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정성껏 키우다 보니
나도 함께 바르게 살게 돼

좀 더 일찍 불교를 만나 출가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하는데, 아무래도 금생에는 두 아들을 생산하려고 세상에 오지 않았나 싶을 때가 있다. 종진 스님께서〈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라는 책을 선물로 주시던 날, 나는 그 책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저는 아이들이 키운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아이들은 나를 좋은 어머니,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좋은 업, 좋은 인연으로 만났고, 심성이 좋은 그 아이들은 나의 삶을 빛나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인연인가. 회사에 다니면서 영업 파트에 속해있던 남편은 직책상 술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고, 또 술을 즐겨하는 편이기도 해서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남편은 매일 늦어 얼굴 보기 힘들고, 나는 아이들 하고만 있어야 하는 사실과 직면하면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저 남자는 다른 집 아들이고, 나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아이들을 책임지고 반듯하고 좋은 사람으로 키워야겠다.”
그렇게 나에겐 내가 생산한 내 아이들을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고, 그로인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헌신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어린이대공원이나 미술관, 박물관에 데리고 갔다. 나는 그것을 ‘이란의 왕자교육’이라고 불렀다. 나는 내 집을 왕실로 여기고 거기에 사는 내 아들들을 왕자로 알고 키웠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물었다.
“엄마, 사슴은 왜 뿔이 났어?”
“다른 동물들이 습격해올 때 방어하려고 있는 거지.”
“엄마, 사람은 왜 말을 하는데 쟤네들은 말을 못해?”
“엄마, 파란 하늘은 누가 만들었어?”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생각을 하게 하는 거지?”
그들에게 대답을 해주면서 나는 내가 철학자가 되어가는 듯 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음식을 만들고 운동을 했다. 나무로 그네를 만들어 마당에 걸고 애들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여주에 있는 조그마한 종중산에 딸린 밭이 있어서 대추, 살구, 사과나무를 심었고 개나리도 심어 아이들에게 나무 이름도 가르쳐주었다. 틈만 나면 야외로 나가 자연과 함께 했고, 음악회, 미술관도 부지런히 다녔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이들을 위해 투자했다. 여러 가지 운동과 여러 가지 악기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는 것과 더불어 성정이 좋은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순수를 나도 배웠다.
시댁 집안이 단출하였기 때문에 한적하게 살았던 것도 아이들에게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금생이 아니고 전생의 인연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내게 좋은 인연으로 왔고 둘이 싸우지 않고 잘 자랐다.
나는 아이들을 서두르지 않고 키웠다.
전철을 타고 애들과 함께 어디를 갈 때도 아이들이 잠이 들면 “빨리 일어나라” 하고 깨우지 않았다. 한 바퀴를 더 돌더라도 깰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내가 이 약속으로 죽고 사는 일 아니니 만날 사람은 다음에 보면 된다고 생각할 만큼 무슨 일이든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무슨 일을 할 때 애들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어느 여름 날, 외출했다가 큰애는 걸리고 작은 애를 업고 가는데 아이들이 아이스케키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마침 지갑에 차비만 남아 있는 터여서 망설이다가 아이를 잠깐 내려놓고 물어보았다.
“여기서 집까지는 몇 정류장이나 더 가야한단다. 엄마한테는 차를 탈 수 있는 차비만이 있으니 아이스케키를 사먹고 걸어갈까? 먹지 않고 차를 탈까?”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먹고 걸어가자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아이스케키를 사먹고는 천천히 집에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나는 내 의견보다는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어느 날 두 아들의 손등에 시퍼런 멍 자욱이 생긴 걸 보게 됐다. 둘이 싸운 것이다.
소리 내서 싸우면 엄마가 들을 테니까 동생은 형의 손등을, 형은 동생의 손등을 누른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이 내 삶의 거울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더 조심하고 살아야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경전을 보는 것만이 나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선지식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마음을 고르면서 살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인사를 하는 습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재산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문안인사를 드리고, 학교에서 다녀오면 “학교에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제 자리에 놓고 손을 씻은 다음 방을 정리 정돈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오게 했고, 물을 마시고 난 뒤에는 컵을 바로 씻어서 제 자리에 놓게 했고, 식사를 할 때는 “잘 먹겠습니다” 하고 꼭 인사를 하게 했고, 다 먹고 나서는 의자를 식탁 밑으로 반듯하게 집어넣으라고 가르쳤다.
한 동네 사는 어른들께도 인사를 잘하는 것은 기본 예의로 가르쳤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상대적으로 인간의 정신적인 면이 소외되는 것이 사회현실이다. 이런 사회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사회 전체를 보아서도 모두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것은 좋은 인성을 쌓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예의가 사라진 사회는 인간미 없이 삭막하고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모든 사회문제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고 본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얼굴로 만나는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했다. 그러면 인사를 받는 어르신들이 후에 나에게 아이들 칭찬을 해주었다.
“어머 이 집 애들은 어쩌면 그렇게 단정해요? 놀이터에서 놀아도 반듯하게 놀던데요.”
이렇게 덕담을 듣는 것이 바로 불공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덕담을 하는 것도 불공을 드리는 것과 같으니, 인사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공덕을 쌓게 되는 것이 된다.
아이들이 다 성장한 지금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사를 할 때는 꼭 서서 양손을 내리고 발을 붙이고 공손히 해라. 지나놓고 보니까 그게 다 덕이 되더구나. 엄마가 잘 한 건 인사 잘 한 것 밖에 없는 것 같구나.” 인사가 만사의 시작이다.
동국대에서 공부할 때 가끔 출가한지 얼마 안 되는 스님들을 뵙게 되면 꼭 드린 말씀이 있다.
“인사 하나만 잘하세요. 인사 잘하는 스님으로 남으세요.”
인사는 상대에게 몸으로 마음으로 숙이는 것이고, 사실은 그게 진짜 여유다. 교육은 기본예절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선시대 송시열의 글 ‘계녀서(戒女書)’에는 그 기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던 터라 적어본다.

딸은 어머니가 가르치고,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도 글을 배우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교육을 담당한다. 아이를 어릴 때부터 속이지 마라. 심하게 때리지 마라. 글을 가르칠 때는 순서 없이 권하지 말라. 하루 세 번씩 권하여 책을 읽게 하라. 난잡한 장난을 못하게 하라. 사람 보는 곳에서 눕지 말게 하라.

세수를 일찍 하게 하라. 친구와의 약속을 잘 지키게 하라. 불량한 친구와 사귀지 못하게 하라. 제사에 참여하게 하라. 옛 사람의 좋은 점을 배우게 하라. 15세가 지나면 아버지가 잘 가르칠 수 있게 하라. 모든 것을 한 결 같이 교육하면 자연히 바람직한 선비가 된다. 딸을 가르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부디 철저하고 다부지게 교육하라. 놀게 하고 편하게 하는 것은 자식을 속이는 교육이다. 부디 잘 가르쳐라.
평범한 것 같아도 하나하나 새겨보면 아이들을 키울 때 필요한 금쪽같은 조언들이다. 이렇게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바른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아이들을 키웠지만 결국 아이들이 나를 키운 것이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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