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에게서 배운 것들
“입은 닫고, 귀는 열고, 마음은 깨어 있으라”

일주일에 하루는 수행의 날로
틱낫한 스님은 일주일 중에 하루를 온전히 ‘마음챙김의 날’로 정해서 그날 하루만큼은 하루의 주인이 될 것을 권한다. 생활이 아무리 절박해도 한 주에 하루를 수행의 날로 정해서 석 달 만 정진하면 삶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화는 가르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세포는 100일이면 바뀐다고 한다. 우리가 심기일전을 바랄 때 백일기도를 하는 데,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아침에 잠을 깨면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고요하고 길게 쉬는 숨에 의식을 모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편안하게 모든 동작을 마음챙김과 함께 해보았다. 소리 없이 고요하게 모든 동작을 하면 저절로 마음이 평안해졌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편안하게 의식을 집중했는데, 평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동동거리거나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어서 어렵지 않게, 오히려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고요해지면 말도 많이 하지 않게 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내면이 더욱 깊어지고 넉넉해짐을 느꼈다. 마음이 고요해지니 맑아졌고 맑아지니 밝아졌고 밝아지니 중요한 것이 보였다.
스님께선 “차 한 잔을 마셔도 지구를 굴리는 축인 양 천천히 차분하게 마시라”고 했다. 마음 챙김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좋은 수행법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일을 할 때도 가족과 대화를 나눌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천천히, 온전히 의식을 집중하는 수행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 한 번도 “빨리 빨리”라는 말을 쓰시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칠어 보이고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나는 아이들과 전철을 탔을 때, 내려야할 역이 가까워졌는데도 아이들이 잠이 들어있을 때는 깨우지 않았다. 어느 때는 한 바퀴를 다 돌고 내린 적도 있었다. 본래 나의 성품도 그러했지만 마음챙김 수행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지구를 굴리는 축인 양 천천히 차분히 하라”하는데 하물며 사람을 키우고 대하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천천히 차분히 한다는 것은 조심한다는 것이고, 조심은 말 그대로 마음을 고른다는 뜻이다.
나는 마음챙김 수행법을 통해 우리가 화를 낼 땐 우리 자신이 ‘분노’이며, 우리가 행복할 땐 우리 자신이 ‘행복’이라는 말씀도, 삶의 순간순간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내 자신의 언행에 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집중력으로 인한 내면의 고요함과 청정한 기운은 내가 처해 있는 일을 더 밝게 볼 수 있게 하고, 이미 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더 깊고 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행으로 인해 잘못된 생각, 좁은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마음이든 물질이든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과 나누고(보시), 다정하고 둥근 말을 하고(애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고(이행),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과 그 일을 함께 나누는(이행) 삶이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내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는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편안하면서도 예민하게 깨어있게 하는 수행이 마음집중이다. 가만히 앉아 호흡을 따라가며 명상을 하니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나는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현존하고 있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한 3일간의 수행
10여 년 전, 틱낫한 스님이 두 번째 방한했을 때 틱낫한 스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참석한 300명의 수련자들과 함께 천안 국립청소년수련관에서 3일 동안 진행되었던 정진시간을 돌아본다.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크게 화제가 되고 있을 즈음이어서인지 책을 읽고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 참석한 나는 화를 푸는 방법을 실제로 가르칠 때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해보세요.”하고 실참을 해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어느 잡지사 사진기자가 그 모습을 찍어 잡지에 실었다.
수행기간 내내 모두 침묵을 지켰던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들과 수행 마지막 날의 순서였던 5계 수계식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계를 받던 장엄한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줄곧 영어로 말하던 틱낫한 스님이 수계식을 할 때는 베트남어로 〈반야심경〉을 외웠는데, 모국어로 독경하시는 틱낫한 스님의 목소리가 참석한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수행의 마지막 날, 일문일답식으로 진행된 법문 시간에 참석자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사람들은 스님을 살아 있는 부처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이렇게 대답했다.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에게서 부처를 찾지 마십시오. 틱낫한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 밖에서 부처를 찾으면 그 끝은 실망입니다. 자기 안에 부처가 있습니다. 자기 안의 부처를 깨달으십시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데 익숙해있습니다. 그렇게 인생 내내 헤매면서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있습니다. 정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거나, 그 어느 때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고향이 바로 정토입니다.”
틱낫한 스님과의 명상수행은 쉽고 단순한 것이었다. 쉽고 단순한 가운데 삶의 깊은 이치가 큰 울림으로 참석자들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참석자들이 스님께 배운 수행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주 소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잊고 사는 것들을 하나하나 일깨우는 연습이었다. 숨쉬기, 걷기, 말하기, 밥 먹기, 웃기 등을 비롯해 컴퓨터하기, 자식 키우기, 듣기, 운전하기, 전화하기 등을 배웠다. 입을 닫기, 귀를 열기, 나를 일깨우기, 부모와 화해하기 등의 수행은 그 동안의 정진을 더 견고히 해주었다.
스님은 낯선 수행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다만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워주는 데 집중했다. 우리가 삶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들을 단지 잃었기 때문이라고 틱낫한 스님은 일깨워 주었다.
틱낫한 스님의 프랑스인 수제자 Peggy 스님이 설법하실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열했다. 새만금 갯벌의 무수한 생물종이 처한 위기를 얘기할 때와 지하철에서 일어난 참사와 그 혼령들에 대해 말할 때 가슴이 미어져 왔다. 프랑스 스님의 애절한 기도가 한반도의 분단에서 빚어지는 고통에 이르러 꼭 통일을 이루라는 간절한 염원으로 이어질 때 조국이 처한 참담한 현실에 듣는 사람 모두가 울었는데, 그날 이후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통일은 중요한 나의 기도 중 중요한 내용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스님의 명상수행의 핵심은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의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며, 지금의 여기란 바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불을 개고 설거지를 하고 길을 걷고, 공부를 하고, 살림을 살고 이렇게 강의를 듣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 끝에 우리가 도달하는 곳도 결국은 ‘지금의 여기’이며, 지금의 여기에 온전히 당도하는 것이 바로 정토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여기’에는 어떻게 집중 할 수 있는가? 스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깨어있기 위해 ‘지금의 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편을 들이 쉬는 숨과 내 쉬는 숨을 잘 알아채고 느끼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배가 불러 오는 것을 잘 바라보고 내 쉬면서 배가 꺼지는 것을 온전히 보십시오. 들이쉬면서 알아채고 내쉬면서 이완하십시오. 들이쉬면서 평화를 이루고 내쉬면서 미소를 지으십시오. 들이쉬면서 발을 내 딛고 내 쉬면서 발바닥으로 대지와 포옹하고, 온 발바닥이 온전히 대지에 접촉되도록 걸으십시오. 숨을 들이쉬면서 내 가슴의 빈 공간을 바라보라고, 내쉬면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보십시오. 숨을 들이쉬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내쉬면서 내 인생에 미소를 보내세요.”
깨어있음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시고 있는 것 같아 메모해 둔 말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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