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청나라 선종 역사

교리와 사상 체계 큰 발전 없어
청말 선종, 사회적 영향력 부재
각종파와 융합거치며 자태잃어

청대의 불교는 청나라 순치원년(順治元年, 1644)에서 선통(宣統, 1911)까지 268년간을 말한다. 청대의 불교 정책은 거의 명대의 것을 계승했다. 먼저, 불교의 관리 방면에서 명대의 승관 제도를 따랐고, 수도에 승록사(僧錄司)를 설립해 중앙부서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게다가 승관(僧官)의 직별(職別) 및 명칭도 명대와 다름이 없다. 청대 불교의 각 종파도 역시 명 말의 유업을 계승했으며, 모든 종파 가운데서 선종이 가장 성행을 했고, 다음으로 정토 천태 화엄 율종 법상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소수민족이 통치했던 국가이다. 청나라 정권이 중원 땅으로 입관(入關)하기 전에 청나라는 대체로 살만교(薩滿敎)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들은 중원 땅에 입관한 후에 비로소 중국 사람들의 종교 신앙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청나라 세조인 순치황제를 시작으로 선종의 선사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면서 중국 선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순치황체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이 죽자 너무 무상함이 절실해서 출가를 결심하고 머리를 삭발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모친인 효장황후가 급히 남방의 임제종 선사인 옥림 통수(玉林 通琇, 1614~1675)를 궁전으로 모셔와 출가를 만류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순치황제는 일찍이 “짐은 장차 문교를 일으키고, 유술을 숭상할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순치황제가 유교를 숭상하고 문교를 일으킬 때, 비로소 선종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그가 먼저 선종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 것은 감박 성총(벱璞 性聰)으로부터이다. 감박 성총은 순치황제에게 선종의 역사 및 분포 정황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해주었다. 그로 인해서 순치황제는 선종에 대해서 크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순치황제에게 전국의 유명한 고승들의 명단을 알려주었고, 순치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북경으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는 조서를 내린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남의 임제종 선사인 옥림 통수를 중용하였다. 또 순치황제가 참선을 좋아해서 승려들과 공안 화두를 참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순치황제의 아들 강희황제(聖祖)는 비록 선종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선승들과 왕래가 있었다. 또 그는 일찍이 명대 임제종의 선승인 비은 통용(費隱 通容, 1593~1661)이 저술한 〈오등전서(五燈全書)〉의 서(序)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청대의 황제 가운데 선종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아는 황제는 옹정제(雍正帝)이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짐이 소년시절에 내전을 열독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오직 사모(동경)한 것은 불사일 뿐이다. 모든 공안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해로(解路)로써 깊이 탐구해 보았지만, 마음으로 선종을 경시했다. 이른바 여래 정교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청대의 사료서인 〈동화록(東華錄)〉에서 그는 스스로 “정미롭게 이학(理學)의 근원을 탐구하고, 성종(性宗)의 이치를 철저하게 연구를 했다”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한가로울 때 승려들과 더불어 내전을 담론하였다”고 했다. 이같이 그가 선종에 대한 태도는 선종은 여래 정교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선종의 송고공안(頌古公案)에 대해서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선종의 전적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는데, 그의 결론은 “설사 어록을 방치할지언정, 다시는 재차 20년을 열람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면서, “짐이 열독한 〈지월록(指月錄)〉, 〈정법안장(正法眼藏)〉 〈선종정맥(禪宗正脈)〉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의 책은 고덕들의 기연어구(機緣語句)를 가린 것일 뿐 모두 복잡하고 이치에 어긋난다”고 했다. 그는 〈어제간마변이록(禦製揀魔辯異錄)〉에서 선을 바라보는 관점을 분명히 하였는데, 즉 한월 법장(1573~1635) 계통의 선어를 매우 싫어했고, 밀운 원오(密云 圓悟, 1566~1642) 계통의 법어는 칭찬하였다. 이외도 그는 〈어선어록(御選語錄)〉에서 그가 이해한 관점에서 역대 선사들의 어록과 저작을 선택해서 평론하기도 했다.

그림, 강병호

 

선종은 명나라 말엽까지도 계속해서 흥성하는 분위기였으며, 청나라 초에도 그러한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사대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총림으로 눈을 돌리거나, 혹은 현실에서 도피해서 스스로 유유자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조는 민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때의 선종은 새로운 교리체계 및 사상체계를 창조하지도 못했다. 다만 선적(禪籍) 정리와 예술 방면에 약간의 창작이 있기는 했다. 예를 들면 선적 방면에서 적지 않은 승려들이 선종에 관한 등사(燈史)를 저작했고, 선화 방면에서 보하(普荷)ㆍ점강(漸江)ㆍ팔대산인(八大山人)ㆍ곤잔(筒꽥)ㆍ석도(石濤)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이들이 그린 선화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서도 점강(漸江)ㆍ팔대산인(八大山人)ㆍ곤잔(筒꽥)ㆍ석도(石濤) 등은 선화 방면에서 청초의 4승(淸初四僧)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청 초의 선종은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명 말엽 청 초의 선종은 본래 강남을 위주로 발달하고 있었으며, 대략적으로 종파는 임제종 계통의 천동계(天童系)와 반산계(磐山系), 조동종 계통의 수창계(壽昌系)와 운문계(雲門系)가 유행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광동성 복건성의 선종은 강서(江西) 절강(浙江)지역의 유행 추세를 뛰어넘었다. 북경의 선종은 완만하게 발전하였는데, 그 원인은 북경에는 각종 종파의 사원이 집중되어 있었고, 청나라 황실은 라마교를 신봉하면서, 중국(漢族)사원은 대부분 개인 위주의 경영을 하다 보니 발전 속도는 라마교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 동북지방의 선종은 거의 영향력이 없었으며, 어떤 선승들은 동북지역의 신도들이 특별한 요청을 하면 전법을 했다. 이외도 사천성 협서성 등 지역에서도 약간의 선승들이 전법활동을 하였으며, 발견된 비문에 보면 임제종 조동종이 균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파촉(巴蜀, 중경)과 서남지역(운남 귀주)은 파산 명해(破山 明海, 임제종) 계통의 지파(支派)가 가장 많이 발달했다.

명 말 임제종과 조동종의 분포를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임제종의 천동 밀운(天童 密云)계ㆍ한월 법장(漢月法藏, 1573~1635)ㆍ비운 통용(1593~1661)ㆍ목진 도서(木陳 돛, 1596~1674)ㆍ파산 명해(破山 明海, 1579~1666) 등 네 지파가 가장 번성하였다. 이 가운데 파산 명해는 사천성 일대에서 임제종의 지파로 이름을 떨쳤다. 이외도 각 지파의 법을 이은 제자들이 각처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반산 천은(磐山 天隱) 계통은 약암 통문(漲庵 通問)과 옥림 통수(玉林 通琇)가 유명하다.

조동종은 수창계(壽昌系)와 운문계(雲門系) 두 지파가 비교적 중흥했다. 중원 땅에 청나라가 입각하고 나서. 수창계는 무명 혜경(無明 慧經)의 법제자인 박산 무이(博山 無異)ㆍ영각 원현(永覺 元賢)ㆍ회대 원경(晦台 元鏡) 등이 각각 명성을 떨쳤다. 이 가운데 박산 무이가 강서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참선 경어(꽝淋쒸刀)〉를 짓기도 한 선사이다. 그의 문하 제자들이 영남(嶺南)과 강북(江北)에서 선법을 전하기도 했다. 운문계는 담연 원증(湛然 圓澄) 이후 그 세력이 매우 흥성했으므로, 당시 이 지역에서 활약했던 임제종의 천동계와 고하(高下) 및 상하(上下)를 비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담연 원징 문하에 몇몇 뛰어난 선사들이 선법을 펼쳤으며 청 초까지 대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명대 이후 선종의 각파 선승들은 경쟁적으로 등록 세보(世譜)를 지었다. 이러한 풍토는 청대에도 이어져서 더욱더 유행했다. 청대에 찬술된 〈전등록〉과 승사(僧史)는 적지 않은 저작이 남아 있다. 청나라 초에 선종의 풍토는 대부분 선사가 개당설법하거나 혹은 선사가 입적하면 그 문하의 문도들이 그에 관한 행장 및 흩어진 어록을 수집하고 집록해서 출판을 하였다.

한편 청대의 옹정제가 선종에 개입하고 개조한 후에, 청대의 선종은 명나라 말엽부터 간화 공안에 대해서 제멋대로 하던 선풍을 강습(講習)이라는 풍조로 전환하였다. 그 후 청대의 사상에 대한 전제(專制)에 따라서 선종의 운명은 더욱 쇠퇴했으며, 청 말에 이르러서 선종은 이미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도 없었고,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더욱이 기타 종파 간에 서로 합류를 하면서, 선사들 대부분 참회기도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회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거사가 많았고, 게다가 그들은 적지 않은 불교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들은 교리에 관해서 깊은 연구를 하였는데, 선종에 관한 것만이 아니고 각 종파의 교리를 선택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러한 현상이 또한 선종을 몰락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선종이 청대에 이르러서 쇠락한 것은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즉 천하가 나누어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합한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나누어지기 마련(天下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고 했듯이, 세월의 부침 속에서 선종의 흥망성쇠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겪었다고 하겠다. 때문에 중국 선종의 형성은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인들의 눈높이 맞게 그들이 소화한 불교의 진수를 중국인들의 실제 상황과 현실에 맞게 수립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청대의 선종이 시절과 함께 침체를 맞으면서 몰락을 가져왔지만, 선종의 몰락은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서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선종의 본래 임무는 활발발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자세로 자성을 개발하고, 임운소요 자연무위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종은 이러한 생명력을 잃어갔고, 시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수행법도, 새로운 사상적 내용도 창조하지 못하면서,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각 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서, 때론 선종의 역할이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러서는 근본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새로운 안목을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대에 순응하게 되면서 심지어는 자기의 본래 색깔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몇몇 걸출한 선사들이 선종의 재흥을 꿈꾸어 보았지만, 청 말의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종자는 있지만 부화하지 못한 종자로 남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청 말의 선종은 결국에 각종 종파와 융합을 거치면서 거의 본연의 자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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