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도를 처음 간 것은 1995년 2월 초순이었다. 27년 전의 일로 여행기간은 한 달 간이었다. 인도 비하르주의 부처님 유적지와 수도 델리, 힌두교 최대성지인 바라나시, 영화산업이 발달한 뭄바이 등이었다. 후배 작가 두 사람과 동행했는데 모두가 초행길이었다. 그때 우리는 부처님 유적지에서 아쇼까석주와 아쇼까탑을 발견하곤 했다. 아쇼까석주와 아쇼까탑은 그 자리에 부처님의 성스러운 그림자가 남아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었다.불자인 나는 그때 아쇼까왕에게 고마워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행했던 후배시인 윤제림 작가도
아쇼까왕 일행이 룸비니를 순례한 몇 년 뒤 아상디밋따가 눈을 감자, 정비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띠쉬아락시따가 차지했다. 꾸날라의 아들 삼빠딘은 분노가 치밀었다. 빠딸리뿌뜨라성을 벗어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아쇼까왕이 삼보디 삡팔라나무를 참배하러 갈 때 따라가서 그곳에 정착해 살기를 바랐다. 아쇼까왕은 삼보디 삡팔라나무를 참배하고자 순례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한편, 띠쉬아락시따는 기회가 왔다고 별렀다. 삼보디 삡팔라나무를 아예 없애버릴 적기라고 생각했다. 띠쉬아락시따는 한밤중에 친위대장을 정비별궁으로 불렀다. 어둠
건기인데도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졌다. 빗방울이 굵고 짧은 소나기였다. 소나기가 뚝 멈추자마자 지평선 가까운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목갈리뿟다띳사는 내일 담마사절단들이 각국으로 떠나는데 상서로운 징조라고 생각했다. 빠딸리뿌뜨라 성민들도 하늘이 축복을 내리는 것이라고 환호했다.아쇼까왕은 담마사절단의 활동이 성공하기를 누구보다도 원했다. 그런 바람으로 담마사절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두 가지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하나는 이웃나라 왕들의 환심을 끌어내기 위해 그 나라 지방에 사람과 동물을 치료하는 의료진료소를 지어주었고, 두 번째는 상인들
아쇼까라마가 정화되자마자 목갈리뿟다띳사 수석장로는 외도들의 교설을 논박하는 카타왓투(論事)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목갈리뿟다띳사가 카타왓투를 정리한 까닭은 외도 추방을 일단락 짓고 아쇼까라마에 모인 1천 명의 장로들과 여러 논서를 암송해 결집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전에 붓다의 가르침을 모은 경장과 계율을 모은 율장은 장로들의 합송으로 결집한 바 있지만 논서들은 아직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결집이란 장로들이 모여 붓다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명확하게 말한 뒤 합송하여 추인하는 의식을 뜻했다. 아쇼까왕이 목갈리뿟다띳사에게 말했
목갈리뿟다띳사는 아쇼까왕을 위해 장소를 바꾸어가며 일주일 동안 내내 설법했다. 〈초전법륜경〉에 이어 〈팔정도경〉, 〈무아상경〉 등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암송해주었던 것이다. 마지막 날은 특별히 아쇼까왕이 원했던 바를 설법했다. 목갈리뿟다띳사가 외도 가운데 아지비까 교단의 교조인 막깔리 고살라의 교설부터 설법했다.“막깔리 고살라는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결정론을 주장했으므로 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생사 윤회하는 것은 인과 업보에 의한다고 가르치셨지만 막깔리는 모든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막
빠딸리뿌뜨라성이 보이자마자 목갈리뿟다띳사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아쇼까라마를 떠난 지 7년 만에 보는 성이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일들이 고요했던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강가강 나루터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목갈리뿟다띳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아쇼까라마 정화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말인가.’아쇼까왕이 담마마하마따를 파견해 아쇼까라마를 관리하고 있고, 장로들이 우뽀사타와 빠와라나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외도들이 숨어 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짠드라굽따왕과 빈두사라왕뿐만 아니라 아쇼까왕까지 여러 종
아쇼까왕은 바위나 석주에만 칙령을 공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위 17년부터는 전국의 마하마따 사무소로 왕명이 적힌 문서를 적극적으로 내려 보냈다. 가정을 가진 백성들에게 집 안팎에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도 문서 칙령이었다. 사람과 동물을 위해 길가에 반얀나무를 심어 그늘쉼터를 만들고, 우물을 파라는 칙령을 내린 적은 있지만 집 안팎에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으라고 지시한 왕명은 처음이었다.물론 아쇼까왕은 다섯 그루의 나무를 정할 때도 우빠굽따의 조언을 들었다. 우빠굽따는 순례자였으므로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대
아호강가는 강가강 북쪽 야무나강 안쪽에 있는 마투라 지근거리에 있었다. 마힌다는 마투라 동쪽 나루터에 상선이 멈추자 몇몇 상인들과 함께 내렸다. 멀리 언덕 같은 야트막한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힌다는 한눈에 숲이 울울한 그곳이 아호강가산(山)이라고 짐작했다.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야무나강 강변 들판의 널따란 밭에는 사탕수수가 웃자라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옆에는 거친 풀을 뜯는 염소 떼들이 어슬렁거렸고, 도랑을 흐르는 물줄기가 돌돌돌 소리치며 흘렀다. 마힌다는 갑자기 베디샤나가르에 머물던 시절이 그리웠다. 산치 언덕이 가까운
아쇼까왕은 보드가야에 있는 호위부대 조장에게 지시했다. 아쇼까왕의 지시란 추나르 사암 채석장으로 가서 가능한 한 석주를 많이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암 채석과 석주 공정(工程)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주 한 개의 크기는 장대했다. 거대한 사암 덩어리에서 고작 석주 한두 개가 나오면 다행일 정도였다. 석주 한 개의 길이가 건장한 군사 걸음으로 22보쯤 되고, 밑둥 지름이 성인 팔로 한 아름, 꼭대기 지름이 1보 반쯤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춘 사암 덩어리를 채석했다고 하더라도 또 석공의 작업장까지 운반이 녹록치
담마 칙령을 새길 거대한 석주를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해야 했다. 즉위 10년에 빠딸리뿌뜨라에서 보드가야까지 석주를 운반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아쇼까왕은 거리와 석질을 고려한 최적의 사암 채석장을 찾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아쇼까왕이 어느새 왕사 대접을 받고 있는 우빠굽따에게 말했다.“장로시여, 지난번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석주를 옮기느라고 너무 고생했소.”“대왕님이시여, 군사와 백성들이 고생한 것은 사실입니다.”“그 석주는 빠딸리뿌뜨라 근교 어디에서 캔 사암이었소?”“아닙니다. 바라나시 부근 추나르 채석장에서
보드가야 순례에서 돌아온 아쇼까왕은 한동안 붓다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그 자리의 삡팔라나무를 잊지 못했다. 과거의 왕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몹시 흡족해했다. 할아버지 짠드라굽따왕이나 아버지 빈두사라왕은 순례보다는 사냥이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 왕궁을 나섰던 것이다. 아쇼까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앞으로 나는 순례하는 동안 담마의 실천자로서 사문이나 브라흐민들을 만나면 보시를 하리라. 늙은이나 가난한 자들에게도 보시를 하리라. 백성들을 만나면 담마를 알리고 담마의 근본을 얘기하리라.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테니까. 어떤 즐거움도
아쇼까왕 순례일행은 아쇼까왕의 지시로 삡팔라나무 앞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붓다가 깨달은 이후 7일 동안 삡팔라나무 밑에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었듯 모두들 임시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기쁘게 밤을 새웠다. 다만 단 한 사람 띠쉬아락시따 왕비만 시녀를 데리고 임시숙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임시숙소에 든 그녀가 시녀에게 투덜거렸다.“차가운 안개 속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니?”“두터운 숄을 두르면 돼요.”“숄을 두른다고 추위가 가시겠니? 나는 피곤해. 잠을 편하게 자야 돼. 그런 곳에서 밤을 새우는 대왕님을 이해할 수 없어.”“아상디밋따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