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포교사만 포교사 아니다”
“주변에 가르침 실천도 큰 수행”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
위당 정인보 선생님의 따님이신 정양완 교수님이 지어준 우리 집 당호가 ‘안심료(安心寮)’이다.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 집을 찾는 이들에게 편안한 의지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현관 정면에 현판을 달아놓았더니, 세탁소, 퀵서비스, 가전제품을 수리하시는 분들도 집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절인 줄 알고 저절로 합장을 하곤 한다. 좋은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 공부를 하다 보니 집이 절처럼 장엄된 것 같다. 법당이자 편안한 수행처와 같은 곳이 안심료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 집은 불자들의 모델하우스로 꼽히게 되었다.
나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밖에서 칭찬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이 인정해주는 칭찬이 더 기쁘다. 그래서 도반들에게도 가족들에게 더 많은 공을 들이라고 조언했다. 가정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신행하는 모습이 남편과 자식을 불자로 만드는 것이고 3세대 손자들까지도 이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신앙띠잇기 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신행공동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포교이며 교화의 첫걸음이다.
경전 공부반을 만들어 처음 오는 초심자들에게는 6개월 동안 <옥야경〉, <육방예경〉,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관음정근을 시작으로〈부모은중경〉,〈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수지 독송, 사경한 다음〈법화경〉을 공부하게 했다. 경전공부는 확실한 불자가 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스님을 모시고 경전을 집중 교육시켰다.
교화는 사람을 가르쳐 변화시킨다는 뜻인데, 법회에 오는 모든 사람이 중생에서 보살로 변화되기를 꿈꾸고 시작한 것이 ‘여여회’였다. 꼭 스님과 포교사만이 부처님 법을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불자가 한 사람의 포교사이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부처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밝은 미소를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전법이다. 흔히 신앙체계를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순서를 삼지만, 사실은 이것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꿰야 한다. 믿는 것과 동시에 행해져야 하고, 행하는 것이 열매로 증득되어져야 하며 불교를 믿는다면 믿는 그대로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을 좋아하는 그 마음을 ‘남편부처’, ‘아들부처’, ‘이웃부처님’께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삶을 사는 것이다. 법당에 가서 절하는 것처럼 내 집에서 내 가족과 이웃에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었다.
옛날에 상불경(常不輕)이라는 구도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어디서나 사람을 보면 예를 갖춰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네들을 존경합니다. 당신네들은 곧 진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불성이 있는 고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놀림감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진지하게 절을 하는 상불경에게 욕설을 퍼붓고 비웃었으나,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더욱 공손하게 절을 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욕은 물론 돌멩이나 기왓조각을 던지고 지팡이나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런 꼴을 당해도 그는 조금도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으며, 이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절을 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마음 속 깊이 당신네들의 고귀한 불성을 존경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육근청정(六根淸淨)을 얻어 많은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고 자기도 부처가 되었다. 부처님을 배례하듯이 사람들을 배례한 상불경은 인간배례의 행자였다. 부처님으로 통하는 인격의 존엄성을 알고 이를 배례했던 것이다.
가정법회를 연 이후 14년에 걸쳐 꾸준히〈법화경〉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자, 나도 상불경보살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당신은 부처입니다.”
도반들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말해주었더니 그들의 감추어진 능력이 드러났다.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경전을 써서 책으로 엮었고, 바느질을 잘하는 사람은 도반들에게 예쁜 가방을 만들어주었고, 한과를 잘 만드는 사람은 행사 때 과자를 만들어왔다.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격려하니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에 나설 줄도 알게 되었다.
매 순간,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아무리 큰 일 앞에서도 서둘지 않고 동동대지 않으며 일상의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행복해져 있었다.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전해주고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겐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찾는 것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이미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승만사자후와 승만화신
2008년, 불교여성개발원에서는〈승만경〉을 소의경전으로 채택했다. 불교여성개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목표로 하는 대승보살에 정체성을 두고 실천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여성 불자들이 주체가 된 단체다. 2000년 여성 불자의 정체성을 찾고자 설립되었다. 나는 좀 더 큰 활동을 하기 위해 불교여성개발원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불교여성개발원에서는〈승만경〉강의를 개설해서 승만보살의 10대원을 수지 독송하고 실행해 승만보살처럼 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
승만보살 10대원 수지 독송 100일 회향 때는 승만수계법회를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이 집전해주셨는데,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로 행해진 그 자리에서 나는 남편과 함께 계를 받았다. 명실공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승만보살이 되고자 부처님 앞에서 공증을 받은 것이다.
〈승만경〉강의는 해인사 종진 스님을 비롯해서 몇몇 학자들에게 들었는데, 불교여성개발원에서 개설한〈승만경〉 법회에서 이인혜씨가 강의할 때〈승만경〉운영위원회가 생겼고, 나는 운영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 믿고, 학문적으로 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일 년 동안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듣고 항상 먼저 가서 수업준비를 하고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강의가 있을 때마다 보이차, 침향차, 오미자차 등을 대접하면서 도반들과 차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내가 크게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법회를 회향할 때 약간의 공양금 가지고 갔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살이고 부처 아닌가.〈승만경〉을 발간하는 데 이 분들 말고 누가 부처이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책을 만드시느라 애쓰신 분들께 드렸다. 그리고 여성불자들 가운데 승만보살처럼 훌륭한 삶을 사는 불자를 선정하는 승만상을 제정했으면 하는 의견을 내고, 만약 제정된다면 보시할 뜻을 밝혔다.
다음 달 모임에서 운영위원 중 한 분이 나의 제안이 감동적이었다며 ‘승만’이라는 글자를 넣어 여러 장의 붓글씨를 써왔다. 여섯 사람이 모였는데, 나에게는 ‘승만사자후(勝?獅子吼)’라는 글이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승만보살처럼 당당히 내 소리를 내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승만경 공부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런 걸 써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 하나씩 다 나누어 가졌는데 하나가 남았다. 그러자 써오신 분이 “혹시 몰라서 여분으로 가지고 왔는데 아무나 가지세요.”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무언가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지만 웬일인지 남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제가 가질까요?”
하고 열어보니 ‘승만화신(勝?化身)’이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작은 아들의 결혼을 앞둔 때여서 며느리에게 보낼 함에 넣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는 승만부인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나는 며느리가 승만의 화신이 되어주기를 깊이 염원했다.
채송화나 목련, 분꽃에 씨가 들어있듯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씨, 부처씨가 들어있다. 내 씨에 물을 주고 잘 돌보면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렇듯 자신이 한 말에도 씨가 들어있다. 그래서 말씨를 곱게 쓰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날 며느리에게 승만의 화신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씨로 심었다. 멀리 남의 정원에 가서 꽃을 볼 필요가 없다. 내 정원, 내 안에 이미 꽃이 피어있으니 말이다.
집에 가지고 돌아와 함 보내는 날 며느리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는 마음으로 “승만화신”을 함 속에 넣어 보냈다. 당장 불교를 몰라도 먼 훗날 저 스스로 터득을 해서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