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닢으로 집, 천냥으로 이웃 산다”
장경호 삶 읽고 ‘포교’ 다시생각
작은 공덕 실천이 ‘부처’로 가는 길

나의 이웃들
옛 말에 ‘세 닢 주고 집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한꺼번에 양말을 열 켤레쯤 사서 아파트 경비아저씨, 택배를 오시는 분, 우체부 아저씨 등 우리 집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있다.
하루는 동네 구둣가게에서 구두를 닦는데 구둣가게 아저씨가 구두를 닦아주며 한 걱정 했다.
“해마다 전세금이 올라가서 걱정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살림이 좀처럼 나나지지 않는 게 서민의 삶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아저씨 우리 집 양반이 키가 좀 작으세요. 아저씨와 얼추 같을 것 같은데 옷하고 구두를 좀 드리면 받으시겠어요?”
그렇게 그날 이후로 아저씨와 나는 친해져 지날 때마다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한번은 수선할 구두를 가지고 가니 아들이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했다며 내게 아들의 합격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드님 티셔츠라도 사주세요.” 하고 축하금을 전했더니 고맙게 받았다. 살아보니 콩 한 쪽도 나눠 먹을 때 자유롭고 기뻤던 것 같다. 하나 알면 하나 쥐어주고 하나가 있으면 반절을 그 자리에서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 친소, 부모형제, 거리 따지고 나중에 먹을 것, 살 것 생각하고 살면 누구랑 언제 만나 밥을 먹고 사랑을 하겠는가. 남녀 사이만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서부터 멀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진정한 보시 바라밀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웃과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게 진정한 바라밀이 아니겠는가! 송파에서 가정법회를 시작했던 것도 내 집에서 모이면 좀 더 넉넉히 나눠줄 수 있고 따뜻한 밥도 나눠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만나는 사람, 내가 마주친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만나는 순간순간이 내게는 입재였고 헤어질 때 회향이 되게 했다. 방석 위에 앉아 참선을 하거나 불법을 배우려고 밖으로 다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 일, 상대방의 성장을 돕는 일에 있어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 수련이요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받으려고 할 때가 아닌 줄 때가 온전한 주인공 역할이다.
“마음 닦는 공부만 하세요.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하세요.”
해인사 종진 스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선지식이 곁에서 조언을 해주셨기에 남을 돕는 일을 미루지 않고 즉시 실행하는 습관도 실천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이 없어도 누가 구하러 내 집에 오면 그냥 다 내주면 운명이 바뀐다는 걸 경험을 통해서 알기에 남들이 말하는 노후대책을 해본 일이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매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불교를 알고부터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운명을 운전해왔다. 부를 쫓기보다는 마음공부를 추구해왔고 조건 없이 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살아 왔다.
불교를 알고는 보이는 세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무궁한 것인데 드러나는 몇 가지에 집착해 싸우는,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연극과 같고 나는 연극을 무대에 내놓는 연출가다. 내가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연출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라진다.

장경호 거사님의 일대기를 읽고
어제 저녁 밤새워 동국제강 창업주이셨던 장경호거사님 평전을 다 읽었다. 너무 잘 읽었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 “재가불자로서 이렇게 살 수 있구나! 어느 재가불자가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온전하게 상구보리하화중생을 위한 보살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까지 읽는데 가장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그분이 울산 근처에 수도원을 만들려고 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지주들의 원성을 사게 되자 과감하게 오랫동안 진행해오던 불사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면 그만두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나쁜 마음을 가지면 내 마음도 불편하고 그 일이 잘 진행될 수가 없다.
또 하나 감동적인 것은 그렇게 큰 삶을 사셨던 분도 ‘사람’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려는 원력을 가지고 서울 주택가에서 가정법회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정주부로서 집을 법당 삼아 공양주 노릇을 하면서 민들레 홀씨가 되어 부처님 법을 함께 공부하고 자아완성을 하고자 했던 지난 2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분이 살아계신 것은 아니지만 왠지 의기투합이 되는 것을 느꼈고, 내가 걸어온 길이 어느 재가 불자가 포교를 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경호 거사님은 우리나라 민간 철강 제일의 동국제강을 창업해서 사업의 성장과 함께 국가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신 분이다. 토굴에서 안거를 함께 나고는 사람을 만드는 수도원을 만들 것을 함께 계획했던 성수 스님은 묵묵히 수행하던 모습이 마치 저 옛날의 조사 스님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어느 경계에서도 절대 속지 않는 경지에 가 있었다. 수행과 교화에 있어서 근현대를 통틀어 동양 제일의 거사였다.”는 말씀은 그분이 얼마나 수행력이 깊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철강업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민족정신을 품었던 동국제강 창업주 대원 장경호 거사의 삶에는 선지를 꿰뚫기 위해 일생을 산 매서운 수행자의 모습과 함께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낙원을 이룩하라’는 기치 아래 대중불교운동을 펼친 전법자의 모습이 공존했다고 한다. 새벽녘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읽으면서 “아, 대중교화에서 원력이 이리도 깊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수시로 눈물이 나왔다.
평소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살아 숨 쉬는 경전이 대중들에게 읽힐 때 교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장경호거사의 사재로 세워진 대한불교진흥원에서는 역경사업에 일부를 지원함으로써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큰 불사로 평가받고 있는 한글대장경 완간에는 장경호거가의 한국불교발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스며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이지 않는 그분과의 인연이 느껴졌다.
부인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일꾼들의 밥을 직접 지어주는 것을 보고 자식들이 “어머니 일하는 아주머니 시키세요” 라고 하자,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는 부처님들의 밥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있느냐”며 손수 밥을 지어 대접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큰 어머니 역할을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동안 불교방송국에 약간의 후원금을 보냈고, 불교방송국이 창립되면서 주식을 사놓은 일도 있고, 장경호거사님으로 인해 설립된 대한불교진흥원 주최의 대원상도 추천받은 적이 있으니 동국제강과 인연이 깊기는 깊은가 보다.

‘부처’로 가는 길
내리사랑만 있는 줄 알았더니 치기사랑도 있었다. 부처님을 향한 사랑이 치기사랑이다. 부처님께 내놓아보라. 언제든 빈자리를 채워주신다.
그분처럼 정확한 분은 없다. 공덕을 쌓은 만큼 기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베풀지 않았으면 이유 없이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걸 안 이상 ‘주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덕을 쌓아가고 수행이 쌓여가는 과정이 ‘부처’가 되어 가는 것이리라.
한순간에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은 돈 한 푼 두 푼이 쌓여 통장이 불어나듯 작은 공덕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감으로써 ‘부처’에 다가가는 것이다.
상대가 산꼭대기에 있으면 산꼭대기에, 강물 바닥에 있으면 강물바닥에, 얼음구덩이에 있으면 얼음구덩이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가면 부처님은 결코 밀쳐내지 않으신다.
욕심과 사심을 가지고 가면 부처님은 받아들여주시지 않는다. 착한 기운을 가진 사람에겐 좋은 일이 생기고, 사악한 기운을 가진 사람에겐 사나운 일만 생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세상의 섭리다. 내가 원력을 세워 마음을 바칠 때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