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송대의 운문종

송대 번성 후 남송 때 쇠락
설두에서 보현까지 중흥기
다른 종파와 융합 후 쇠퇴

 

북송 초 선종의 분포를 살펴보면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이 가운데서 조동종이 약간 쳐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간화선을 주장했던 임제종의 대혜 종고를 전후로 해서 조동종과 운문종에서도 걸출한 선사가 많이 배출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웬일인지 임제종의 선법만 전해졌고 그 외 운문종과 조동종의 선사들과 선법에 대해서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 때 잠깐 법안종이 유행을 하기도 했다.

송 초 북방지역의 불교계는 법상종 화엄종 및 율종이 가장 영향력이 있었으며, 승려들을 관리하는 최고의 기관인 좌우가승록(左右街僧錄)에서 책임자 승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종파도 위에서 언급한 3종파의 교학 계통의 고승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파들은 이론 혹은 명상 개념이 번다하고 의리(義理)가 깊고 심오하였고, 특히 율종은 세밀한 계율규정 및 금계 등으로 인해서 당시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때 천태종과 선종은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 신속하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선종은 자수자오(自修自悟)를 중시하면서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독특한 수행법을 제시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목을 집중시켰고, 날이 갈수록 유가 사대부들의 주목과 환영을 받았다. 특히 당시의 황제 및 조정의 정관계 대신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황제로서는 진종(眞宗ㆍ997~1022)과 인종(仁宗ㆍ1022~1063)이 전후로 해서 선종을 지지하였고, 선종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전파해 나아갔다.

운문종은 오대 시기에 광동성 소주(韶州ㆍ현재의 광동성 乳源縣)에 위치한 운문사의 운문 문언(雲門 文偃ㆍ864~949)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운문 문언이 소주 운문산 광태선원(韶州 光泰禪院)에서 오랫동안 주석했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따라서 운문종이라고 칭한다. 운문종의 종조(宗祖)가 되는 운문 문언은 청원 행사의 계통이다. 운문종은 오대에 발흥해서 송대에 번성하였으나, 남송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원나라 초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법맥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운문종은 오대십국 가운데 광동성 광주에 수도를 정했던 남한(南漢) 정부의 지지를 기반으로 매우 흥성했으며, 대각선사(大覺禪寺)가 운문종의 종찰이다. 이 사찰이 운문산 자락에 있어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운문사라고 부른다.

오대로부터 북송 초의 태조(太祖) 태종(太宗) 때가 운문종의 발전사에 있어서 비교적 영향력이 컸던 시기이다. 북송의 운문종은 북송 초 운문의 제자인 2~3세를 거치면서 신속하게 전파를 하였고, 운문 문하에 4~6세 시절에 대체로 송 인종(仁宗) 중엽에서 휘종(徽宗ㆍ대략적으로 11세기 중엽에서 12세기 초) 초기까지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송 휘종(徽宗) 이전에는 운문종과 임제종이 쌍두마차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선종 가운데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두 종파였다. 운문종은 영남의 북쪽을 향해서 점차로 확장해갔다. 이때 많은 영향력 있는 선사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대체로 운문 문하의 제3~4대의 제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 원통 거눌(圓通 居訥)과 거산 요원(居山 了元ㆍ1032~1098)은 절강성과 강소성 일대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전파했고, 설두 중현은 당시 명주(현재의 절강성 영파)의 설두산을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했는데, 영향력이 매우 커 그를 가리켜 “운문 중흥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운문종의 걸출한 선사로서 불일 계숭(佛日 契嵩)을 들 수가 있는데, 그는 비단 운문종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불교사 및 선종사에서도 길이 남을 걸출한 선사이다. 그를 일대효승(一代孝僧)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동시에 불유일치(佛儒一致)인 유석(儒釋) 융합론을 주장했다. 특히 유학자들의 배불 관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가와 유가의 같은 점 다른 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논리적 체계를 바탕으로 유학자들의 배불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 책을 저술을 하기도 했다.

그림, 강병호

 

이때 운문종의 유명한 선사로서, 〈오등회원〉에서 보면, 익주의 청성향림원(靑城香林院)의 향림 징원(香林 澄遠ㆍ908~987), 양주(襄州)의 동산 수초(洞山 守初ㆍ910~990), 정주(鼎州) 덕산의 원명 연밀(圓明 緣密), 수주 쌍천산(雙泉山)의 사관명교(師寬 明싱), 소주 백운산의 자상 실성(子祥 實性) 선사 등이 있다. 이외도 운문 문하에 유명한 선승으로, 4세인 불일 계숭, 천의 의회(天衣 義懷), 원통 거눌, 육왕 회련(育王 懷璉), 거산 원료, 5세인 혜림 종본(慧林 宗本), 법운 법수(法雲 法秀), 6세인 법운 선본(法雲 善本), 법운 유백(法雲 惟白)등이 있다. 이들 일부는 각지의 형세가 뛰어난 지역의 사찰에서 선법을 전파했고, 혹은 이들 중 일부는 황제의 명에 의해서 경성 황가의 사원에서 주지를 맡기도 했다. 또 당시 중앙정부의 관료나 지방에서 군사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대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불교학자인 양증문 교수는 이 시기를 운문종의 발전사에서 가장 흥성한 시기에 진입한 때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후 운문종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운문종에서 비교적 유명한 선사로서는 7세인 설봉 사혜(雪峰 思慧), 설봉 종연(雪峰 宗演) 등의 인물이 있다.

이들 제자 가운데 비교적 흥성했던 제자들은 원명 연밀, 사관 명교, 향림 징원, 동산 수초 등이며 그 중에 상수 제자는 향림 징원이다. 그는 학인을 제접할 때 완전하게 운문 가풍으로 인도를 하였으며, 향림 징원의 문하에 지문 광조(智門 光祚)가 있으며, 지문 광조의 문하에 전법 계승자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 귀에 익숙한 설두 중현이 있다. 또 설두 중현→연경(延慶)→자영(子榮)→남화(南華)→보연(寶緣) 등이 활약했던 시절을 운문종의 중흥시기라고 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운문종은 북송 시기에 한 때 크게 성황을 이루었지만, 기타 종파와 서로 융합하기 시작하면서 운문종의 색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운문종의 흥성은 대략 200여 년 동안 이어졌으며 매몰된 주요 원인은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고, 평가도 또한 엇갈리지만, 그 가운데서도 “날카롭고 험준하고(機鋒險絶), 사려(의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不容擬議), 통할 길이 없으며(無路可通) 상근자가 아니면 오입(悟入)을 하기 어려운 연고”라고 했다. 운문 문언의 선법사상의 총체적인 관점은 화엄종의 ‘도(道)’가 ‘성(性)’에 두루하다고 하는 관점을 기본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이재사사(理在事事ㆍ이가 사사에 두루하다)와, 사사구리(事事具理ㆍ사사에 이를 구비했다)이다. 즉 이사무애(理事無킟)의 관점을 관철한 것이다.”라고 했다. 즉 〈화엄경〉의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를 바탕으로 한 ‘법신설’과 대동소이한 사상이다.

다음은 몇 가지의 운문종의 종풍을 살펴보겠다. 먼저 운문송삼구(雲門頌三句)를 살펴보면, 운문종의 종풍은 험준(떳峻)하며, 간결하고 명쾌한(簡潔明快)것으로, 의도(사려)하지 않는 방법으로 참선자의 집착을 파제(破除)해서, 자심을 돌이켜보는 것이다(返觀自心). 운문종은 임제종과 같이 봉활준열(棒喝峻烈ㆍ봉활로 준열히 꾸짖다)한 것과 같지 않고, 또한 조동종과 같이 정영면밀(丁寧綿密ㆍ주도면밀, 정밀하기를 부촉한다)한 것과도 같지 않다. 그러나 “격렬언사(激烈言辭ㆍ치열 맹렬 극렬한 언사)로, 미망한 사람들을 위해서 식정망식(情識妄想ㆍ중생의 번뇌 망상)을 소탕하게 하는 것이다.” 〈인천안목(人天眼目)〉에서 운문종의 선법을 개괄하기를 “운문종지는 중류를 절단하고, 의도를 용납하지 않으며, 범성의 길이 없고, 정해(情解)로는 통할 수 없으며… 높이 우뚝 솟은 험준한 산과 같아서 사람들이 함께하기가 어렵다”고 평했다. 즉 운문종은 용준(聳峻ㆍ높고 험준하다)하고, 기용이 신속하고(機用迅疾) 의도를 용납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선림에서 왕왕 운문종을 ‘운문천자(雲門天子)’, ‘운문일곡(雲門一曲)’이라고 운문 종풍을 표현하고 있다. 운문곡(雲門曲)은 원래 화하고곡(華夏古曲ㆍ중국고대 곡)으로 곡절(曲調ㆍ가락)이 매우 깊어서 부르기가 매우 어려우며, 듣는 자도 또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림에서 운문종의 종풍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운문종의 학인들도 마치 천자의 신칙과 같아서, 한번 만기(萬機ㆍ국가 지도급의 정무)를 결정하면 다시 물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에게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운문천(雲門天)’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은 운문삼구(雲門三句)이다. 운문 문언이 대중에게 “함개건곤, 자기수량, 불섭만연”이라고 했는데, 대중이 대답이 없자 스스로 답하기를 “한 번에 삼관을 뚫어야 한다(一鏃破三關)”고 하면서 “함개건곤(函蓋乾坤)은 절대적인 진리가 천지지간에 두루 펴져 있으며, 전체우주를 덮었으며, 목기수양(目機銖兩)은 스승이 학인들의 번뇌 망상을 단제해서, 언어문자를 초월해서 학인들의 내심을 돈오하게 하는 것이며, 불섭만연(不涉萬緣)은 스승이 근기에 응해서 설법하는 것과 활발하고 걸림이 없는 교화제도를 시설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 운문 문언의 삼구를 바탕으로 덕산 연밀(圓明 緣密)이 다시 정리를 해서 함개건곤(函蓋乾坤), 단제중류(裁斷衆流ㆍ중류를 단제한다), 수파축랑(隨波逐浪ㆍ물결을 따르고 물결을 쫓는다)을 만들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덕산삼구(德山三句)라고 한다. 운문삼구를 사람들은 습관상 운문검(雲門劍), 취모검(吹毛劍)이라고 칭한다. 실제로 운문삼구는 하나의 유기적인 총체로서 내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을 나누지 않는다. 운문삼구는 매구마다 모두 동등한 의의(意義)의 중요함을 갖추고 있다.

그 다음으로 운문8요 (雲門八要)이다. 운문종은 8가지로 학인을 제접하는 특징이 있다. 곧 玄·從·眞要·奪·或·過·喪ㆍ出이다. 즉 ①현(玄)은, 운문종의 종사가 운문종의 스님들을 교화하는 방식이 현묘(玄妙)하기 때문에 언어사량으로 측량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②종(從)은 학인들을 근기와 역량에 맞게 교화하고 가리키는 것이다. ③진요(眞要)는 불도(佛道)에 입각해서 종지(宗旨)를 드러내는 것이다. ④탈(奪)은 학인을 응대할 때 조금의 의도적 예견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⑤혹(或)은 운문종의 종사는 언어에 구속받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학인들을 교화 제도하는 것이다. ⑥과(過)는 학인을 다루는 방식으로 매우 엄격하고 학인들이 전신(轉身ㆍ몸을 돌려)으로 회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⑦상(喪)은 학인들에게 그릇된 견해를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하나는 자심본성(自心本性)을 철오할 수 없다는 견해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집착하는 견해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⑧출(出)은 자유롭게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채택해서 학인들에게 계오(契悟)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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