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세종 옹정 황제(1678~1735)는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윤진(胤턋)이며, 만주족으로 청 왕조의 제3대 황제이다. 44세에 보위에 올랐고 13년을 재임했으며, 강희 황제의 네 번째 아들로서 건륭 황제의 생부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를 ‘종사(宗師)’라 자처하면서, 원명거사(圓明居士), 파진거사(破塵居士)라는 두 개의 법호를 가지기도 했다. 〈어선어록(禦選語錄)〉이라는 책을 편집 간행해서 전국에 유통하기도 했다. 그는 일생 동안 불교를 신봉했고, 특히 선종에 관심이 많았으며, 태자 시절 몽골 스님인 장가호도극도
파산 명해(破山 明海, 1597~1666)의 속성은 건(蹇)씨이고 사천성의 대죽(大竹)인으로, 명나라 초 대학사인 건의(蹇義) 충정공의 후예이며, 강희5년(1666) 세수 70세에 입적하였다. 그는 불교의 거장으로 시인 서예가이기도 하며, 명말 청초의 중요한 선종의 대종장이다. 〈파산연보(破山年譜)〉에서 보면 19세 때 사천성 대죽현(大竹縣)의 불은사(佛恩寺) 대지율사에게 출가를 했고, 다음해 연복사(延福寺)에서 혜연(慧然) 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웠고, 〈능엄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 ‘개유상주진심(皆有常住眞心)’ 사상은 그에게
청대의 불교는 청나라 순치원년(順治元年, 1644)에서 선통(宣統, 1911)까지 268년간을 말한다. 청대의 불교 정책은 거의 명대의 것을 계승했다. 먼저, 불교의 관리 방면에서 명대의 승관 제도를 따랐고, 수도에 승록사(僧錄司)를 설립해 중앙부서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게다가 승관(僧官)의 직별(職別) 및 명칭도 명대와 다름이 없다. 청대 불교의 각 종파도 역시 명 말의 유업을 계승했으며, 모든 종파 가운데서 선종이 가장 성행을 했고, 다음으로 정토 천태 화엄 율종 법상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청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소수민족이 통치
송대 이후 중국 선종의 흐름은 선교일치 선정일치 특히 삼교일치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선종의 새로운 방향 설정에는 시대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수ㆍ당의 찬란했던 불교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중국인들은 새로운 관점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송대로 접어들면서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고, 이때 불교계도 이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의 발전된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곧 삼교일치라는
문자선은 전대의 선법 기초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 선종이 긴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은 각각의 시대마다 지속적인 창의성과 전법교화나 다양성을 통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한가지의 선법수행에 매몰되지 않고, 또한 정체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늘 새로운 변신을 모색한 몸부림의 소산이라고 여긴다. 이 중심에서 송대 문자선이 형성되었다고 본다.독특한 형식으로 선법을 표현한 문자선은 선종의 근본사상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문자선 역시 선종에서 주장하는 ‘명심견성’과 일치를 이루며, 특히 심성론 수행론 해탈관에서 여전히 선종의 특색을
송명시대는 선종이 범람하면서, 유학자들도 잇달아서 불교의 핵심이론 및 사상을 받아들였다. 특히 전통유학의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의 구축에 대해서 특색을 갖춘 이론 및 사유형태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교적 영향이 컸던 사상체계로서 장재(張載)의 기본론(氣本論), 정주(程朱)의 이본론(理本論), 육구연(陸九淵)·진헌장(陳獻章)·왕양명(王陽明) 등의 심본론(心本論)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주희의 철학적인 이론체계가 가장 완벽하다고 하며, 원대로부터 정주이학(程朱理學)은 관방의 기본적인 의식형태로 정의되면서, 명대에 이르러서는 점점 형
임제선, 홍주선 전통 계승조동종 선법, 화엄과 유사화엄 ‘理事’→ ‘무정불성’ 설 화엄사상에서 진여[理]는 나누거나 분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완정(完整)된 진여본체가 바로 만법(事, 만물)이 체현(구체적 사물의 모양)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법을 또한 진여가 통섭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이러한 사상이 잘 표현된 선종의 게송으로 “청정법신이 널리 무변하고(法身헌淨廣無邊). 천강의 물에는 천강의 달이 있다(千江有水千江月)”고 하는 것은 바로 화엄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법계 사상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법
조동종도 역시 선종의 5가 종파 가운데에 하나이며, 동산 양개(洞山 良價, 807~869)와 제자인 조산 본적(曹山 本寂, 840~901)이 창시했다. 조동종의 도량은 강서성 구강시(九江市) 영수현(永修縣) 운거산(雲居山)의 진여선사(眞如禪寺)이다. 조동종은 8~9세기에 번성을 누렸고, 10~11세기 상반기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1세기 중엽부터 13세기에는 중흥을 하였고 13세기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비록 운문종이 오대에 발흥해 남송 초부터 쇠락하기 시작해서 원대에는 이미 법맥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송대 번성 후 남송 때 쇠락설두에서 보현까지 중흥기다른 종파와 융합 후 쇠퇴 북송 초 선종의 분포를 살펴보면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이 가운데서 조동종이 약간 쳐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간화선을 주장했던 임제종의 대혜 종고를 전후로 해서 조동종과 운문종에서도 걸출한 선사가 많이 배출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웬일인지 임제종의 선법만 전해졌고 그 외 운문종과 조동종의 선사들과 선법에 대해서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 때 잠깐 법안종이 유행을 하기도 했다.송 초 북방지역의 불교
중국불교 불성론 ‘심성’ 중시인도불교 심성론을 기본으로내면의 심리·본성 탐구 강조 인도불교의 불성론은 주로 반야학에서 실상론이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인도불교의 불성론이 추상적인 본체에 치중한 것과 달리, 중국불교의 불성론이 두드러진 점은 심성을 중시한 것이다. 불성론은 초기 경전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사상이지만, 특히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석가모니부처님을 신격화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는 인성(人性, 心性)을 주제로 한 불성(佛性)여래장 법신불 등의 사상적 개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유가사상에서 어떻게 하면 성현이 될 수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불성은 도대체 인성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사회 및 정치문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남북조에 유행한 사부경(유마ㆍ열반ㆍ법화ㆍ화엄), 삼부론(섭대승론ㆍ십지경론ㆍ대승기신론)의 중요한 의제는 모두 불성에 관한 문제이다. 성불은 과연 현세인가 아니면 미래인가, 만약에 ‘불성’이 있다면 ‘본유(本有)인가 시유(始有)인가?’의 문제였으며, 만약에 성불을 한다면 타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자력인가 등의 문제도 포함 되었다.남북조에서 발생된 불성론에 관한 논쟁은 위진 시기의 ‘반야공성’이 유행한
위진 시대에 ‘반야론’이 유행했다면, 남북조시기에는 ‘불성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반야공 사상은 ‘空’을 바탕으로 수립되었고 바로 본질을 깨닫는 것에 치중했기 때문에 비교적 이론이 난해했다. 반면에 불성사상은 ‘有’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론으로 비교적 이해하기 쉬었고,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해서 불성을 인지하거나 찾는 것에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질은 모두 깨달음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결국 이 두 종류의 사상은 선종사상의 양대 축을 이르고 있다.한나라 말부터 유송(劉宋)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반야경〉이 유행했다. 동한(東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