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와불 곁에서 / 박몽구얼마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웠으면천년 동안이나 저렇듯 미소를 지우지 않고 지내왔을까지금이라도 다복솔에 붙어서 우는매미의 날개를 얻어서승천을 거들고 싶다날개가 돋다 만 자리를 자꾸 만지는 나그네에게운주사 와불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일 뿐하늘로 올라가는 게꼭 좋은 건 아녀멀리만 보지 말고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봐미소를 지을 뿐등을 보이지 않는다겨드랑이 사이로 어린 나그네는돋다 만 날개를 찾아다니고……- 박몽구 시집, 〈개리 카를 들으며〉, 문학동네, 2001시를 읽고 나니 내 겨드랑이에도
오래된 사랑/ 이상국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화안하게 피었습니다여기까지 오는데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지나가는 바람에도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그 오래된 사랑을절 기둥에 기대어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감상〉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세 번, 숨이, 칵, 막혔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한 뼘의 희망 / 정용숙경주 불국사 말이지 뒤꼍에 대숲이 있고, 검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는데 뒤란으로 돌아가면 무수히도 많은 돌무덤이 있어, 큰 것이야 고작 한 뼘 반쯤, 작은 것은 새끼손가락만할까고 고만고만한 것들이 짊어진 희망은 크기가 다 같아누가 뒤란을 돌다 무심히 던져 놓은 돌멩이가 먼저 것에 가 앉았을 게야그것은 자꾸만 쌓이면서 돌탑이 되고, 바라는 게 많았던 눈에 돌부처로 보였던 게지이제는 단순히 돌무더기가 아닌 한 구 한 구 부처로 서서 다시 찾은 나를 지켜보고,눅눅하고 어둔 뒤란에서 어깨 가득 가난한 자들이 자꾸
불도 / 조용미금골산 아래 오층석탑을 보고 나와 안치리 소포리 상고야리를 지나면 동백사가 있던 와우리에 닿는다해질녘 날아가는 학에 마음을 빼앗긴 스님이 학을 잡으러 지력산에 날아올랐다가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곳학을 놓친 스님의 가사가 떨어진 곳은 가사도가 되고 장삼이 떨어진 곳은 장삼도가 되고바지가 떨어진 곳은 하의도가, 윗옷이 떨어진 곳은 상의도가발가락이 떨어진 데는 발가락섬, 손가락이 떨어진 곳은 손가락섬이그리고 심장이 떨어진 곳은 불도(佛島)가 되었다가학리나 세방리의 일몰을 만나면 한동안 옛 스님처럼 바다로 뛰어들어 심장을 바다
주목의 환생 / 최두석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곁에 고사한 주목 한 그루, 비록 잎은 없어도 줄기뿐만 아니라 가지도 얼추 갖춘 모습으로 비바람 맞고 서 있었다. 원래 자장이 석가의 사리를 모셔온 뒤 꽂아둔 지팡이였다는 전설과 다시 살아난다는 예언이 오랜 세월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한동안 고사목은 새들의 쉼터가 되었다. 온갖 새들이 날아와 쉬다가 똥 싸고 날아가기를 되풀이하였다. 새똥은 고사목의 텅 빈 몸통을 통과하여 떨어져 쌓였고 그 똥 무더기 속에서 씨앗이 싹을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고 나니 어엿한 주목이었다. 고
경주/ 심재휘가을 경주에게는 불국사로 간다는 버스가 있어서 낙서하듯 몸 하나가 덜컹거려도 긴 이야기가 된다 지나쳐온 정류장들도 기와를 얹은 집 모양을 하고 있다 낯선 길에 내려 찡그린 얼굴을 햇살에 새기면 시월은 몇 층짜리인지 헐리지 않도록 바람 속에 쌓은 돌 그 돌 위에 돌을 쌓으며 좁아져가는 생애가 내 발자국들을 죄다 모아서 석탑 위에 얹어준다 내 이름은 탑이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갈 만하다고하지만 박모의 하늘에매일 조금씩 덧칠해온 얼굴 하나가 붉게 떠서오늘밤에 나는 불국에 이르지 못하고왕릉 곁의 막걸리집에 국물 자국처럼 앉으면경
표정/ 유인서서울역 화장실, 토닥토닥 화장중인 또래의 처녀에게 건네지는 거울 속 여승의 눈빛이 아슴하다 더러는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동성로 현란한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들 보던 밀짚모자 속 어린 여승의 눈빛도 저것이었다 찰나 속의 하염없음예초기가 지나간 풀밭 위의 바람 냄새, 애벌 깎은 나무의 속껍질 냄새, 놋식기의 엷은 쇠비린내, 감기 끝에 돋아난 생비린내, 갓 버무린 겉절이 냄새 같은 사람의 냄새어둑살 내린 직지사 대웅전, 찢어진 파초그늘에서 훔쳐들은 젊은 스님네의 염불 소리도 저 부근에 있었다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
낙산사 홍련암/ 이애리한계령 단풍같이 고운 사람과낙산사 홍련암 대숲 소리 들으러 간다정암해변 조약돌이 동그마니 따라오며홍련암 바람소리를 듣느라 여념이 없다대숲의 바람을 그대 가슴으로 전해 들으니살랑 사랑 바닷바람 사랑 살랑 산들바람절에서 준비한 팥시루떡을 서로 입에 넣어주며한계령 단풍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애리 시집, 〈동해 소금길〉 시로 여는 세상, 2019이애리 시인에게 “한계령 단풍같이 고운 사람”은 누굴까. 누구이기에 함께 “낙산사 홍련암 대숲 소리를 (함께) 들으러” 갈까. (그이는 참, 복도 많겠다.) 그래, 낙산사 홍련
어머니의 은혜-승한 스님께/ 이승하이 세상의 수많은 여인이여자식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은 수많은 어머니여자식 낳으면서 서 말 석 되의 피를 흘린 내 어머니여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 나를 키운 유모여그대들의 은혜로 이 세상이 지탱된다아기를 배어 수호해준 은혜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받은 은혜자식은 낳고서 근심을 잊은 은혜젖을 먹여 기른 은혜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 먹인 은혜마른자리는 자식에게 돌리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온몸을 깨끗이 씻겨준 은혜자식이 먼 길 떠나면 걱정해준 은혜자식을 위해 나쁜 일도 마다않은 은혜끝없이 불
산문일적(山門一適)/ 박규리산어귀에 홀로 사는 할매가 한살배기 천복이를 양자 삼아 데려왔을 때, 산중턱 작은 절 스님이 하, 고놈 참 자알 생겼다 내 아들 하자 내 아들 하자며, 아침 저녁 산책길마다 쓰다듬어도 주고 안아도 준 지 엊그제 같은데매미도 삼복에 지쳐 목이 쉰 여름 한낮느닷없이 천복이가 전화를 걸어서 스님 큰일났응께 후딱 좀 와보소 하길래, 하릴없는 스님 한걸음에 산문 밖으로 달려가니 할매가 아니! 스님이 웬일이라우! 하는 게 아닌가 천복이가 큰일났다는디 무슨 일이오? 물으니, 할매는 그 큰 응덩이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부
공복 산책/ 조온윤걸어가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이걸어가고 있었다하염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한 가지 대답을 만나고 싶었지이봐,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 거지?깨달음을 얻고 싶었지만 글쎄, 이곳은 보리수 아래가 아니고이곳은 사과나무 아래가 아니어서 사과가내 발밑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허기가 생각을 이길 때나는 텅 빈 몸을 채우러 외출하고 있을 뿐이었다거리에는 다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고제 몸을 끊임없이 마르게 하는 것으로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보리수 대신 천막으로 그늘을 치고 그 아래 가부좌를 틀고
연화석재/ 박 준저녁이면 벽제에서는아무도 죽지 않는다석재상에서 일하는외국인 석공들은 오후 늦게 일어나울음을 길게 내놓는 행렬들을 구경하다밤이면와불(臥佛)의 발을 만든다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거나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은 것처럼깨끗한 돌의 발나란히 놓인 것은열반이고어슷하게 놓인 것은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얼마 후면돌의 발 앞에서손을 모으는 사람도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사람도촛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돌도 부처님처럼오래 살아갈 것이다-박 준 시집, ,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