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질곡과 선승의 빛근대에 들어서면서 위대한 선승들이 연이어 이 땅에 와주셨다. 근대 선승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질곡의 시간대에 생의 일부를 걸었다. 그 고통과 번뇌가 수행의 과정에 깃들었다. 그만큼 수행은 치열했고 단단해졌다.시대와 수행이 긴밀했던 세 분의 선승이 먼저 떠오른다. 고봉(古峰, 1890~1961)은 박팽년의 후손으로 통도사에서 출가를 기다리던 중에도 양반 행세를 했다. 오만한 행자를 혜봉(惠峰, 1816~1881)께 데려갔다. “너를 거드름 피우게 하는 그 물건이 무엇인가!” 화두를 내리면서 신분 해방을 선언했
1. 논쟁의 시작돈점(頓漸) 논쟁은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치열한 논쟁 중의 하나였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은 뒤 점진적 수행 단계가 뒤따라야 한다)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문득 깨달아 부처가 되니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를 두고서 그 효용성과 정당성을 따지는 논쟁이다.돈점 논쟁은 성철(性徹, 1912~1993)이 보조 지눌(知訥, 1158~1210)을 비판하면서 시작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750여 년 뒤인 오늘날 지눌의 가르침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였다. 필자는 수행자로서 다양한 매체와 선지식들의 담화를 통해서
1. 한국 간화선의 기틀을 마련한 지눌우리나라 선종 간화선은 보조 지눌(知訥, 1158~1210)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눌은 선종과 교종이 심각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둘을 회통시키고 독창적 간화선 수행법을 마련했다. 지눌의 수행법은 오늘까지 세간과 출세간 선수행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지눌의 아버지 정광우는 오늘날 국립대학 교수 격인 국학학정(國學學正)이었으니 가정 형편은 좋았다. 그러나 지눌은 날 때부터 병약했다. 아들의 병만 낫게 해주시면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올리자 곧 병이 나았다. 8세 때 종휘(宗暉)를 스승
7. 돌아온 혜소, 도의와의 약속을 지키다진감 혜소(慧昭, 774~850)가 신감(神鑑)을 뵈었다. “반갑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만났구나.” 신감은 전생 수행 인연을 환기하고 바로 인가를 해주었다. ‘초발심이 정각’임을 실천했다.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인도 스님이 유리병을 바치며 “당신의 자식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태몽의 계시가 그대로 실현됐다.도의와 혜소는 양쯔강 남북 유역을 오가며 따로 순례를 하다가 신라 출신 무상(無相)의 영당 참배차 성도로 갔다가 만난다. 두 사람은 귀국
1. 수행법의 혁신불교 수행법에 대한 견해와 실천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출발점인 부처님 깨달음의 방법과 과정은 니까야 계통 경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안이비설신의 등을 통해 지각을 하되, 있는 그대로 지각함으로써 육근, 육경, 육식에 애착하지 않고, 촉(觸)에 애착하지 않으며, 수(受)에 애착하지 않는다. 환락과 탐욕을 여의고 갈애를 버린다. 나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여 정견(正見)을 이루고 8정도를 완성한다. 4념처(四念處), 4정근(四正勤) 등이 포함된 37도품(三十七道品)을 수행한다. 색계 사선정(四禪定) 무색계 사선정과
19. 팔공산 삼성암 토굴보문은 1948년부터 약 4년간 법주사 복천암, 도리사 태조선원, 해인사 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등에서 수행했다. 1953년 팔공산 중턱에 토굴을 지어 들어가기로 했다. 대처승이 살다가 떠나면서 무너진 집이 있었는데 그것을 헐고 돌과 흙을 이겨서 벽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다시 지었다.보문은 토굴 조성과 수행 비용을 마련하려고 탁발에 나섰는데, 여염집보다는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등 주로 대구지역 시장을 찾았다. 보문이 청아한 음성으로 〈반야심경〉을 염송하며 탁발을 시작하면, 그 염불 소리와 삿갓 쓴 풍모에 환희
16. 상원사 떠나 낙산사로상원사를 말없이 떠난 보문은 낙산사에 이르러 한암 스님께 편지를 올린다. 앞으로 ‘보문(普門)’이란 자호를 쓰겠다고 했다. 현로(玄路)라는 법명이 있었고, 자운(慈雲)이라는 법호를 한암으로부터 받았는데도 새로운 자호를 쓰겠다고 한 데서 보문에게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한암은 그 뒤로도 “내 상좌 가운데 선에 대한 지견이 열린 사람은 보문뿐이다.”라며 떠나간 보문을 잊지 않았다.보문은 낙산사에 이어서 직지사, 도리사, 봉정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까지 두루 편력했다. 더욱 치열하게 정진했
12. 한암 생신날의 질문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제자를 비롯한 타인의 질문에서 시작하는 데에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을 테다. 보문의 구도수행과 중생제도를 알려주는 전문과 기록에도 중요한 질문이 깃들어 있어 진지하게 읽힌다.견성 인가 전후로 보문이 선지식을 향해 던진 질문이 많았겠는데 몇 사례만 전해진다. 먼저 한암의 생신을 맞이해 국수 대중공양을 할 때 보문이 질문한 경우다. 말석에 앉아있던 보문이 한암 앞으로 나가서 절을 올리고 여쭙는다.“오늘, 스님이 태어나셨는데, 어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법거량에 가깝다. 부
9. 화두 삼매한암(漢巖, 1876∼1951) 가풍은 참선은 물론 다른 공부와 의례도 함께 닦았다. 한암은 “중이 되어 다섯 가지에 참여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라며 참선, 간경, 염불, 의식, 포교 등 승가오칙을 만들어 실천하게 했다. 한암은 아침 공양을 마치면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가르쳤고, 탄허도 그 뜻을 받들어 간경 교학을 도맡았다. 보문은 참선 자리의 중심에 앉았다. 이에 대해 한암은 “내 상좌 가운데 선에 대한 지견이 투철한 사람은 보문뿐이다”라고 인정했다.보문은 수행의 기록을 스스로 남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기록하는 것
7. 마하연을 떠나다보문은 금강산 마하연에 도착한 뒤로 산 아래 본사인 장안사로부터 쌀을 얻어 지고 오는 일을 도맡았다. 오르막길이었기에 중간에 몇 번 쉬어야 했고 그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석우(石友, 1875~1958)의 상좌로서 마하연의 원주 노릇을 하고 있던 우봉(愚鳳, 1898~1953)이 그걸 보아두었다가 꾸짖었다. 보문은 그 꾸지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바로 담배를 끊었다.다시 발심한 보문은 정식 출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하연 선방의 조실인 석우를 은사로 하고 싶었다. 보문이 석우 슬하로 출가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우봉
4. 부산 항만노동자 현실 속으로 들어가다일제 경찰의 수배를 받고 대구를 떠난 보문(1906~1956)은 1년 뒤인 1935년 부산 항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화물을 배에 싣거나 배에서 화물을 내리는 일을 하는 항만노동자가 되었다. 보문은 왜 부산항만 노동자가 되었을까?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부산항만의 노동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1920년대부터 일본 자본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업을 잠식하여 식민 지배를 뒷받침했다. 부산항은 일본 자본의 진출을 돕는 해상교통 및 물자 이동의 요충지였다.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 준비가 노골
이제부터 한민족 선의 터전을 마련하고 깨달음의 빛을 비춰주고 있는 선승들의 구도 수행 자취를 따라가기로 한다. 그간 쌓인 그들에 대한 담론은 적실하여 감동을 주지만 미화되거나 과장된 면도 있다. 선승의 행적이 신비화된 경우도 있다. 앞으로 그 허구의 포장이 조금씩 걷히기를 소망하지만, 필자의 무명업식과 망념에 의해 또 다른 사단이 생겨날까 두렵다. 있었던 그대로에 다가가도록 정성과 노력을 다할 뿐이다. 선승의 행적을 거두절미 내세우기보다 맥락과 관계를 통하여 조명해보고자 한다. 특히 선승과 제자, 선승과 선승, 선승과 속인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