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에게서 배운 것들 “입은 닫고, 귀는 열고, 마음은 깨어 있으라” 일주일에 하루는 수행의 날로 틱낫한 스님은 일주일 중에 하루를 온전히 ‘마음챙김의 날’로 정해서 그날 하루만큼은 하루의 주인이 될 것을 권한다. 생활이 아무리 절박해도 한 주에 하루를 수행의 날로 정해서 석 달 만 정진하면 삶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화는 가르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세포는 100일이면 바뀐다고 한다. 우리가 심기일전을 바랄 때 백일기도를 하는 데,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아침에 잠을 깨면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고요하고 길게 쉬는 숨에 의식을 모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편안하게 모든 동작을 마음챙김과 함께 해보았다. 소리 없이 고요하게
종교는 사랑의 실천 복과 지혜 함께 닦아야 여법한 삶, 가정에서 시작 법정스님에게서 배우다 불교에 입문해서 경전 이외에 처음 접한 책이 법정 스님의 글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종교의 본질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알기 쉽게 말씀해주셔서 신행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스님의 종교에 대한 정의가 평소 실천이 없는 행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고 생각해온 나의 신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깨달음이 무엇인
“세닢으로 집, 천냥으로 이웃 산다” 장경호 삶 읽고 ‘포교’ 다시생각 작은 공덕 실천이 ‘부처’로 가는 길 나의 이웃들 옛 말에 ‘세 닢 주고 집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한꺼번에 양말을 열 켤레쯤 사서 아파트 경비아저씨, 택배를 오시는 분, 우체부 아저씨 등 우리 집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있다. 하루는 동네 구둣가게에서 구두를 닦는데 구둣가게 아저씨가 구두를 닦아주며 한 걱정 했다. “해마다 전세금이 올라가서 걱정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살림이 좀처럼 나나지지 않는 게 서민의 삶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아저씨 우리 집 양반이 키가 좀 작으세요. 아저씨와 얼추 같을 것 같은데 옷하고 구두를 좀 드리면 받으시겠어요?” 그
“스님·포교사만 포교사 아니다” “주변에 가르침 실천도 큰 수행”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 위당 정인보 선생님의 따님이신 정양완 교수님이 지어준 우리 집 당호가 ‘안심료(安心寮)’이다.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 집을 찾는 이들에게 편안한 의지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현관 정면에 현판을 달아놓았더니, 세탁소, 퀵서비스, 가전제품을 수리하시는 분들도 집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절인 줄 알고 저절로 합장을 하곤 한다. 좋은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 공부를 하다 보니 집이 절처럼 장엄된 것 같다. 법당이자 편안한 수행처와 같은 곳이 안심료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 집은 불자들의 모델하우스로 꼽히게 되었다. 나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밖에서 칭찬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이 인정해주는 칭
‘내가 주인공’ 긍정적 삶 필요 “부모가 잘해야 자식도 잘해” 지금 여기, 현재에만 파스칼은 “병도 환영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유방암 초기에 수술을 받고 요즘 방사선치료를 받고 있다. 인생의 파도타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사람은 파도타기 속에서 성장해나가지 않는가. 파도가 격렬하게 출렁이며 지나가면 수면이 고요해지듯이 삶에서도 거친 파도가 칠수록 내면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생을 축제처럼, 순례처럼 여기며 살기를 기원한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선에 흔들림이 없으면 된다. 나는 ‘덥다’ 소리, ‘춥다’ 소리를 잘 안한다. 상처에 적당한 약을 써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나는 그때마다 내가 조금 더 성장하는구나, 업을 소멸시키는구나 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그것을
만델라, 감옥에서도 “감사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 늘 말조심 “미안하다”보다는 “감사하다”는 말을… 수필가 이경희 선생님을 만나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좀 늦었다. 그가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하자 이경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보다 시원한 곳에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시더니 헤어질 때쯤 “아까 그렇게 미안한 일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고 다시 한 번 일깨워주셨다.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진심을 담아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초를 선물로 드렸더니 “남편이 좋아하겠다.”고 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 그분은 외출할 때 얼마 전 돌아가신 부군께 이렇게 인사를
친구 모친 보며 어머니상 그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어머니의 마음이 불성임을 알려준 두 분 나의 은사님이 “당신은 신사임당과 같은 어머니야.”라고 하시면서 훌륭한 어머니가 되라고 격려해주셨다면, 나의 오랜 친구 은선의 어머니는 내가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하신 분이다. 은선이는 지금 이대 작곡과 교수로 있는 초등학교 동창인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 혜화동에 있는 그녀의 집에 가끔 놀러 가면 그녀의 어머니가 찻상을 직접 들고 오셔서는 무릎을 꿇은 채 딸의 친구들에게 차를 손수 따라주셨다. 성치 않은 우리 딸을 찾아주어 고맙다는 마음을 그렇게 드러내셨던 것 같다. 언제 가도 한 결같이 조용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당신 딸의 친구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돌아가신 아버지 평소 가르침들 살면 살수록 그 진가 알게 돼 나를 귀한 사람으로 키워주신 아버지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결혼시키고 부모를 여의는 과정을 통해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소매 끝에 답이 있다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난 부처님이니,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을 받은 분은 나의 아버지와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다.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 은사님의 존재는 삶의 부적처럼 든든하고 은혜롭다. 누군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라고 대답하겠다. 아버지는 성품이 소탈하고 너그러우시며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별 탈
아이들 정성껏 키우다 보니 나도 함께 바르게 살게 돼 좀 더 일찍 불교를 만나 출가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하는데, 아무래도 금생에는 두 아들을 생산하려고 세상에 오지 않았나 싶을 때가 있다. 종진 스님께서〈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라는 책을 선물로 주시던 날, 나는 그 책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저는 아이들이 키운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아이들은 나를 좋은 어머니,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좋은 업, 좋은 인연으로 만났고, 심성이 좋은 그 아이들은 나의 삶을 빛나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인연인가. 회사에 다니면서 영업 파트에 속해있던 남편은 직책상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고, 또 술을 즐겨하는 편이기도 해서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 손에 꼽을 정
살림하면서도 ‘공부’ 할 수 있어 남편의 ‘과음’ 싫기만 했는데 ‘지난날’ 알고 나니 큰마음 생겨 나는 김장 김치 하나를 담아도 한겨울에 먹을 감치와 초봄에 먹을 김치를 따로 담아 항아리에 이름을 붙이고 간장, 된장, 고추장을 일일이 담을 정도로 나 나름대로는 살림에 정성을 쏟는 편이다. 그러나 그런 정성들이 단순히 일로만 그치고 말았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살림이 명상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고, 돈벌이로 생각하면 ‘돈벌이’일 수도 있는 것이고, 노동으로 생각하면 ‘노동’일 수도 있다. 수행을 통해 ‘나’라는 본성을 보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 일들을 하는 동안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살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은사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세상 바르게 사는 씨앗 돼 여성성을 일깨워준 은사님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당신은 신사임당이에요.” 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로, 아내로 몸과 마음가짐을 현숙하게 가지도록 해주신 분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오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진정한 도인으로 남아있으며,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분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사랑이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아있을 만큼 선생님은 내 인생에 깊게 새겨져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면, “내 마음 속에 귀히 여겨 간직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자애요(慈) / 둘째는 검약(儉) / 셋째는 남을 앞서려하지 않는 마음입니다.(不敢爲天下先) / 자애 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고, 검약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으며, 남을
참회기도 통해 타인 존중하는 배려심 배워 “난 천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어머니의 사랑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사랑만큼은 원 없이 받으며 컸고, 시집을 와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가끔 스님이나 도반들을 시봉할 때면 어머니에게 빚진 사랑을 되돌려 갚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유모와 침모를 다 데리고 시집을 오실 만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성정이 순진하시고 고전적인 미인이었던 데다가 음식 솜씨가 뛰어났다. 우리들 교육은 아버지께서 전담하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어머니는 그야말로 현모양처였다. 신혼 때는 친정어머니가 같이 시집왔단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몸이 약하고 일도 잘 못하는 딸을 대신해 친정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