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자선 및 분양선소

불립문자 → 不離文字 변화
사대부 문인 선법에 큰관심
인쇄술 발달로 문자의 보급
분양선소가 창시한 ‘문자선’

문자선은 전대의 선법 기초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 선종이 긴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은 각각의 시대마다 지속적인 창의성과 전법교화나 다양성을 통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한가지의 선법수행에 매몰되지 않고, 또한 정체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늘 새로운 변신을 모색한 몸부림의 소산이라고 여긴다. 이 중심에서 송대 문자선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독특한 형식으로 선법을 표현한 문자선은 선종의 근본사상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문자선 역시 선종에서 주장하는 ‘명심견성’과 일치를 이루며, 특히 심성론 수행론 해탈관에서 여전히 선종의 특색을 보존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의 시대적 추세를 벗어나지 않은 융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흡수하고 각색한 결과물이다. 송대는 이미 선교일치는 물론 삼교일치가 이미 사회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시류는 시대적인 현상으로 불교계도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송대 이학의 사회적 발전과 영향은 유교의 부흥을 노리는 사대부 문인들의 심리적 상태를 더욱더 고무적으로 만들었고, 아울러 유교적 정책이 심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삼교융합의 기치는 시대를 아우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불교는 물론이고 선종 또한 생존의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때문에 북송의 문자선은 시대성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북송 시기에 문자선이 흥기하기 시작한 이면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이 존재하지만, 주요한 요인으로는 내외적으로 공통적인 분모가 작용했다. 내부적으로는 선법 사상이 계승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시대적 변화에 대한 부응으로 ‘불립문자’에서 ‘불리문자(不離文字)’라는 변화이다. 즉 공안을 기초로 새롭게 모색되어진 선법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당시 선사들의 선학에 대한 조예 및 문화적 소양 등도 한몫을 했다. 외부적으로는 국가의 정책적인 것과 맞물리면서, 사대부 문인들의 선법에 대한 관심과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언어문자 보급의 추진력 등이다.

문자선을 대표하는 선사로서 분양 선소(汾捺 善昭) 설두 중현(雪注 重鞫) 원오 극근(途悟 克勤) 혜홍 각범(慧洪 얾范) 등의 인물이 있다. 문자선은 북송 시기 선종의 기본 형태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시대를 대표했던 선종 발전의 주류이기도 했다. 문자선은 선종의 취지 견해 정서 경계 전법 풍조 등을 문체의 형식을 빌려서 언어문자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문자선은 다른 말로 ‘요로선(훈路淋)’이라고 하기도 하며, 대별(代깎) 염고(拈古) 송고(頌古) 평창(評唱)으로 중요한 표현형식을 취하면서, 뜻은 선법 사상을 찬술하는 것이다.

분양 선소(汾陽 善昭ㆍ947~1024)는 임제종의 선사로 공안 및 송고(頌古)를 제창해서 문자로 선의(禪意)를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문자선의 시효이다. 그래서 그를 문자선의 창시자로 추앙한다. 당 말 오대에 형성된 선종의 5가 중에서 위앙종은 송대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법안종은 영명 연수 이후 쇄락했다. 따라서 송대의 선종은 임제종, 운문종, 조동종 3파는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하고 있었다. 송 태조로부터 철종(哲宗ㆍ960~1100)시기에 이르러서 임제종과 운문종은 선학발전을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래 임제종의 중요한 발전 지역은 화북 일대였으며, 송 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큰 변화는 없었다. 인종(仁宗ㆍ1023)의 통치 시기를 시작으로 그들의 활동 지역은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 강서를 중심으로 선종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하나의 파가 되었다. 특히 분양 선소는 선종에서 자주 인용했던 “설사 한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說似一物不中)”를, “만법을 한마디로 요달한다(了萬法于一言)”로 방향을 선회하였으며, 이점이 바로 선풍을 문자선으로 크게 변화시킨 표식이 된다.

송대에 이르러서 임제종은 흥화 종장(興化 存챷ㆍ830~888), 남원 혜우(南院 慧隅ㆍ?~952)를 지나서 풍헐 연소(風穴 延沼ㆍ896~973), 수산 성염(首山 省念ㆍ926~993)에 이르러서 날로 쇠퇴해져 갔다. 수산 성염의 제자인 분양 선소는 당시 임제종의 이러한 형세의 국면을 전환해보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공안대별(公案大別)과 송고(頌古)를 발의해서 복고주의로써 장차 선을 문자 현담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한 최초의 인물이다. 즉 공안대별과 송고는 다른 말로 문자선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조사들의 선의 경지를 언어문자를 의지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당시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선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불립문자에서 불리문자(不離文子)라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으며, 따라서 문자선은 선수행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해 주었다. 이같이 문자선은 송대 선종의 발전사에서 큰 흔적을 남겼으며, 동시에 선종사에서도 길이 남을 문자선이라는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분양 선소(汾陽 善昭ㆍ947~1024)는 산서성 태원 사람으로 속성은 유 씨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큰 포부가 있었는데 “일체 문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인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통달 하는 것이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림, 강병호

 

분양 선소는 명리를 구하지 않고 사대부 및 왕공대신들과의 교류를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수산 성염을 모시고 여러 해 동안 참학을 마치고 스승을 떠나서, 먼저 호남성 상강(湘江)의 형산(衡山)을 유역할 때, 담주(潭州) 지주(知州) 장무종(張茂宗)이 4개의 명찰에 주지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하였다. 또 북쪽의 양주에 이르러서 잠시 백마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양주(襄州) 지주(知州) 류창(劉昌)이 듣고 와서 참알을 하면서,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탄식하면서 명찰의 주지 소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하였다. 그 후에 분주(汾州) 태자원(太子院)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은 당시 비교적 황량했다. 그는 여기서 30여 년 동안을 사찰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록인 〈선소어록(善昭語錄)〉에 보면 〈불출원가(不出院歌)〉가 실려 있다. 특히 당시 적지 않은 고관대작들이 담선(談禪)하는 것을 즐겼는데, 분양 선소 역시 그들의 중시를 받았다. 〈선소어록〉의 서에 보면 정문보(鄭文寶), 양억(楊聾), 이준욱(李遵勖) 등과 교류가 있었으며, 학림학사인 양억(楊聾)은 〈선서어록〉의 서를 짓기도 했다. 이중욱(李遵勖)은 부마로서 불교에 대한 신심이 매우 돈독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모두 당시 분양 선소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반영해주는 사례이다. 반면에 그의 이러한 정황은 당시 임제종에도 상당히 유리한 영향을 주면서 매우 신속하게 전파되어 갔다.

분양 선소는 특히 스승과 학인의 관계를 매우 중시를 했는데, 학인들을 제접하기 위해서 사용 했던 선법은 대략적으로 삼구(三句), 삼결(三訣), 사전어(四轉語), 사게(四喝), 십팔문(十八問), 삼현삼요(三玄三要), 사빈주(四賓主), 사간료(四料簡), 십지동진(十智同眞) 등이다. 이 중에서 삼현삼요, 사빈주, 사간료 등은 이미 임제 의현 등 옛 조사들이 사용했던 적이 있는 것을 계승해서 발휘한 것이다. 분양 선소는 선법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 관계를 특별하게 중시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 십지동진, 십팔문, 삼구는 분양 선소가 창조한 독특한 선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어록〉에서 말하기를 “설법자는 반드시 ‘십지동진’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에 ‘십지동진’를 갖추지 못하면, 사정(邪正)을 판별할 줄 모르고, 승속을 나누지 못한다.…”고 했다. ‘십지동진’이란? 곧 “①동일직(同一質), ②동대사(同大事), ③총동참(總同參), ④동진지(同廬志), ⑤동편보(同遍普), ⑥동구족(同具足), ⑦동득실(同得失), ⑧동생살(同生殺), ⑨동음후(同音吼), ⑩동득입(同得入)”이다. ‘십팔문’은 분양 선소가 학인들이 선사에게 질문한 말을 18종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선종에서는 ‘분양십팔문’이라고 칭한다. 즉 1은 청익문(請益問)으로, 학인이 스승에게 직접적으로 지도해 줄 것을 요구하는 가르침이다. 2는 정해문(呈解問)으로, 학인이 자기의 견해를 현시해서 스승에게 심사해 주기를 청하는 가르침이다. 3은 찰변문(察辨問)으로, 학인이 난해한 문제를 제출해서 스승에게 문제의 경중을 감별해서 평가해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4는 투기문(投機問)으로, 장차 자기의 경계를 사실대로 제출해서 자기가 증득한 것과 스승이 증득한 것이 같은 지 다른 지 물어보는 것이다. 5는 편피문(偏僻問ㆍ편벽된 물음)으로, 학인의 한 쪽으로 치우친 편견의 견해를 단박에 스승이 힐문해서 스승이 검증하는 것이다. 6은 심행문(心行問) 또한 험주문(驗主問)이라고도 하며, 학인이 비록 득오를 했지만 다시 스승에게 가르침을 묻는 것이다. 7은 탐발문(探拔問)으로, 타인의 견해에 대한 심천(深淺)을 살피는 것이다. 8은 불회문(不會問)으로, 학인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말미암아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9는 경단문(警덫問)으로, 학인이 선법 이외의 학문 및 기타 일들을 가지고 스승을 우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10은 치문(置問)으로, 학인들이 직접적으로 고인들의 문답을 이용해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11은 고문(故問)으로, 학인들이 경론의 고사를 통해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12는 차사문(借事問)으로, 학인들이 고사 및 비유를 빌려서 세간의 일반정황으로 종풍의 가르침을 묻는 것이다. 13은 실문(實問)으로, 사실에 입각해서 이익을 청하는 물음이다. 14는 가문(假問)으로, 가설의 어투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15는 심문(審問)으로, 학인의 상세하지 못한 점을 드러내어서 가르침을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16은 정문(征問)으로, 힐난하는 태도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혹은 질문하는 태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17은 명문(明問)으로, 학인이 이미 명료하게 알았지만, 다시 기타 일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18은 묵문(?問)으로, 학인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동작만을 의지해서 물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분양의 ‘십팔문’은 학인들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18종류의 문화(問話) 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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