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종교 인구가 줄고 있고, 출가자 또한 감소하고 있는 현실이다. 1600여년 한국불교사에 찬란한 고려불교도 있지만, 조선 500년 통한의 불교사는 매우 심각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 그 무엇이 불교를 존속되게 한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반만년 동안, 지구상에 불교가 존속함은 지극한 수행자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 르네상스 시대 참수행자의 면모를 남긴 몇 명의 선사를 만나 보자. 남악산에 나잔(懶殘)이라는 선사가 살았다. 이 선사는 누더기를 걸치고 노쇠해서 비틀비틀 걷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나잔은 북종선 3세에
법안종 개산조 문익의 행적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이 개산한 법안종은 선종 5가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성립된 선종이다. 늦게 성립되었지만 앞의 4가를 아우르는 측면이 있어 선종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동시에 중국 선종이 완성되었다.법안은 절강성(浙江省) 여항(餘杭) 출신으로 7세에 출가하였다. 월주(越州)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아육왕사의 희각율사 문하에서 율을 익히고 유학 등을 배우며 교학에 몰두했다.법안은 복주의 장경 혜릉을 참문하고도 수행에 진전이 없었다. 어느 해 법안은 도반들과 함께 행각하는 와중,
운문 선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보름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오늘부터 보름 이후의 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구를 하나씩 지어 오너라.”제자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시구를 지으려고 했으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운문은 제자들에게 짧은 구절 하나를 써 보였다.“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무엇이 좋은 날이라는 뜻인가? 선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지만, 삶과 관련해보자. 바로 매일 매일이 최상·최고의 날이며, 매일 매일이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하루이다. 그 ‘날(日)’이라고 하지만, 시시각각 그 순간의 자각이 중요하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용어가 있을 만큼 서양도 양성평등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더더욱 낮은 편이다. 근자에 우리나라 공직자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고위직 공무원에 여성이 한명도 없는 경우가 있으며, 그나마 법조계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여성 비율이 겨우 두 자리 수를 넘었다.그러면 불교계는 어떠한가? 부처님 당시에는 여성(출재가 모두)들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동등하게 인정받았으나 부파불교로 접어들면서 비구니를 포함한 여성들의 하열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승불교로 접어들어 일승(一乘) 차원에서
#어머님께“… 제가 부모님 곁을 떠난 이후, 수행 길로 접어든지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머님께서는 마음을 가다듬어 도를 닦는데 뜻을 두고, 공(空)에 귀의함으로써 이별의 정을 품지 마십시오. 어머니, 문가에 기대어 저를 기다리지도 마십시오.… 재가인들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효도를 행함으로써 천심(天心)에 합하지만, 승려는 불가에 있으면서 도를 사모하고 선을 참구함이니, 정진으로서 어머니 은덕에 보답할 것입니다.” #아들 스님께 “나는 너와 어느 전생의 옛적부터 인연이 있다가 비로소 어미와 아들로 맺어졌다.
임제의 행적과 기연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는 밥을 먹어야 하고, 정신적으로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 정신의 충족이란 무엇으로 주식을 삼는 걸까? 필자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역사 이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어느 나라나 투쟁과 혁명이 있었다.물론 자유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찾고자 한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번뇌로부터 벗어난 해탈, 정신적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를 선어(禪語)로 멋지게 개념화한 선사가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이다. 임제는 관념적인 전통이나 사상적 권위, 형식과 타성의 굴레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인간 해방을
중국선의 르네상스는 당나라 시대에 형성된 선종의 분파인 5가이다. 물론 5가 이전부터 선이 발달하기 시작했지만, 5가가 형성됨으로서 중국선이 완성됨이요, 조사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5가 가운데 가장 먼저 흥기한 종파가 위앙종(쓳仰宗)이다. 법맥은 혜능-회양-마조-백장-황벽-위산-앙산이다. 스승 위산과 제자 앙산의 선사상을 말하는데, 위산의 ‘위(쓳)’자와 앙산의 ‘앙(仰)’자를 따서 ‘위앙종’이라고 한다.위산 영우 선사는 위산 영우(山靈祐, 771~853)는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장계(長谿) 출신으로, 속성은 조 씨다
앞선 연재서 백낙천(白居易, 772~846)을 언급했었다. 낙천은 당대(唐代) 문장가로 젊을 때는 선을 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정토를 신봉했다. 이처럼 낙천과 비슷한 시대에 재가불자 중에는 선과 시 모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많았다. 곧 두보·이하·왕유 등인데, 이들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많은 선시를 남겼다.당시(唐詩)는 중국문학사상 최고 수준이요, 문학사에서 찬사를 받는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평론가인 위치우위(余秋雨, 1946~)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중국에서 그의 서적 해적판이 넘쳐날 정도이고, 우리나라에도 그의 책이 몇 권
닭 우는 축시(丑時)가난한 마을인지라, 절 꼬락서니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님께 마지 공양은 그만두고, 아침 죽 끓일 쌀알조차 없으니 창문 틈새마다 수북이 앉은 먼지나 바라볼 밖에…반갑지 않은 참새만 짹짹대고, 친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혼자 앉아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누가 말했던가! 출가자는 애증(愛憎)을 끊는 거라고…생각할수록 눈물이 나 손수건을 적신다. 해가 높이 뜬 사시(巳時)머리 깎고,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어쩌다 청을 받아 들여, 시골구석 중이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 처량한 신세에 죽을 지경이다.키다리
어느 승려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스님, 평상심이 무엇입니까?”“졸리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 것이다.”“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더우면 시원한 것을 먹고, 추우면 불을 쬐는 것이다.”- 〈전등록〉 ‘남전장’평상심(平常心). 많이 들어봄직한 단어이고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이 〈무문관〉19칙에도 전한다. 조주(778~897)가 스승 남전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이에 남전은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이다”라고 답한다. ‘평상심시도’는 중국선의 르네상스 시대(조사선)의 캐치프레이즈나 다름없는
황제는 얼굴 가린 채, 그녀를 구하지 못하여머리 돌려 피눈물을 비 오듯 흘리네.황제의 마음은 자나 깨나 귀비를 그리는 정으로 가득 찼네.행궁에서 달을 보니 절절이 마음이 아려오고밤비 속에 들려오는 말방울 소리 황제의 애간장을 끊게 하네.연꽃은 귀비의 얼굴 같고 버들은 그녀의 눈썹 같았으니이들을 바라봄에 어찌 눈물 흘리지 않으리.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피고,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면, 그리움 더욱 사무치네.위의 시는 백낙천(白樂天, 772~846)이 쓴 ‘장한가(長恨歌)’의 일부분이다. ‘장한가’는 806년에 지은 12
선(禪)은 당나라 때, 최고로 번성했다. 당시에 최고의 선지식과 수행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선지식인 마조도일·석두희천·경산법흠·남양혜충은 서로를 격려하는 도반이었고, 서로서로 제자를 보내어 지도하였다. 즉, 자신과 인연이 맞지 않는다면 다른 선사에게 제자를 보내어 지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번에는 마조와 석두 문하를 오고가며, 공부한 괴짜배기 선사들을 소개한다.마조·석두 문하 오가며 수행은봉,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단하소불’ 공안 유명한 천연집착·관념 자유로웠던 선지식거꾸로 열반 등은봉 선사 등은봉鄧隱峯은 ‘등鄧’
몇 년 전 조계종 종단쇄신위원회에서 이 시대에 맞는 ‘승가 청규’를 발표하였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당시 청규를 제정한 어른들께서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고 했지만, 공포되어 공식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청규(淸規)라는 율장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선종 승려들의 수행 패턴에 맞게 제정된 것으로, 당나라 때 백장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다. 청규를 최초로 제정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는 어떤 인물인가? 백장은 ‘왕(王)’ 씨며, 복건성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백장의 휘호는 회해(懷海), 서산혜조(西山慧照)를
우리나라 최초의 선(禪) 전래자는 7세기 신라 진덕왕대(647~653 재위) 법랑(法郞)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법랑이 중국으로 건너가 4조 도신(580~651)의 법을 이어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선이 크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은 신라 말 고려 초에 해당한다. 이때 아홉 산에 산문(山門)이 개산되었다고 하여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홉 산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법손이다.즉, 마조의 수제자 가운데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은
‘무소유’ 담장 선사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BC 5세기 중반 활동)는 목이 말라 물을 먹기 위해 동냥 그릇을 들고 강으로 갔다. 그가 강둑에 다다랐을 무렵, 개 한 마리가 그의 옆을 스쳐 달려가더니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실컷 물을 마시고 즐겁게 목욕까지 하였다.디오게네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개는 나보다 더 자유롭구나. 개는 동냥그릇조차 갖고 다니지 않는군. 개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我)는 이 그릇을 도둑맞을까봐 몸에 안고 다녔다. 한밤중에도 그릇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걱정되어 잠을 깬 적도 있었
부처님 재세 당시, 우바리·니티 등 천민 출신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고, 수많은 여인들도 정각을 이루었다. 곧 깨달음 앞에 남녀노소가 있을 수 없고, 출·재가자의 구별이 없다. 이 점을 크게 발전시킨 이들이 대승불교를 일으킨 보살들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이 수십생 동안 보살로서 수행(因)을 통해 부처가 되었듯이(果) 대승불교 보살들도 누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유입된 이래 재가자의 신행활동이 일반화되었으며, 역대로 깨달은 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근현대 중국에서 불교가 나락에 떨어진
당나라 때, 마조 선사는 개법을 한 뒤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어느 해 마조는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어릴 적 살던 고향인 사천성 시방현(四川省 什方縣)을 방문했다.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일하고 있던 할머니가 선사를 보고 외쳤다.“어,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출가해 나이 들어서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 예수도 성인이 된 후, 고향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당한 곤욕이 있어 제자들에게 ‘성인이 되어서는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고
선(禪)과 관련된 주제를 원고 작성할 때면 늘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머릿 속을 맴돈다. 구한말 금강산 마하연 아래 목욕탕이 있었다. 이 목욕탕의 주인은 불심이 돈독한 불자로서 스님들이 오면, 목욕비를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주인장! 고맙소이다. 육신을 깨끗하게 목욕하니, 기분이 좋습니다.”주인이 그 말을 듣고,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육신은 깨끗하게 목욕했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시겠습니까?”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돌아
佛性, 그 위대한 언어“간디 씨, 나(불가촉천민)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회의석상에서 암베드카르(Ambedkar, 1891~1956)가 인디라 간디에게 던진 말이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Caste)제도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그는 1948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최초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암베드카르가 겪은 간디는 ‘마하트마’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그냥 ‘간디 씨’였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쟌(신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진정한 천민을 위한 성자는 아니었던 듯 하다.(간디는 바이샤 계급) 신분 문제만
우두종 2세 윤주 지암은“중생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 세계에 머물지 아니하고, 중생의 고픔을 없애기 위해 유위(有爲)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유마경〉 ‘보살행품’타종교와 달리 스님들은 성직자가 아닌 수행자라는 타이틀을 걸머진다. 즉 출가하면서부터 타인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발원이 아닌 자신의 생사해탈을 위해 출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어 이 사바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최고 지향점으로 한다. 곧 ‘회신멸지(灰身滅智, 깨달은 성자는 당연히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열반론이다.하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