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한계 뭐, 남의 나라 일이긴 하다. 하지만, 또한 우리와도 전혀 무관할 수 없어서 관심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웃나라 일본의 일 말이다. 지금 일본의 정치를 이끌고 있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오랜 숙원사업이 〈헌법〉 제9조의 개정이다. 그 반대편에서, 뜻있는 사람들은 그 수호를 목소리 높여서 외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살던 고치(高知)에도 그런 반대편 인사들이 있었다. 그 덕분으로 전차 안에서 “헌법 9조를 지키자”는 광고문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고문 안에는 〈헌법〉 9조가 어떤 내용인지를 제시해 두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 유명한 9조를 읽어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기억을 할 수 없으니, 번역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독후감은 이렇다. 현재 일본이 소유
원효를 위한 변명 “원효스님, 좋아해요?” 이렇게 물어보기로 할까?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가령, “좋아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어떤 점이 좋아요?” 그럼 이번에는 또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널리 알려진) 스님이 원효 스님이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별로 없을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떤 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일까? 사실은, 우리 불교가 원효 스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효 스님이 가장 널리 알려진 데에는, 어쩌면 그가 파계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아들 설총을 낳았다는 것 말이다. 그렇다. 그는 분명 그랬다. 그리고서는 스스로 “소성(小姓)거
약관을 기억하라 사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누구나 잘 그러는 것 같다. 보험들 때의 일 말이다. 정말 이것저것 꼼꼼히 생각해 보고, 알아보고 난 뒤에 결정해야 하는데…. 주변의 친지 중에 보험을 모집하는 분들이 있게 되면, 권유에 못 이겨서 그냥 들고 말 때도 있다. 정작으로 중요한 약관이라든가, 세부적인 사항을 잘 챙겨보지도 못하고서 말이다. 또한 약관을 읽어보고서 가입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어떤 조건으로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매우 유사한 경우가, 수계(受戒)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수계는 계를 받는 일이고, 그 계의 조목을 잘 지키겠노라 부처님과 약속하는 일이다. 그
〈금강경〉의 마지막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계실까? 경전의 말미(末尾)를 한번은 눈여겨 볼 일이다. 어떤 형식으로 끝나는지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금강경〉의 경우에는 “일체 무든 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 같으니, 이렇게 관찰할지라”(표준 금강경)라고 하는 결론적 말씀으로 끝난다. 아무래도 〈금강경〉의 경우에는,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을 많은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전하겠다”는 뜻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앞에서 인용한 게송에 뒤이어서, 경전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시고 나니, 수보리 장로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와 모든 세상의 천신·인간·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습
신은 누구인가? 얼마 전, 남쪽의 한 절에 다녀왔다. 자원봉사로 해설을 해주시는 불자님이 계셔서, 어느 때보다 도량을 진지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그 큰 절에서, 특이한 것(그 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것)은 ‘가람각(伽藍閣)’의 존재였다. 친절한 문화유산해설사는 “주지스님께서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나 정작 ‘가람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셨다. 무슨 부처님이라 하였으나, 역시 ‘가람신’이 아닌가 싶었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었고, 얼굴은 셋이었다. 중국의 절에서도 ‘가람전’은 흔한데, 그 분은 바로 관성(關聖, 〈삼국지〉의 주인공 관운장. 도교에서 신으로 모신다.)이다. 도교의 신을 데려다가 불교의 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은 것이다. “주지스님께서 정성을 다
거리로 나가는 스승 이 〈무량의경〉에서는 ‘스승’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지만, 다른 경전들에서는 ‘벗’이라고 부르는 말이다. 불청지사가 곧 불청지우(不請之友)이고, 불청지우가 곧 불청지사다. 스승이 벗이고, 벗이 곧 스승이기 때문이다. 오늘 생각해 보는 이 구절의 바로 앞에는 “보살은 모든 중생의 참다운 선지식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그 선지식이라는 말은 스승을 일컫는 말이지만, 동시에 선우(善友)라고도 번역된다. 이렇게 스승과 벗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스승은 제자에게 벗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같다. 명색이 스승이라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권위주의에 대한 경계를 ‘불청지사’라는 말은 담고 있는 것 아닐까. 벗이 될 때, 비로소 그 스승은 제자와 동
‘정치적’과 ‘정치’의 거리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입학원서에는 7지망까지 학과 이름을 써넣도록 되어 있었다. 제1지망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영문학과. 그 다음 2지망 이하에 대해서는 의논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에게서 메일이 왔다. 매우 조심스럽게 ‘정치학과’를 써놓아도 되는지, 아버지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홍길동전〉에서는, “아들은 아는 데에는 그 아비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지망 후보였던 ‘문화사학과’가 당연히 2지망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정치학’을, 2지망으로라도 선택한다는 데서 큰 부담을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꿈은 꿈이 아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왕사성에 살던 신상(信相)보살은 어느날 밤, 꿈을 꾼다. 꿈 속에서 금북(金鼓)을 본다. 이렇게 금북이 나오기에, 〈금광명경〉을 〈금고경〉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설명 보다는, 직접 읽어보는 것이 더 낫겠다. “그 모양은 지극히 크고, 그 밝음이 두루 비추기를 마치 햇빛과 같았다. 다시 그 빛 속에는 시방세계의 끝이 없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많은 보배나무 아래의 유리좌(琉璃坐)에 앉아계시는 것이 보였다. 한량없는 백천의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부처님들께서는 법을 설하시고 계셨다. 바라문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당목(撞木)으로 금고를 쳐서 큰 소리가 나게 하였다. 그 소리는 ‘참회의 시’를 설하는 것이었다.” 꿈 속의 일이다. 생시의 일
말도 안 되는 소리? 〈금광명경〉이라는 경전은 대단히 생소한 경전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전문적으로 불교공부를 하신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를 제외하면 이 경전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전문적으로 불교공부를 하신 분이라면, 이 〈금광명경〉은 〈금고경(金鼓經)〉으로도 불리우는 경전이며, 우리나라의 원효 스님께서 좋아하셨던 경전이고, 〈인왕경〉과 함께 호국(護國)의 경전으로 떠받들어 왔다는 것, 일본에서는 스님이 되려면 〈법화경〉과 함께 이 경전을 외우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정도이다. 한마디로 여전히 생소한 경전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중요하고 유명하다면, 어찌하여 오늘날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적은가? 많은 사람들
외도(外道), 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불륜을 범하는 것을 외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한 폄칭(貶稱)이었다. 대표적으로 초기경전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등장한다. 불교 이외의 사상가, 종교가 여섯명을 한꺼번에 부를 때 이 말을 썼던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 이외의 가르침은 ‘외도’가 된다. 그러면, 불교는? ‘내도(內道)’가 되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 불교를 ‘내도’라고 부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내 과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 다만 불교 이외의 책들을 ‘외전(外典)’이라 할 때, 불교 책을 ‘내전(內典)’이라 부르기는 한다. 우리의 불교사는 외도, 외전과 어떻게 인연을 맺어왔던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살펴볼 수도
만병통치약은 있는가? 어떤 나라에 의사가 있었다. 어떤 환자가 오든 단 하나의 약만을 처방하는 의사! 그 약은 유약이다. 우유로 만든 약일 수도 있고, 우유 그 자체가 약으로 쓰였을 수도 있겠다. 그 의사에게는 유약이 만병통치약이다. 그러한 의사가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있어야 한다. 왕 역시 어리석었다. 그래서 늘 그 의사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진실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 시절 역시 그랬다. 진실로 의학을 익히고 닦은 의사가 없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은 순간, 그는 하산(下山)을 결심한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의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대뜸 의술을 뽐내는
몸을 느끼는가? 나는 그분을 좀 늦게 만났다. 그 대학의 석사과정 학생들의 논문 중간발표회에서였다. 키가 늘씬하고, 날렵한 모습이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학부장인지, 그 발표회에 사회를 보고 있었다. 중간발표회를 마치고, 회식 자리에서였다. 내 있는 자리로 와서는 말을 걸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날 나는 그 학부의 교수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와 내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내가 인도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것과 그가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원래 헤겔을 했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서양철학에서 불교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좌선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과 불교, 서양철학과 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