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면서도 ‘공부’ 할 수 있어
남편의 ‘과음’ 싫기만 했는데
‘지난날’ 알고 나니 큰마음 생겨

나는 김장 김치 하나를 담아도 한겨울에 먹을 감치와 초봄에 먹을 김치를 따로 담아 항아리에 이름을 붙이고 간장, 된장, 고추장을 일일이 담을 정도로 나 나름대로는 살림에 정성을 쏟는 편이다. 그러나 그런 정성들이 단순히 일로만 그치고 말았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살림이 명상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고, 돈벌이로 생각하면 ‘돈벌이’일 수도 있는 것이고, 노동으로 생각하면 ‘노동’일 수도 있다. 수행을 통해 ‘나’라는 본성을 보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 일들을 하는 동안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살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도반이고, 스승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장님이란 생각이 든다.
남편으로 인해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고마운 인연이고 앞으로 나와 가장 마지막으로 남을 남자친구이니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작년에 틱낫한 스님이 방한하셨을 때 아들과 떡을 가지고 월정사까지 와서 대중공양을 올리고 수행 잘하라고 격려하고 돌아간 고마운 남편이다.
불교를 만나기 전 살림을 하면서 붓글씨, 동양자수, 다도 등 규방의 솜씨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나에게 가져다준 월급봉투 덕분이었으니, 그의 성실함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늘 감사하며 산다. 남편이 월급을 타오면 조금 떼어내어 봉투에 넣어 조상님 앞에 올렸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살았고, 특별한 시집살이가 없었기에 나만의 세계를 누릴 수 있었다. 모두 남편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스물네 살 때 지금 평생도반으로 사는 남편과 만나 혼인했다. 남편은 내 직장 친구의 나이 많은 조카였다. 직장 친구가 조그마한 계모임을 주선했는데, 그 친구가 조카에게 계를 들 것을 권유해서 남편이 같은 계원이 되었다. 친구가 남편에게 곗돈을 받으러 다방에 가면 같이 가서는, 나는 다른 장소에 앉아 있고, 친구는 조카와 얘기하고 돈을 받아 오곤 했다.
어느 날, 친구가 “조카가 너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했어.” 라고 말하는 것이다. 키가 작으니 작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몸집이 아담한 한 친구를 소개했더니 다시는 더 만나지 않았다. 나중에 왜 다시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다방에서 나오자마자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 후 남편이 친구에게 정식으로 나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친구가 나에게 의사를 물어왔다.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바로 어머니와 의논했다. 그 말은 들은 어머니는 어디 가서 사주를 보신 모양이었다.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몇 번 만났는데 하루는 남편이 “정한 데 없으면 나한테 와주면, 호위호식은 못해줘도 밥 세끼는 먹여주겠다.”고 했다. 엄마한테 그대로 말했더니 “나이 먹은 사람이라 말은 잘하네.” 하셨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지 아버지가 서울에 사는 고모부를 보내 남편을 한번 보라고 했는데 고모부가 보시고 하는 말씀이 “집안에서는 우리 란이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자네가 란이를 데려가니까 더 똑똑한 사람일세.” 하셨다. 아버지께서도 고모부의 말씀을 전해 듣고 흡족해하셨다.
남편은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 자주 나를 데리고 여주의 신륵사에 가곤 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신륵사는 남편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위폐를 모셨던 연유로 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절에서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내가 아이를 갖고 난 후 붓글씨 공부를 할 때 곁에서 화선지를 잘라주고 먹을 갈아 주며 채본에 날짜를 적어주었다. 차를 마시며 옆에서 먹을 갈아주던 순간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위한 태교의 시간이 되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햄버거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가지고 들어왔고, 외출했다가 늦으면 정류장에 포대기를 갖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일도 있었다. 나에겐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남편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술을 좀 과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 점 때문에 나를 닦을 수 있었으니 그것도 지금은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든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있는 시간에 나는 붓글씨를 썼고,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잠자는 시간에 수를 놓고 사경을 했다. 염불하면서 마음을 닦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그토록 술을 먹은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칠십이 넘은 최근 수술 전까지 술을 마실 만큼 애주가인데, 술을 마시면 통일노래를 불렀다. 시아버님이 납북을 당한 탓이다. 시아버님은 양정고등학교를 나오고 인품이 좋으셨으며 금강산에서 스키를 타실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깊었던 그는 “아버지가 간첩으로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지난날을 이해하다 보니 편하게 받아들여졌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힘들었던 그의 지난날은 그의 깊은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술만 마시면 통일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루는 남편이 흐느껴 울도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도 울었다.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프면 남자가 저렇게 눈물을 흘리겠는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내가 어떻게 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길 밖에 없었다.
남편이 울면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울어?”
“당신이 울어서 울어요.”
그에게도 아버지를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는 시간과 홀로 설 수 있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술을 마신 뒤 택시를 타고 온다고 하면 아이를 업고 나가서 기다렸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 매번 통일노래를 부르고 말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런 세월이 쌓여 진정한 가족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오라…”
지금도 남편이 처연하게 불렀던 ‘통일 노래’가 가끔 늙은 그의 등 너머로 들려오는 것 같다.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군대에 갔을 때 돌아가셔서 의가사 제대를 했다고 하니 이래저래 외로운 사람이다.
최근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을 해놓았다고 한다. 고향에 가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셨을 아버지의 행적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 일로 바쁘다.
상대방의 지난날을 이해하면 그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게 되면 미움보다는 사랑이 생긴다. 기도를 해보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기도는 내가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이고, 지장보살기도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큰 원력을 가진 지장보살이 되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일에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노래를 부르면 그 일이 이뤄지듯, 부처를 부르면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하니 술을 “마셔라, 마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남편이 술을 먹는 것이 그렇게 미웠는데, 큰 수술 후 술을 마시지 못 하는 남편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남편은 20여 년 동안, 집에서 가정법회를 할 때도 좋다 싫다 말하지 않고,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해주었고, 내가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을 때도 아이들과 함께 걱정해주고 보살펴주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났다.
요즘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번 여행도 할 겸 남편과 함께 문경 관음사로 지유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간다. 오는 길에는 맛있는 밥도 사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노년을 보낸다. 노년을 함께 도반처럼 지내며 함께 마음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평생도반으로 늙어가고 있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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