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기도 통해 타인 존중하는 배려심 배워
“난 천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어머니의 사랑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다. 어머니를 통해 사랑만큼은 원 없이 받으며 컸고, 시집을 와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가끔 스님이나 도반들을 시봉할 때면 어머니에게 빚진 사랑을 되돌려 갚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유모와 침모를 다 데리고 시집을 오실 만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성정이 순진하시고 고전적인 미인이었던 데다가 음식 솜씨가 뛰어났다. 우리들 교육은 아버지께서 전담하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어머니는 그야말로 현모양처였다.
신혼 때는 친정어머니가 같이 시집왔단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몸이 약하고 일도 잘 못하는 딸을 대신해 친정어머니가 살림을 많이 도와 주셨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낳았을 때는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서 애들을 보아주고, 백일 동안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밤중에도 안방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나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재워주셨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면 무조건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어머니가 와 계시면 나는 애들을 맡겨놓고 붓글씨를 배우고 자수를 배우러 다녔다. 시창작을 배우러 문화교실을 찾기도 했다. 내가 가방을 들고 집밖으로 나오면 어머니는 2층 베란다에서 “놀다 와라!” 하고 아이를 안고서 손을 흔드셨다. 그러면서 동네할머니들에게 “이 집 아씨요, 돈 푼께나 쓴 사람이요.”라며 자랑 삼아 말씀하셨다. 어머니 덕분에 어린 아이들을 걱정 없이 맡기고 나를 연마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니, 어머니는 아마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갇혀 사는 딸이 안쓰럽기도 했겠지만,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좋아보였던 것 같다.
그런 어머니가 하루는 “이리 좀 와봐라” 하시더니 물으셨다.
“얘, 매력이 뭐니?”
“매력은 갑자기 왜 물으세요?”
“너희 아버지가 나보고 매력이 없다고 하시더라.”
나는 지금도 심각하게 물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대학 출신의 지성적이던 아버지에 대해 집에서 살림만 하시는 분이 느끼셨을, 그 뭐랄까 낭패감 같은 게 있으셨을 터인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웃어넘긴 것이 지금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남아 있다. 아마 지금 물으신다면 “이 세상 모든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예요.”라고 위로해 드렸을 것이다.
딸네 집에 와서 일하는 것을 오라버니가 싫어한다면서 아들이 딸네 집을 방문할 때면 옷을 차려 입고 안 그런 척 소파에 앉아있었던 어머니다. 어릴 적 겨울, 아침에 학교에 갈 때도 내 운동화만 부뚜막에 따뜻하게 해서 내주셨다. 시집을 와서도 “무를 넣은 갈치조림 먹고 싶어.” 하면 어머니는 식사를 하시다가도 수저를 놓고 갈치를 사다가 만들어주셨다. 입덧이 심해 열 달 동안 누워 있던 나를 위해 어머니는 대추차를 찾으면 대추차를 만들어주셨고, 시금치나물을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금치나물을 마련해주셨다.
어렸을 때는 지나가다가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복숭아를 보면 어머니는 값을 묻지도 않고 껍질을 싹 벗겨서 나에게 먹이고는 “얼마예요?” 하고 값을 치르곤 하셨다. 어머니가 무엇을 하나 궁금해 부엌에 나가면 “어서 들어가.”하고 방에 밀어 넣으시곤 하셨다. 그리곤 동생들을 향해서는 “그 애들은 왜 방에 있느냐?” 하시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몸이 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유난히 사랑을 주셨던 것 같다.
불교를 알고 참회기도를 하면서 뒤돌아보니 다른 자식에 비해 사랑을 너무 받은 것에 대해서 “형제들의 마음이 닫힌 게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어머니의 큰딸에 대한 헌신은 눈물겨웠다. 집에서 귀하게 컸기 때문에 상대방이 귀하다는 것과 남을 대접하는 것을 배운 것 같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알고 나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대를 귀하게 여길 줄 안다. 남편과 부딪힘이 있을 때 “나는 부모님이 그림자 같이 계셨으나 이 사람은 부모님도 안계시시지 않는가”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약주를 즐겨하셨던 아버지가 못마땅하셨는지 가끔 언성을 높이곤 하셨는데, 그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 결혼하고 남편에게 한 번도 목소릴 높여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 가운데 마음 아픈 것 하나가 있다. 결혼 전 남편에게 물었다.
“약주는 얼마나 하세요?”
남편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잘 못합니다.”
그런 줄만 알고 술에 관해 무방비 상태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한 달 뒤부터 마시기 시작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웠다. 애꿎은 어머니에게 나는 “엄마가 데리고 살아. 엄마가 시집가라고 했잖아.” 하고 원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나중에서야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듣고 얼마나 불효막심했는지 깨달았다.
“10년 정도 지나니까 네가 그 소리 안 하더라. 네가 그 소리 할 때마다 내가 죽을 뻔 했다.”
지금도 어머니의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 때문일 것이다. 말수가 적은 편이셨던 어머니가, “너를 대학에 보내려고 등록금을 마련해두었는데, 네가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에 취직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 마음이 무척 아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눈물이 나왔다.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장가보내고 하다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어서 가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자식에게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임을 보여준 분이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과 의사이신 작은 외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 역할을 하셨다. 아들과 손자가 의사의 대를 잇기 바라셨으나 꿈을 이루시지 못했는데, 외손자인 둘째 아들이 의대에 들어가자 기뻐하셨다.
불교에 입문해서 활동하는 딸을 보시고는 큰 외손자에게 어머니는 “재성아, 너는 절대 스님이 되지 말아라.” 하고 걱정하셨다. 큰 외손자가 워낙 순종적이고 착하니까 불교에 푹 빠진 딸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 같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감기 한번, 배탈 한 번, 용돈 한번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3개월 앓으시다 고요히 영원한 잠에 드셨다.
평소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많은 걸 주었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내가 어머니한테 너무 많은 걸 받고 살았다. 손자 재성이가 외할머니에게 매달 10만원씩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시고 나중에 보니 그 돈이 저금통장에 그대로 있었다. 돌아가신 후 유언대로 큰 손자한테 받았던 용돈을 고스란히 주고 가셨다.
술을 좋아하던 남편을 탓하며 어머니를 원망하던 딸 때문에 죽을 뻔 하셨다던 어머니, “놀다오너라” 하시며 딸을 밖으로 내보내 주던 어머니, 무엇이든 먹고 싶다면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시던 어머니께 이 글을 바치고 싶다.

“난 천 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빛이 되고, 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피어나는 꽃 속에 있습니다.
나는 곡식 익어가는 들판이고, 당신의 하늘을 맴도는 새,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 곳에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았는데 나의 뇌리 속에 위의 시 구절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어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재작년 봄, 4월에 온갖 꽃이 화창하게 피어난 날에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내가 써 온 글들은 어머니의 사랑이고 내가 앞으로 쓸 글들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람의 숨결이 되어 흩날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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