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으로 뒤덮인 겨울 산을 오르노라면 눈 앞에 펼쳐진 설경에 연신 감탄이 터져 나오곤 한다. 그러면서도 한 발자국씩 옮기는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운데, 행여 눈길에 미끄러질까 염려해서이다. 이따금 입산통제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무시하면서 계속 오를 것이고, 어떤 이는 되돌아갈 것이다.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일 것이다. 만약 사고라도 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행동이다.불교도에게 있어서 계율은 잘못된 행동을
누구나 한 번쯤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매료되어 악기를 배운 적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악기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배우기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악기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악보를 볼 줄 알아야 하고, 악기를 연습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배울 경우, 처음에는 제대로 소리를 내기조차 힘들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음정이나 박자가 틀리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럴 때마다 멋지게 바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생명 공학과 의료 기술로 인해 이전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특히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일 경우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번민을 거듭하기도 한다. 생명-의료윤리에 관한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기에 철학자들은 전통 윤리 이론인 공리주의, 의무론, 덕윤리 등을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윤리 이론을 적용할 경우, 그 해결책도 달라지므로 사실상 의견의 일치에 이르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각자의 종교적 신념으로
울긋불긋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던 나무가 어느새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런 변화는 해마다 반복되는데, 왜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름다웠던 단풍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삶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당혹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렇듯 우리에게 죽음은 안타깝고 슬픈 일, 또는 위로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현대 사회에서 크게 발달한 응용윤리학에서는 윤리적 난제(難題)들의 본질과 그 해결책의 기준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판단의 궁극적인 기준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응용윤리학에서는 규범윤리학의 주요한 이론을 현실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한다. 아울러 응용윤리학은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분야로 나뉜다.응용윤리의 여러 분야 가운데 우리 삶
우리 사회는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지만, 그 변화로 인해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누구나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이처럼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영역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윤리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들에 대처하려는 시도가 응용윤리학(Applied Ethics)이다. 이 학문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학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전의 윤리학이 주로 이론적 차원에 대한 논의에 머물렀다면 응
좋은 이미지로 대중에게 호감을 샀던 이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대중에게 호감을 샀던 이들이 대중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행동을 보임으로써 크게 실망할 때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이들이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됨됨이로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람 됨됨이는 ‘사람으로서 지니는 품성이나 인격’을 뜻하며, 이것은 동·서양에서 중시하는 덕과 일맥상통한다.서양에서 덕에 대한 논의는 고대 윤리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계승한 플라톤은 지식과 동일시되던 덕(德)을 개인의
누구나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수시로 바뀌지만, 어른들은 늘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덕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는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이기적인 개인이 공익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이다. 이론적으로는 공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익은 희생되어야 하지만, 이기적인 개인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뜻하지 않게 도덕적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부분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을 하겠지만, 일부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 흔히 전자의 입장을 이기주의(利己主義)라고 하며, 후자의 입장을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 한다. 대부분 평상시에는 이기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지만, 막상 자신의 상황이 되면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머릿속으로는 많은 이들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현대인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어떤 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며, 어떤 이들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 내지는 바람직한 삶에 대한 기준이나 원칙도 각양각색이다.평범한 삶을 살다가 때로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어떤 행동이 최선인지 고심하기도 한다.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어떤 기준이나 원칙에 의해 행동해야
동아시아에 뿌리를 내린 불교는 분명히 인도불교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즉, 인도불교는 중국적인 불교로 변모했으며, 중국화된 불교는 한국과 일본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는 외래문물이라기보다는 선진문물로 인식되었으며, 국가와 왕실의 주도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번성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독자적인 불교사상과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근세의 동아시아 각국에서 유교가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불교의 지위는 점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서력(西曆) 기원을 전후한 무렵으로 보고 있다. 불교는 중국의 사상이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었지만, 점차 중국인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계율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이라는 새로운 문화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중국적인 계율’이 출현하게 된다. 특히 출가자의 일상생활과 관련이 깊은 율(律)은 중국인에게 적합한 형태로 차츰 변하게 된다.중국의 출가 교단에서는 일찍부터 생활규범으로서 일정한 형태를 정비했던 승제(僧制)가 존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