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 평소 가르침들
살면 살수록 그 진가 알게 돼

나를 귀한 사람으로 키워주신 아버지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결혼시키고 부모를 여의는 과정을 통해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소매 끝에 답이 있다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난 부처님이니,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을 받은 분은 나의 아버지와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다.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 은사님의 존재는 삶의 부적처럼 든든하고 은혜롭다.
누군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라고 대답하겠다. 아버지는 성품이 소탈하고 너그러우시며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산다고 주위에서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추석만 되면 아이들 추석빔을 장만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아나곤 했다. 어렸을 적 신발, 양말, 옷 등을 골고루 사다주셨던 아버지 생각에 한참 동안은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다.
아버지는 늘 추석 앞에 청명한 날을 골라 문짝을 새로 바르고는 하셨다. 나는 지금도 가을 햇살 아래 드러났던 아버지의 조용하면서도 경쾌했던 몸가짐 하나하나가 선명히 떠오른다.
풀을 쑤어 체로 곱게 걸러 놓으시던 모습, 솔을 준비하여 종이를 다 떼어내고 문살의 먼지를 털던 모습, 질 좋은 문종이를 치수가 맞게 마름질하여 물살에 골고루 풀칠하여 똑바로 부치던 모습, 대접의 물을 입에 물고 고루고루 품으시던 모습, 양지쪽에 세워 말리고 어지간히 마르면 문풍지를 3~4센티미터 정도 여유를 두어 바르고 국화잎이나 단풍잎, 구절초 꽃잎을 붙여 덧바르던 모습.
요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옛 시절의 운치다. 그때는 분무기가 없어 어른들은 냉수로 입을 한번 헹구고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내품으시는 게 무척 신기했었다. 품어내는 물이 햇빛에 반사하여 무지개 같은 색깔이 어느 때 눈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소녀가 되어 나도 입에 물고 내품어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아버지께선 새로 도배한 벽에 이렇게 글을 써 붙이셨다. “1. 부모님 말씀 잘 들을 것 2. 선생님 말씀 잘 들을 것 3. 어른들께 인사 잘 할 것 4.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 5. 공부 잘 할 것
아침마다 아버지가 써놓으신 그 글을 학교 갈 때마다 읽어야 했다. 추석에 도배할 때 잠시 내려지는 것 말고는 일 년 열두 달 붙어있던 저 글을 읽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일상교육이었다. 우리 형제 남매들은 이렇게 써서 붙인 글을 학교 갈 때 가방을 맨 채로 읽고는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들어오고 나갈 때 꼭 인사하는 버릇, 누구를 봐도 공손히 인사하는 버릇을 일찍 아버지께서 익혀주셨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평소에 해주신 말씀을 떠올려보면 지혜가 담긴 말씀이 많았다.
아버지의 말씀들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고,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아이들에게도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다. 친구 집에 토끼풀을 뜯으러 갔다가 너무 늦어 자게 되었다. 집에 전화도 없을 때여서 연락도 하지 못하고 친구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기다릴 텐데,”하고 걱정하는 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벽에 기대지도 않고 밤을 반짝 새우고 다음 날 아침, 집에를 가니, 걱정하셨던 마음은 다 거두시고 “어이가, 밥 먹어라.”라는 말씀뿐이었다. 그 말씀에 그렇게 뜨거운 눈물이 났는데,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똑같이 눈물이 난다. 막내 동생이 아파서 보건소에 데리고 가느라고 “중간고사 성적이 12등 나왔다”고 말씀드리자 “우리 딸이 일등 한 거나 마찬가지다. 동생 간호하느라고 애를 썼으니까.”라고 위로해주셨던 분이다. 나는 야단을 치는 것보다 격려하고 믿어주는 것이 얼마나 상대방을 감동시키는지 아버지를 통해서 배웠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문을 찬찬히 읽으면서 세상과도 소통하고 좋은 글을 읽으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데, 신문을 읽는 습관도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는 다 읽은 신문을 꼭 그날그날 철해놓으셨다. 동네 분들에게 부탁을 받고 무슨 글을 써주시게 되면 꼭 그 내용을 자상하게 말씀해주셨고, 한 번도 말씀을 거칠게 하신 적이 없다. 옛 어른들이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 즉 몸가짐, 말씨, 글, 판단력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았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저 네 가지가 하나도 빠짐없이 훌륭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교육, 사회교육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기본 인성은 가정교육에서 만들어진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정교육의 기초를 튼튼히 해주신 분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데리러 오셨던 기억, 더운 날엔 때때로 돈을 주시면서 “친구들 하고 아이스케키 사먹어라.” 하셨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결혼할 즈음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물으시고 나의 결혼을 결정해주셨다.
“사람은 너무 좋아도 안 되고 너무 싫어도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몇 마디 얹어주셨다.
“집안에 손님이 오면 식사를 했다고 해도 쌀부터 씻어 앉히거라. 약주를 하시는 분이 오시면 상 차리려고 시장에 간다고 지체하지 말고 간단한 음식이라도 빨리 해서 안주삼아 내놓아라. 아무리 상을 잘 차려도 약주를 좋아하시는 분은 약주가 최고대접이다. 그리고 손님이 가실 때는 약소하지만 꼭 차비를 드려야 한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어른이 계시는가, 아이들이 어린 집인가를 살펴서 알맞게 인사 드려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렇게 세세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는지, 참 좋은 교육을 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시집간 딸을 위해 송판으로 조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을 만들어 위에 장판을 깔고 서랍까지 달아주셨다. 나는 그 책상에 앉아 붓글씨를 쓰고 책도 읽었다.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험한 말은 하지 말고 둥근 말을 해라. 귀를 둥글게 열어 놓고 둥근 눈으로 세상을 보다 보면 둥근 삶을 살게 된다. 몸도 따뜻하게 앉고 바르게 앉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아이를 가졌으면 바른 생각, 앉은 자세, 걸음걸이, 식습관을 잘 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버지, 어떻게 이렇게 밝은 면만 보여주고 가셨어요?” 하고 살짝 원망도 해보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운동회를 할 즈음 아버지가 다니러 오셨길래 작은 아이를 아버지께 맡기고 운동회에 다녀오니 어린 아이를 보는 게 얼마나 힘드셨는지 힘든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는데, 아버진 내색을 전혀 하시지 않았던 것도 가슴에 아프게 남아 있다.
다음 날, 2층 베란다에서 “아버지~” 하고 어린애 마냥 손을 흔들어 배웅했던 순간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돌봐주었던 손자들이 이제는 자기 길을 가면서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곤 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셔서 동네 분들께 ‘해보어른’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 사람들이 왜 아버지에게 해보어른이라고 해요?”
“그 말 이상 좋은 덕담이 없단다. 낯꽃이 좋다는 거지. 사람은 낯꽃이 좋아야 해,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이거든. 마음이 한결같으면 얼굴도 늘 웃음꽃이 피어있는 거지.”
세월이 흘러 그 낯꽃의 의미를 알았다. 아버지의 낯꽃을 닮으려고 했고, 이제 아버지께 나의 낯꽃을 피워 보내드릴 차례다. 나의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 세상의 아버지 가운데 아버지이시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랑스러운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남은 세월 잘 살아서 아버지께 꼭 이렇게 전하고 싶다.
“아버지! 낯꽃이 환히 피었습니다.”
“아버지! 얼굴이 환히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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