전에 일하러 나가서 밤 11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쓰던 브라운관이 볼록한 텔레비전이 정민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정민이는 몇 개 되지 않는 채널을 돌리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잠이 들곤 했다. 무당집에 갈지 말지, 정민이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주희 말대로 아이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에 빛나는 겁쟁이들이니까. 도깨비 같은 것이 정말 있을까.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도깨비가 있을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정민이는 문방구 아저씨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문방구 아저씨는 가게 문을 닫으려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형광등 빛을 받은 아저씨의 민머리가 반짝 빛났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머리는 어딘지 이상
이제 이 마을에서 내 편은 한 명도 없다.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유일한 사람, 담임선생님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입술은 예전처럼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 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겠니?” “저는 그냥 윤호가 태권도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발차기를 하다가 실수로 얼굴을 찬 거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때리려고 했다면 왜 교실에서 그랬겠어요. 안 그래? 송윤호?” 눈이 마주치자 윤호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코피가 멎지 않은 모양이었다. 콧속을 틀어막은 솜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윤호 티셔츠에도 교실 바닥에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후회는 언제나 뒤
멈췄던 것 같은 시간이 다시 흘러가. 아빠는 회사에 나가고, 엄마는 새로운 일감을 맡았어. 이번에는 밥솥을 디자인한대. 엄마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엄마는 지나치게 수수하니까. 옷 하나를 사도 남자애들이나 입을 것 같은 옷을 사 오지. 할머니는 뭐든 잘 만들었어. 엄마가 사온 밋밋한 셔츠도 할머니 손길이 닿으면 아주 멋지게 변신했어. 친구들은 늘 내 머리 모양이나 옷을 부러워하곤 했지. 나는 2학년이 되었어.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어. 아이들은 예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모든 것이 낯설어. 시간이 거꾸로 흘렀으면 좋겠어. 다시 1학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가을이 되면 떠났던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일주일이 지나면 큰고모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일곱 날이 지났어. 할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돌아와서 엄마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어. 아빠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와 나를 보살폈지. 아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할머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거야. 집안에는 물에 젖은 솜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어디를 가도 무겁고 축축해. 큰고모 스님(어른들이 이제 큰고모에게 고모라고 하면 안 된대. 행화 스님이라고 해야 한 대.)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고 있어. 목탁 소리에 맞춰 작은고모는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를 내. 작은고모는 절을 올리다가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어. “아이고, 엄마.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난 못 살아. 엄마
아빠는 가구 공장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따뜻한 나라에서 이곳으로 일하러 왔는데, 연수 기간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병에 걸린 아버지와 보살펴야 할 동생들이 많았다. 엄마는 사람들을 늘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의 큰 눈망울이 좋았다고 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크고 넓적한 앞니를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다문 채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아빠는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노래를 배워서 엄마에게 불러줬다. 엄마는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난다며 자꾸만 아빠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진호를 낳고 엄마는 엄마의 나라로 떠나야 했다. 다시 돌아와 아빠와 결혼하고 이곳에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