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불심’ 연재를 시작한 게 벌써 1년 하고도 6개월이다. 이제 35회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그동안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8년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늘 죄송한 마음으로 그리웠던 어머니. 마지막 회는 세상의 보통 딸들을 대신해서 지혜롭고 불심이 깊으셨던 나의 어머니에 대해서 쓴다. 며칠 전 직장에 다니는 작은 딸아이가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이제 막 시작한 마음공부 강의를 듣고 다녀오면서 보낸 짧은 문자내용은 이렇다. ‘오늘 강의 듣다 눈물이 났어. 벅차오름을 느꼈어. 기적 같은 강의야. 무슨 복을 타
〈지장보살 예찬문〉을 읽으며 100일 정진 중이다. 참회하고 싶어질 때 하는 기도다. 예찬문을 보면 지장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온갖 액난 구하심은 부모와 같고 겁약한 이 숨겨줌은 숲과 같아라.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청량수 되고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과일이 되며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복이 되고 더위속의 사람에게는 큰 구름 되며, 가난 속의 사람에겐 여의보가 되고 공포 속의 사람에겐 의지처가 되며, 모든 중생 모든 선근 두호하시며 묘한 경계 나타내어 즐겁게 하고, 중생들의 참괴심을 더하게 하며 복과 지혜 구하는
십오륙 년 전이다. 해인사 퇴설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종정이자 해인사 방장이신 법전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고, 필자는 그때 그 스님의 일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퇴설당문은 늘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면 낮은 담 너머로 종정을 모시는 시자 스님들이 보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문을 열어주곤 했다. 단정한 몸가짐에 풋풋한 젊은 스님들을 보면 엄마 마음으로 돌아가 흐뭇한 웃음이 피어오르곤 했다. 새로운 출가의 길 앞에 서있는 설렘이 보였고, 젊은 나이에 출가해서 그곳에 있는 자체만으로 그들이 빛나보였다. 시자 스님들이
40대 초반의 무여 스님은 불교계에서 알아주는 유튜버다. 3년 전 ‘무여 스님과 함께 하는 사찰여행’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120여 개 사찰 기행 영상을 올렸다. 어느덧 구독자 수 3만 명을 넘겼다. 가히 인기 유튜버라고 할 수 있다. 큰 키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화사한 관세음보살의 화현같이 느껴진다. 최근에 KBS ‘인간극장’에 등장했으니 더 유명세를 타지 않을까 싶다. 유튜브 촬영 제작을 비롯해 대학원 강의, 사찰의 불교대학 강의를 하고 올 가을 포교원 개원을 앞둔 바쁜 일상의 스님에겐 이 모두가
자우 스님이 마흔 살에 서울 홍제동에 비로자나국제선원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도 분들과 성지순례를 떠난 송광사에서의 일이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노보살 한 분이 스님을 불렀다. “스님, 무서워요!”이때 스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 스님이라는 존재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구나, 저렇듯 연만하신 분들이 자식 같은 나에게 무섭다며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스님이구나!’ 당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느꼈다. 그때부터 스님은 자신과 인연이 닿는 불자들이 마음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서원을 더욱 견
“우리 어머니는 제 은사스님이세요.”어머니에 대해 여쭙자 세수 여든이 넘으신 자광 스님께서 단박에 하신 말씀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모든 걸 가르쳐주셨죠. 모성애와 자비를 가르쳐주셨고 친절과 뭇 생명을 포용하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어머니는 자비를 행하고 친절을 행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라는 말씀인 것 같다. 모든 것을 가르치는 존재가 어머니라는 말씀에 세상의 어머니들은 최상의 교육자임에 틀림없다. “자비를 배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부처님께서는 중생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셨다고 하잖아요. 자식을
조계종 前포교원장 혜총 스님은 어머니가 두 분이다. 낳아주신 어머니와 출가자로 성장시켜준 자운 율사(1911~1993)가 그분들이다. 자운 스님은 한국불교 계맥의 중흥조로 일컬어진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출가한 조계종 출가자 가운데 스님에게 계를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종단의 전계대화상을 지내며 계단을 정비해 계율에 기반한 수행풍토를 확립시킨 뛰어난 수행자다. 마냥 뛰어 놀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어린 소년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통도사로 들어왔다. 집에 오시던 한 스님께서 속가에 살면 서른을 넘기기 어려우니
수덕사 부주지 주경 스님은 단순 명쾌한 분으로 통한다. 언제 무슨 일로 만나 뵈어도 ‘다음에 합시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좋아요, 해봅시다, 지금 하지요”가 전부다. 다음은 없는 것처럼 ‘지금 여기’를 전부로 사는 수행자다. 가끔 수행의 궁극은 단순 명쾌하게 살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래서 스님을 뵐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모습도 수덕사에 사셨던 경허 선사를 떠오르게 한다. 육척 장신에 가느스름한 눈매가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경허 선사와 꼭 닮았다. 경허 선사께서도
경기도 곤지암 우리절 주지 동봉 스님은 불교계의 보기 드문 저술가다. 〈금강경〉 〈천수경〉 〈범망경 보살계본〉 〈용성스님 어록〉 등 수십여 권의 경전을 번역·발간했다. 에세이집 〈마음을 비우고 차나 한 잔 들게〉와 〈마음을 비우게 자네가 부처야〉, 〈반야심경〉을 알기 쉽게 풀이해서 글려준 오디오 에세이집 〈오디오 반야심경〉은 수 십 만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남들이 선방에서 참선수행을 할 때 방에 들어앉아 경전을 통독하며 글을 쓴 결과다. 스물넷에 출가해 일흔이 넘은 지금도 계속 경전을 번역하고 글을 쓰고 있다. 할 줄 아는 게
최명숙 ‘보리수 아래’ 대표는 청정한 미소와 담백한 언어로 어머니를 추억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하, 어머니께서도 저리 맑은 모습으로 딸을 키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순이 넘었다고 하는데 너무 해맑아 보여서 그랬을까. 그녀에게서 뇌성마비 장애로 걸음이 수월치 않은 초등학생 딸을 업고 등교를 시켰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됐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찻집에서 이뤄진 인터뷰 내내 가슴이 따뜻하고 뭉클했다. 어머니의 분별없는 사랑이 자식의 일생을 얼마나 견고하고 풍요롭게 하는지를 발견한 자리였다.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연화원을 운영하며 불교의 평등과 자비 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해성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따라 다녔던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는 딸 스님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딸이 출가할 때 어머니도 함께 출가한 셈이다. 초등학생인 어린 딸은 어머니가 절에 갈 때면 따라나섰다. 5리 정도의 길을 타박타박 걸어 나룻배를 타고 내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정릉의 조그만 절에 가는 길이 즐겁기만 했다. 어머니가 법당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이 절 마당에서 또래들과
언제 보아도 진실한 사람이 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정도로 언행이 진실한 사람이 있다. 삼척 천은사 주지 동은 스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젊으셨을 적에도 그랬고 예순이 넘은 지금 뵈어도 잘 생기셨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 한결같은 진실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진실함이 아름다움을 만들고 세상의 미남, 미녀를 만든다고. 10여 년 전, 동은 스님이 펴낸 〈무문관 일기〉를 읽고 울어버린 기억이 난다. 스님의 진실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스님은 100일간의 처절한 ‘무문관 수행’을 이야기 하면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