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원묘지에는 생몰 연대도 없고, 묘비명(墓碑銘)도 없는 다소 야성적인 무덤 하나가 있다. 검은색 화강암 묘지석에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라는 이름만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내가 어디에 묻혀도 후세인들이 나를 발견할 것이다”라고 장담한 철학가 쇼펜하우어(1788~1860)는 과연 그가 예언한 대로 흙 속에 묻힌 후에야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는 묘비명 보다는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기억되기를 바랐다. 독일의 근대 철학가 중에서 사후에 쇼펜하우어만큼 관심과 명성을 얻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이다. 인간의 욕망을 ‘밑 빠진 가죽 부대’라고 부른다. 욕망은 생의 의지로 읽을 수도 있지만, 만족을 모르는 욕망은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감각적 욕망을 행복으로 알고 끝없이 추구하다 결국 죽음으로 끝맺는 그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 〈나귀 가죽〉을 소개한다. 〈나귀 가죽〉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작품으로 철학 소설이자 테제 소설이다. 1831년에 출간돼 발자크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가 극찬한 책이며, 숨을 거두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작품이다. 프로이트가 죽기 전까지도 〈나귀 가
내리쬐는 햇볕을 삼키며 식물은 거룩한 생식(生殖) 활동에 여념이 없다. 육신을 공양하려 땅에 뿌리내린 녀석들의 잔치를 보자니 가관이다. 다랑논 몇 뙈기를 묵힌 지 석삼년째다. 초목이 요동을 친다. 밀치고 쥐어박고 비틀고 휘감는다. 온갖 씨앗이 날아들어 싹을 틔워 서로 지지고 볶으며 세를 과시하더니 급기야 사투까지 벌인다. 공격은 거침없고 방어는 빈틈을 주지 않는다. 누가 자연을 두고 자연스럽다고 찬양하는가. 잡초 무성한 진답(陳畓)에 마음이 마구 뒹군다. 춘분이 지나자 햇볕이 발산하는 에너지의 강도가 점점 높아간다. 하늘의 심부름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서론 인드라망의 철학자, 질 들뢰즈21세기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미셸 푸코의 말처럼,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비명(非命)에 간 천재, 허균(1569~1618)의 불명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의 별호는 교산(蛟山)이다. 고향 강릉의 바닷가에 솟아 있는 교문암(蛟門巖)에서 따와 호를 삼았다. 교산은 ‘이무기의 산’이란 뜻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좌절을 그는 미리부터 예감했던 것일까. 명리학에서 사람의 운명이란 대체로 ‘환혼동각(環魂動覺)’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환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생로병사요, 혼이란 조상의 영혼과 DNA, 그리고 가정교육이며 동(動)이란 그가 태어난
집 떠나 만리 길 헤매다 낯선 마을에 묵는다외로운 혼백 타향만리 성문 안에 갇혔구나고개 들어 푸른 하늘 즐거이 바라보니커다랗고 둥근 달 온 누리에 비추네 - ‘감옥에서 지은 절구 여덟 수’ 중 세 번째 노래이탁오의 절명시다. 이탁오(본명 이지·李贄)는 중국 명나라 후기 사상가다. 도전과 진취 정신이 강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상범으로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도칼은 그의 인생에서 비장한 도구다. 그를 ‘이단’이라고 배척할 때 면도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유관을 벗어던져 이단이라는 악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감옥에서 면도칼로 항
신라 왕실의 불교 정체성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鬘)’이다. 〈승만경〉의 주인공 파사닉왕과 마리부인의 딸로 아유타국에 시집간 승만과 이름이 같다. 사촌언니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다. 덕만은 〈열반경〉에 나오는 ‘덕만 우바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자로 태어난 보살의 이름이다. 선덕(善德)은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을 주재하는 천신 선덕 바라문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신라 27대 왕 선덕(재위 632~647)을 덕만 우바이와 동일시했다면 28대 진덕(재위 647~654)은 부처의 인가를 받아 〈승
‘은둔의 왕국’ 부탄에 도착했다.히말라야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파로 공항은 바람을 가둬 두기라도 할 듯 고요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바람(風)’은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람(望)’을 간직한 채, 골목과 거리와 허공을 쓸고 다녔다. 부탄이란 나라는 ‘신들의 정원’ 혹은 ‘벼락 치는 용의 나라’라고도 한다. 부탄은 히말라야 산맥 한가운데 파묻혀 수 세기 동안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며 대승불교의 전통을 지켜 왔다. 국기에 그려진 용 한 마리가 여행객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공항 밖으로 나오자 원피스로 된 전통 복장인 ‘고’를 단정하게 차
1940년대 미국 소설가로 J. D. 샐린저(1919~ 2010)라는 특이한 작가가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구촌을 휩쓴 상실과 부조리, 히피와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단 한 권의 장편소설로 영문학의 총아가 됐다. 헤밍웨이와 윌리엄 포크너가 일으킨 현대문학의 광풍이 소진된 공백기에 그의 출현은 불가피한 시대적 단면이었다. 샐린저는 작품에 못지않게 그의 인생론과 개인생활이 더 많은 관심을 끈다. 개인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미국문학이 지니는 하급층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종교적 분위기를 지닌
요즘 생활에 여러 가지로 여유가 있으시고 두루 평안하시온지요. 삼가 그리워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저는 예전 같이 지내고 있어 별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집의 동생 혼사의 연길(혼사 날짜)을 드리오니, 신랑의 옷 치수를 적어 주시길 삼가 바랍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고 줄이니 헤아려 주십시오. 혼사 택일은 29일입니다. 사문 경허 재배.伏維際玆靜履起居 候萬裕伏溯 區區無任之至記下故依, 昔將餘何足煩 舍帝家親事 涓吉仰呈 衣製錄視, 伏望耳 不備伏惟 念九日 沙門 鏡虛 再拜(경허연구소 홍현지 박사 제공) 경허(鏡虛, 本名 宋東郁, 184
스즈키 다이세츠의 삶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박사는 1870년 일본의 가나자와(金澤)에서 4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1887년에 이시가와(石川) 전문학교 초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제4고등중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학한 후 19세~20세에 노우토(能登)와 이시가와(石川)의 소학교 고등과 영어교사로 일을 하였다.21세 되던 1891년에 교사직을 사직하고 도쿄의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던 중 가마쿠라(鎌倉)의 원각사 (圓覺寺)로 가서 이마키타코우센(今北洪川)으
지난 봄 김현준 불교신행연구원장이 직접 번역·출간한 〈유마경〉(효림출판사, 2021)을 보내줘 읽게 됐다. 4년여의 긴 기간 동안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코로나19가 아직도 버티고 있는 때 노후의 생사문제에 대해 부처님께서 시의에 맞게 과외 공부까지 시켜주심에 감사드리며 기쁘게 유마거사를 만났다. 〈유마경〉은 〈유마힐소설경〉이라고도 불린다. 부처님과 같은 시대에 북인도의 상업도시 바이샬리(비야리 성)에 살던 재가불자 유마힐 장자가 설법주이다. 유마힐(維摩詰)은 산스크리트어 ‘Vimalakirti’의 한자 음역으로 ‘깨끗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