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한동안 우리추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서로의 적적한 모습을 들여다보는 오늘아! 하는 소리가 가슴 곳곳을 찌른다그렇게 별 것도 아닌 것을이제야 알 듯 말 듯너는 너, 나는 나일 수밖에 없어도바람 불면 한 번 쯤나는 너를, 너는 나를 짚어본다칼바람 사이사이더운 일면을 스치운다〈끝〉
무정과 유정삶에 어려움이 찾아들 듯밤하늘에도 올 것이 온다곳곳이 추운 저녁말없이 빛을 내는 작은 우주지나간 날처럼, 스쳐간 인연처럼끝내 알 수 없는 거리에서마음을 적시는 너는무정인가 유정인가
어쩔 수 없는 시간 덜어내고 내려놓는 시간눈앞에 설법은 넘친다바람결에 나무들이 흩어지고법당의 단청도 한 겹 벗는다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그 속에 어쩔 수 없는 것들오늘, 또 한 번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뒷모습나의 뒷모습은 나의 것이 아니다등에 손이 닿지 않듯이내 뒷모습에 나는 손을 댈 수 없다뒷모습에 적힌 나의 지난날을나는 읽을 수도 고칠 수도 없어나의 뒤에는 ‘너’가 있음이다온갖 것들이 가을에 물든 이 시간나의 뒷모습은 어떤 빛깔일까뒷모습을 볼 수 없어우리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길은 하나 길마다 낙엽이다낙엽을 따라 걷다가나도 낙엽이 된다이제 길은 하나걸을 수 있는 길은 하나낙엽이 되는 길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낙엽이 되는 길흩날리다 흩날리다어딘가에 쌓이는 길바람 따라 가을이 되는 길
오늘문 밖은 울긋불긋중생은 또 오늘을 산다울긋불긋한 삶을붉은 나뭇잎 한 장 한 장에바람은 불어잊을 수 없는 오늘이여지나간 날들 생각에가슴은 무거워쉽지 않은 오늘이여
나한전에서나와 닮은 얼굴 하나쯤 있다고 해서그 얼굴 하나 찾아갔던 적이 있다그 눈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분명하던지그 눈과 눈 사이를 겨우겨우 걸었다그 눈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깊고 깊던지하루하루 겨우겨우 사는 나는 힘들었다나와 닮은 얼굴 하나, 어림도 없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오늘이 다 가기 전에무엇을 해야 할까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는 것도바람에 실려 오는 풍경소리도숲에서 만나는 선사의 마지막 법문도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모든 것들의 마지막은 늘 ‘오늘’이었음을오늘이 다 가기 전에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처님 손바닥석가모니부처님도 보고비로자나부처님도 보고문수, 보현, 관음도 보고돌아가는 길보고 온 것이 부처가 맞고 보살이 맞는지새들은 숲에 있고먼 하늘엔 구름이 간다손행자여아직도 여기 있는가?
오래된 질문달빛이 무거워지는밤은 이제 뒤척이는 자의 몫뒤척인다는 건오늘이 아직 남았다는 것다시 오래 된 질문들이작은 폐부를 가득 채운다몸을 고쳐 누울 때마다나는? 삶은? 내일은? 그 다음은?구름이 달을 덮고길은 돌아갈 수 없는 길
바람 앞에서바람이바람이 아닐 때가 있다무심히 지나가는 그 바람에문득 가슴도 아파삶은 하염없이 스러진다겨우 향 한 자루 피워놓고돌아오는 길그렇게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담장(어려운 일) 어려운 일이다오늘이 시작됐다는 것도누군가와 마주한다는 것도어쩌다 올려다보는 구름은어쩌다 마주치는 꽃 한 송이는어려운 일이다그렇게바라본다는 것은살고 있다는 뜻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다시 내리는 저녁 앞에 선다는 것은어려운 일이다매일 담장 앞에 서는 일이다
상념(想念)절 마당을 지날 때마다한 편에 쌓인 기와들은남의 일 같지 않다조용히 적힌 이름들이이유 없이 다가와 머문다어쩌다 홀로 하는 식사처럼적적한 그림자와 마주한다어느 날은 어머니가어느 날은 아버지가어느 날은 멀어진 친구의 이름이그 그림자를 지난다
유월 산중산새의 지저귐만 듣고 살면언젠가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까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 쯤새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개울의 물소리만 듣고 살면너의 마음속을 물처럼 흘러갈 수 있을까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 쯤너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꽃만 보고 살면눈에서, 손과 발에서 향기가 날까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 쯤꽃처럼 한 빛깔로 살 수 있을까
목어와 나비와 나5월은 어떻게 가고있나담장마다 붉은 장미는 피고새나 사람이나 하루는 짧고동쪽은 동쪽대로 서쪽은 서쪽대로만나야 할 것들잊어야 할 것들숲의 나무였던 木魚와잠이 삶이었던 나비와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기억할 수 없는 시절이 5월은 또 그렇게 가고 있다
4월하고 초파일비 내린 자리엔 올 것들이 다시 오고바람 분 자리엔 다시 흔들리는 것들새는 날아서 오늘을 기억하고나무는 짙어서 내일로 간다그렇게 숲은 여법하고 여법한데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하나 만나는 일이 어렵고부처로 태어나 부처 되는 일이 제일 어려우니4월하고 초파일곳곳에 연등이 걸린다
범종소리아쉬운 하루가 저문다억겁 끝에서 또 한 번하늘은 깊어가고지나간 일들은 이마를 맴돈다아쉽고 또 아쉬운 봄날범종소리나 들었으면쇳덩이 되어 남고 종소리 되어 떠났으면범종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나 때문일 걸 알게 된 저녁나뭇가지엔 꽃들이 돋고먼 하늘엔 흰 달이 보인다
만사여의(萬事如意)전생의 기억을 잃어짧은 숨 한 줌마다수없이 나는 많고언제 불어올지 모르는바람과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나 사이에작은 법당이 하나타오르는 향이 하나유정이 무정에 끌리는오늘이 하나
어느 길에서산꼭대기 작은 암자 들러절 세 번에 많이도 바라고하산은 부끄러워길 끝서마주친 나무 한 그루 뒤엔그리운 것들아쉬운 것들미안한 것들그래서 가슴을 흔드는 것들발등의 불을 끄듯걸어온 길들이여다시 길 끝서 그 길을
부고(訃告)산에 오르니산은 사라지고몰랐던 한 소식우두커니 바라보니그 대목이 뜨겁다각자 그렇게…뜨겁지 않은 삶이 어디 있을까기억 하나에 밤은 깊고그 이름 하나에 길은 또 멀어졌다한 소식 위에‘삶’이라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