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사랑의 실천
복과 지혜 함께 닦아야
여법한 삶, 가정에서 시작

법정스님에게서 배우다
불교에 입문해서 경전 이외에 처음 접한 책이 법정 스님의 글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종교의 본질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알기 쉽게 말씀해주셔서 신행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스님의 종교에 대한 정의가 평소 실천이 없는 행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고 생각해온 나의 신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고매한 이론도 무용지물이라는 나의 생각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나의 인생관과 부합되는 것이 좋았다. 지혜만 닦고 복을 닦지 않으면 덕이 부족하고 복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함께 닦는 일이 아는 것을 하루하루 행하는 데 있다는 말씀은 나에게 명약으로 다가왔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즉시 실천하기 시작했다.
법정스님의 글을 보면 “인도에 가서 길을 물어보면 길을 가르쳐주고 식사값까지 내주고 간다. 스님을 보면 예를 갖춘다. 우리나라는 그런 신도가 별로 없다.” 라는 글이 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즉시 실천에 옮겼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은연중에 스님들이 나를 바라보게끔 하는 습성이 생겼다. 한번은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모르는 분이었지만 “스님 어디가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아산 병원에 갑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아. 저도 그쪽 방향으로 가는데요.” 함께 택시를 타고는 내가 차비를 냈다.
적게 소유한 청빈한 삶만이 진정한 존재 양식임을 말씀하시고 낡은 것, 묵은 것,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던 스님의 말씀은 나의 신행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낡은 생각, 묵은 고정관념,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날마다 기원하고 살았다. 그 동안 나름대로 불자답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법정 스님의 가르침에서 기인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가실 때까지 몇 년에 한 번 출간하시는 책을 읽으면서 스님과 동시대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고, 늘 새롭게 나의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스님은 세상과의 작별도 무소유를 주장하신 분답게 하셨다. 스님의 마무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다비식 때 상좌 스님들이 관도 쓰지 않은 스님의 법구를 모시는 장면은 사람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언행일치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게 했고, 언론에 밝혀진 유서의 내용을 보고는 다시금 눈시울이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까지 가지고 가고 싶지 않으니?“내 이름으로 발간된 책을 절판하라.”는 유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제자들에게 하신 유언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남긴 말씀처럼 인간적이고 따스하다.
“상좌들 보아라.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상좌들에게 남기신 이 말씀은 많은 수행자분들에게도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스님의 유언을 접하면서 그 어느 열반송이 이보다 더 경건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스님다운 마무리였다는 생각을 했다. 영결식 등 일체의 형식적인 행사를 생략한 채 다비만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금의 틈도 없이 언행일치의 삶을 살다 가신 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관도 쓰지 말고 수의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입던 옷에 가사를 둘러 화장하라고 하신 스님의 유언에 따라 대나무 평상에서 가사 한 벌에 덮인 채 누워계신 스님의 모습은 가슴을 서늘하게 내리치는 죽비와도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 스님은 마지막 모습에서도 우리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화두로 던지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듣자하니, 많은 스님들께서도 법정 스님의 영결식을 보면서 자신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스님께선 나에게 생전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돌아가시면서 더 큰 깨달음을 주신 것 같다. 따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선지식 중의 한 분이셨다. 현생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드린다.

들꽃처럼 무심한 삶을
말에 씨가 있듯이 운에도 씨가 있다. 운명은 타고 나더라도 팔자는 내가 길들이는 것이다.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사물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고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한다.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하지 선택할 수 있기에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신구의 세 가지 업에 의해 살아간다. 업을 잘 조절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우리는 전생과 현생에서 행한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대부분의 상황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다만 상황에 대한 대응법(태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지혜롭게 반응하느냐, 무지하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닦아나가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은 인과응보, 인연법, 연기법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로 세상을 보게 한다. 그러면 모두 내 탓이다. 그것이 나를 바르게 아는 것이고, 바르게 알면 안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삶의 이치를 알게 되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연민이 생겨 자비심을 베풀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상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건 어떠한 상황에 처하건 부처님을 시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고자 했고 그 출발을 가정에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십오륙 년 전 큰 병을 얻어 수술을 하러 갈 때, 모자와 메모지,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렸다. 다행히 살아났고 평소 살던 대로 살고 있다. 공부방을 그대로 운영했고, 마음공부를 했고, 아이들에게도 잘해주었고 절에도 갔다. ‘아프다’는 생각을 놓고 일상을 보냈더니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장을 하고 병원에 갔더니, 수술하실 분이 이렇게 입고 오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마디 들었다. 퇴원하는 날 눈물이 많이 나왔다. 예전엔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에 맞추어 살았지만 지금은 한 순간 한 순간 잘사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에 로버트처럼 작동한다. 목표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그냥 놓아버리니까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이 떨어졌다. 앞으로도 봄이면 산과 들에 이름 없이 새순을 틔우는 들꽃처럼 무심한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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