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보살의 인과이야기

은사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세상 바르게 사는 씨앗 돼


여성성을 일깨워준 은사님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당신은 신사임당이에요.” 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로, 아내로 몸과 마음가짐을 현숙하게 가지도록 해주신 분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오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진정한 도인으로 남아있으며,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분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사랑이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아있을 만큼 선생님은 내 인생에 깊게 새겨져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면,
“내 마음 속에 귀히 여겨 간직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자애요(慈) / 둘째는 검약(儉) / 셋째는 남을 앞서려하지 않는 마음입니다.(不敢爲天下先) / 자애 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고, 검약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으며, 남을 앞서려 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 때문에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은 바로 이런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또래들과 다르게 성숙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상담 교사인 은사님 곁에서 조교처럼 생활하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상담해주던 것을 귀동냥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몸짓을 해야 상대방의 상처를 위로할 수 있으며,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상담이라는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같다.
무용과목을 가르치셨던 은사님은 공부시간에 나에게 칠판에 대필을 시키셨고, 시험지를 채점하게 해서 성적표를 내게 하셨다. 그런 선생님을 나는 무작정 좋아했다. 이국적 용모에 인품이 좋으셨던 선생님은 공부시간에 곧잘 노래도 불러주실 만큼 열린 분이었다.
무용을 전공하신 선생님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을 지내실 만큼 미적 감각이 뛰어나셨고, 지방 학교에 근무하시면서도 자주 서울에 올라오셔서 무용, 음악회 등의 공연 보기를 즐기셨는데, 간혹 제자인 나를 데리고 가주실 때도 있었다. 때로는 티켓도 없이 서울로 무작정 오셔서는 공연 창구 앞에 가서 “제자에게도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데 남은 표가 없을까요?” 하고 물으시기도 하셨다. 로열발레단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할 때도 창구에서 표를 사려고 했는데, 로열석은 너무 비싸고 값싼 좌석은 매진되어서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서울에 올라 오셔서 나를 무작정 데리고 “남은 표 없나요?” 하고 물으시고는 끝내 표를 구하셔서 내 손을 잡고 공연장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던 분이었다.
교실 창가에서 손짓을 하면 상담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은사님이 수업시간에도 불러내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이 통신표 행동발달사항에 “다”를 준 적이 있다. 이 사실을 알고는 선생님께서는 “란아! 만약 이것 때문에 네가 시집을 못가면 내가 책임질게. 이것은 내 책임이다.” 하셨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 선생님은 정말로 중매를 섰다.
“좋은 집안의 아드님이야. 직장도 튼튼하고 부모님도 훌륭한 분들이신데 한번 보지 않을래?”
“아니요.”
“왜?”
“편한 사람한테 갈래요.”
나는 그즈음 지금 남편과 교제 중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고 선생님께서 “그 사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정작 기억이 없는데 그때 내가 “있는 집에 가서 마음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없는 집으로 시집가서 노력하면서 살 거예요.”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선생님께선 전화를 끊고 많이 우셨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 집에 오셨다가 남편을 보시더니, “남편이 귀티가 나네.” 하셨다. 마음이 놓이신 것 같았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셨다.
“남편이 젊어 보이네. 너도 잘 가꿔라.”
딱 한 번, 남편 때문에 속상한 얘기를 했더니 손을 잡으시고는, “신사임당의 남편도 늘 현명하지는 않았어.” 하고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크면서 우리 집에 가끔 오시곤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선생님의 기품과 인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선생님, 춤 좀 추세요.” 하고 권하면 “해야 돼?” 하고 한 번 물으시곤 바로 일어나셔서 아이들 앞에서 춤을 춰 보이셨다. 선생님은 발레를 전공하셨는데, 백조의 호수를 자주 보여 주셨다. 나는 그 어떤 ‘백조의 호수’보다도 선생님의 ‘백조의 호수’를 좋아한다.
결혼 후 선생님은 나에게 이름을 부르는 대신 “이 여사님!”이라고 불러주셨다.
“이봐요. 이 여사. 스타킹은 말이야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요일별로 준비해놓고 신어. 그리고 남편이 어디에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나서요. 그래야 어디든 데리고 다니지.”
남편이 어디를 가자고 하면 바로 갈 수 있게 사계절, 계절별로 옷을 한 벌씩은 준비해놓아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남편이 어디를 가자고 할 때, ‘배가 불러서요, 옷이 없어서요’라는 소리를 절대 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게 행동하고 환경에 맞추어 살 줄 알아야 현명한 사람이며, 이상과 현실이 둘이 아니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걸 미리 가르치신 것 같다.
선생님은 천주교신자였지만 우리 집에서 하는 법회에 오셔서는 법문에 귀를 기울이셨고 남는 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신발도 가지런히 놓아주고 부엌에 놓인 열무도 다듬어 주셨다.
보육원에 봉사를 하러 갈 때도 따라오셔서 몇 가지 헌 옷과 돈을 넣은 봉투를 내밀기도 하셨다. 방학 중에 오시면 법문을 들으셨고 종진 스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도 법문을 듣고서 “다른 사람이 다 다른 곳으로 가서 공부한다 해도 당신은 이 스님을 끝까지 모시고 공부하세요.”라고 말씀하실 만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셨다. 아마도 선생님은 당신의 따님보다 제자인 나와의 추억이 더 많을 것이고, 내가 선생님의 따님 보다 더 선생님을 닮지 않았을까 싶다. 참으로 행동도 예쁘고 모습도 고우셨다.
우리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신다고 오백 원짜리 동전 열 개를 모아서는 아이들 방 앞에서 손을 모으고 나오길 기다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이 그런 사랑을 어디서 받아보겠는가.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움에 목이 멘다.
“엄마가 선생님을 찾아가야 하는데 왜 선생님이 엄마를 찾아오셔?”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물어볼 만큼 선생님은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아이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실 때는 꼭 호박 썰어서 말린 것과 말린 고구마 줄거리 같은 마른 밑반찬을 봉투에 담아오셨다.
학교에 계실 때, 교장실로 찾아가면 운전해준 친구에게 기름 값만큼은 꼭 주시고, 손님들에게 달아주는 비닐 꽃을 달아주시고는 교무실이며 서무실로 다니면서 “서울에서 제자들이 왔어요.” 라고 자랑하셨다.
내가 가정법회를 시작하자 선생님은 내가 제대로 불교공부를 하기를 원하셨다. 어느 날, 서울로 올라오신 선생님은 나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지도자 과정에 등록시켰다. 백팔십만원 정도 하는 등록금을 모두 내주셨다. 나는 선생님 덕분에 제대로 된 불교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남편도 대학원에 다닐 때였고 아이들도 한창 공부할 때였다. 나까지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선생님은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다음 학기부터는 남편의 도움을 받았지만 내 마음 속엔 예쁜 모자를 쓰고 단정한 모습으로 동국대에 나타나셔서는 제자의 첫 등록금을 내주시던 은사님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대학원 공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천주교 신자인데 한 번도 당신의 종교는 강요하지 않으셨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움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배웠다.
그 후 나는 선생님이 하셨던 것처럼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필요한 일을 시작할 때 도움을 주고자 했다. 동국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불교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말을 해서 동산불교대학에 등록시켜드렸던 것도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갚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고교시절, 대학에서 모시고 가려고 해도 “난 중고등학교로 만족합니다.” 하시며 학교를 떠나지 않으시더니,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퇴임하시면서 받으신 선물 중 손목시계를 나에게 채워주셨다. 인생이라는 만행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 분들로부터 하나씩만 배운다고 해도 얼마다 많은 걸 배우겠는가. 은사님은 나의 여성성을 구축하는 데 가장 깊은 영향을 주신 분이다. 며칠 후면 선생님 기일이다. 선생님은 천주교신자이시지만 절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글이 이번 주 신문에 실린다면 기일에 선생님께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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