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보살의 인과이야기

‘내가 주인공’ 긍정적 삶 필요
“부모가 잘해야 자식도 잘해”


지금 여기, 현재에만
파스칼은 “병도 환영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유방암 초기에 수술을 받고 요즘 방사선치료를 받고 있다. 인생의 파도타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사람은 파도타기 속에서 성장해나가지 않는가. 파도가 격렬하게 출렁이며 지나가면 수면이 고요해지듯이 삶에서도 거친 파도가 칠수록 내면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생을 축제처럼, 순례처럼 여기며 살기를 기원한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선에 흔들림이 없으면 된다. 나는 ‘덥다’ 소리, ‘춥다’ 소리를 잘 안한다. 상처에 적당한 약을 써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나는 그때마다 내가 조금 더 성장하는구나, 업을 소멸시키는구나 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그것을 축하한다. 누가 해주길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렇게 선물한다.
가급적 재미있는 일을 만들며 살려고 한다. 순간에 그치는 기쁨이라 하더라도 좋은 업으로 상승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엄마 안 힘들어?”
친구들과 산에 가려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자 아들이 배낭을 달라고 하더니 끈이 짧다며 늘려주었다. 순간 행복한 마음이 조용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행복해야 된다.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아들이 행복해야 집안 자체가 행복해진다. 집에 오면 엄마가 얼굴 한 번 찌푸리거나 한숨을 내려 쉬지 않아야 한다.
인생은 자기가 연출한 무대 위에서 배우로 사는 것이다. 자기가 만족하면 주연 배우가 되어서 엑스트라까지 다 하는 것도 되는 것 아닌가. 만족하면 무대에서 내려와도 즐거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후회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다’는 자기 인식, 긍정이 필요하다. 그게 바탕이 안 되면 영원히 즐거울 수가 없고 남의 것만 구경하다가 마는 것이다.
다음은 <신심명(信心銘)〉에 있는 내용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화통해져 명백히 드러난다.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지극한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순과 역이 있게 하지 말라.”
자주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삶 전부를 지배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또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내며, 이것이 바로 윤회의 바퀴를 돌게 한다.
“지나간 일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기대하지 말며 현재에 사로잡히지 말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
요즘 내 마음속에 있는 잠언이다.

네 덕 내 탓
‘나 혼자 좋은 것’은 행복이고, 나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줄 수 있는 것은 향복의 단계다.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아들이 결혼하기 전, “그 아이 어디가 좋았니?” 하고 물어보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게 좋았어.”
“어떤 배려심?”
“우리 집은 풍족한 집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나를 만나더라. 그게 배려심 아닐까?”
사돈을 처음 만나던 날 그 말을 전하면서 “우리 아들이 어디가 좋다고 하던가요?” 하고 물었다.
“언제 보아도 한결같다고 하더군요.”
앞 뒤 중간이 다 좋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사돈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우리 딸이 살림을 못하는데 어떻게 하죠?”
“옛날에는 유모, 침모, 찬모 다 있었어요. 노후에 제가 할 일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들이 새로운 모성을 만나서 제2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저희들끼리 잘 살면 족할 뿐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며느리를 처음 만나던 날, 며느리가 될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나의 처녀 적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후에 우리 집에 놀러온 예비 며느리를 여동생이 보더니, “너희 엄마 처녀적 모습과 똑같다.”고 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마음이 맑으면 밖으로도 빛이 난다. 며느리를 보니 언어가 반듯했고, 깊이가 있어보였다. 나는 두 아들을 생산하러 이 세상에 왔고, 며느리는 대보살 노릇을 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고 믿고 있다.
상견례 때 “저는 아들 둘을 교과서대로 키웠습니다. 아들이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는 차를 오늘도 타고 왔습니다. 앞으로 사위가 문을 열어주는 차를 타세요.”하고 말했더니 고마워했다.
얼마 전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전문의 되고 나면 엄마한테도 용돈 주고 싶어요.”
“엄마는 비바람만 피하고 밥만 먹으면 돼. 너희들끼리 잘 살면 돼.”
남들은 자식 키워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좀 억울한 얼굴을 하는데, 좋은 일 좀 시키면 좋지 않은가. 결혼 후의 삶은 그 애들의 문제이며 나는 그 애들이 세워놓은 성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실천할 뿐이다.
사돈이 천주교를 믿어서 묵주 두 개를 사서 “열심히 믿으세요.”라는 마음으로 함에 넣었다. 우리 아들을 사돈댁에 선물한다고 생각하고 보냈더니, 그렇게 마음이 가볍고 흐뭇할 수가 없었다.
며느리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가볍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쁘기도 하고 밉기도 한 것이다. 며느리 나이에 나는 무엇을 알아서 제대로 했겠는가 생각하면 아무런 불만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밥을 태웠다. 어쩔 줄 모르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내가 두터운 솥을 샀어야 했는데 밑이 얇은 솥을 사서 네가 밥을 태웠구나.” 하고 미안해 하자, 이번엔 시어머니가 “내가 갓 시집을 왔을 때는 시어머니께서 밥을 해주셨는데 내가 너에게 밥을 시켜서 탔구나. 내 잘못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나무랐다. 이번엔 새신랑이 나섰다. “내가 누룽지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색시가 누룽지를 만들려고 하다가 밥을 태웠으니, 제 탓입니다.”
이처럼 각자 자기 탓이라고 여기면 그 집엔 불화가 없다. 화합은 천신도 찬탄한다고 하지 않는가. 평생 마음공부만 하신 스님들도 돌아가실 때 상좌들에게 “화합하고 살라”는 말씀을 남긴다고 들었다.
“엄마 피곤하시죠? 누워 봐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결혼한 아들이 잠깐 다니러 와서도 그렇게 말하고 어깨며 등을 주물러 주면 족하지 않은가.
며느리는 큰 보살의 삶을 살려고 이 세상에 왔으니 내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이들을 긴 호흡으로 키우면 좋은 인연이 된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부모를 닮는다. 알고 지내는 거사님의 얘기다.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여자 친구가 아이를 가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딸처럼 받아들이세요. 아드님의 여자 친구도 그 집에서는 기가 막힌 딸입니다.”
거사님은 아들의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다가 학교에 다니게 하고, 학교를 졸업을 시키고 아이를 낳게 했다.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니 무슨 운명인지 자신의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아들의 담임이 되어있더라는 것이다.
선생님께 술 한 잔을 내고는 나에게 와서 “우리 부부도 고3 때 아들을 임신해서 부모들의 눈을 피해 고향에서 도망 왔다”고 고백했다. 아들의 일로 심란했던 두 부부가 설악산 봉정암에 가서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는 아들에게 그랬다는 것이다.
“네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보살이 되었겠느냐?”
지나가는 사람에게 귤 하나 건넸는데, 딸이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기에 나가보니 길에서 귤을 건네주었던 사람이 사위감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식들은 엄마가 인욕하고 살아온 세월을 모르지 않는다. 엄마가 인욕하고 산만큼 잘 커준다. 불교를 접하고 나서 보니 우리 집이 수행처이고 극락이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