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을 서구에 알린 선구적 철학자

〈우파니샤드〉 접하고 인도철학 관심
플라톤, 칸트가 정립한 이원론 인식
‘범아일여’ 일원론 철학으로 통합해
“힘에의 의지, 자기 극복의 상승의지”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1820년대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를 알게 된 쇼펜하우어는 연구를 통해 서구에 동양철학의 우수성을 알린 선구자다. 당시 그의 저술은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1820년대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를 알게 된 쇼펜하우어는 연구를 통해 서구에 동양철학의 우수성을 알린 선구자다. 당시 그의 저술은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원묘지에는 생몰 연대도 없고, 묘비명(墓碑銘)도 없는 다소 야성적인 무덤 하나가 있다. 검은색 화강암 묘지석에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라는 이름만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내가 어디에 묻혀도 후세인들이 나를 발견할 것이다”라고 장담한 철학가 쇼펜하우어(1788~1860)는 과연 그가 예언한 대로 흙 속에 묻힌 후에야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는 묘비명 보다는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기억되기를 바랐다. 독일의 근대 철학가 중에서 사후에 쇼펜하우어만큼 관심과 명성을 얻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던 외로운 철학가였다. 

20세기 실존주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에게서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기실 니체의 탈이성주의 사상이 발아한 텃밭은 따로 있었다. 대학생 시절의 니체는 1865년 어느날 라이프치히의 헌책방에서 그가 태어나기 사반세기도 전에 출간된 두꺼운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기쁨의 충격에 빠진다. 철학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였다.

이미 고인이 된 쇼펜하우어에게 니체는 존경을 담아 ‘선구자 쇼펜하우어’라는 에세이를 써서 헌정할 정도였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은 훗날 니체에 의해 ‘생철학’이라는 실존철학의 장르를 탄생시켰고, 실존철학의 질풍노도는 20세기 지구촌 철학 100년을 뒤흔들었다. 
   
〈우파니샤드〉 읽은 첫 서구 철학자
본래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쇼펜하우어는 어릴 적부터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로부터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받지 못하고 11세에 함부르크 상업학교로 보내졌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아버지의 급서로 17세의 소년 아르투르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상인으로서의 훈련을 중단하고 인문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809년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진학한다. 자연과학 과목들을 공부하던 중, 인간을 연구하려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생리학을 모르면 심리학 연구는 헛수고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적 단일성 ‘프시케’를 경험하면서 그는 2년 후 베를린대학교로 옮겨 철학전공으로 마음을 굳힌다. 당시 베를린대학에는 저명한 철학자 피히테 교수가 있었다. 이내 피히테 교수의 관념론적 강의에 실망한 그가 청강한 과목들 중에는 철학 이외에도 광물학, 물리학, 식물학, 천문학, 지질학, 동물학, 인간의 뇌해부학 등 온갖 다양한 과목들이 들어있었다. 우주를 향한 그의 심오한 탐구심은 놀라웠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가 나이 갓 서른에 펴낸 파격의 철학서다. 젊은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그때까지 유럽 정신을 짓누르고 있던 전통적인 이성주의와 형이상학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성이 숨겨오던 인간의 실존적 적나성(赤裸性)을 낱낱이 파헤친 이 책은 당시 헤겔, 피히테 등 관념주의 철학의 원로들에게 날린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형이상학적 관념 대신 몸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을 파고든 해체주의는 세인들에겐 낯설었고 철학자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내기 철학가의 진지한 인간탐구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저자가 제도권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한 번 펼쳐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받는 데에는 기여한 셈이다. 책이 출간되던 다음해 1820년 쇼펜하우어는 베를린대학 철학과의 객원강사로 부임했다. 그의 사상적 자기 확신은, 원로 주임교수 헤겔과 똑같은 시간대에 나란히 강의 시간을 고집할 만큼 의기충천했지만 결국 수강생이 오지 않아 그는 강사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10여 년 후 대학 캠퍼스를 영영 떠나고 말았다. 고독하고 괴팍한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재야의 철학가로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집대성하는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며 고행 수도자처럼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사상이 고대 인도의 정신세계에 닿아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로부터 인도에 관한 고대 문헌 〈우프네카트〉를 소개받고서부터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간되기 4년 전이었다. 〈우프네카트〉는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의 페르시아어 번역본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BC 428~348)과 근대 철학가 칸트(1724~1804)의 사상이 〈우파니샤드〉와 하나의 맥으로 꿰어져 있음을 간파한 최초의 서양 철학가는 쇼펜하우어였다. 플라톤과 칸트는 생전에 〈우파니샤드〉를 읽을 기회가 없었다. 〈우파니샤드〉가 처음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1802년에 이르러서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우파니샤드〉, 플라톤, 칸트가 없었다면 나의 학문은 없었을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알려진 대로 독립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방대한 문헌 〈베다〉의 일부분이다. 베다 시대의 사람들은 밖에 있는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숭배했지만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내면화의 명상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모든 신들의 배후에는 하나의 지고한 존재가 있으며, 만물의 근본 원리인 대우주의 본체 브라만과 소우주 개인의 본체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일원론’이 〈우파니샤드〉의 철학이다. 

梵我一如 우주론으로 
세계를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경험적으로 지각하는 현상의 세계로 나누었던 플라톤의 이원론은 칸트의 ‘현상’과 ‘사물 자체(Ding an sich)’로 반복된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일 뿐, 현상 뒤의 사물 자체는 선험적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다. 칸트의 계승자 쇼펜하우어는 ‘사물 자체’의 자리에 인간의 ‘의지’를 대치했다. 몸통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만 바꾼 칸트의 세련된 이원론이다. 내면의 무의식 속에서 약동하는 의지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며 선험적으로 본래 있었던 진여(眞如)의 세계라는 것이다. 의지라는 근본조건은 모든 생명에게 공통이지만 각각의 환경과 지성의 차이에서 표상이 다를 뿐이다. 인간의 의지 자체는 궁극적으로 욕구 충족이라는 자기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지향하지 않는다. 삶으로 줄기차게 난입하는 생명체의 절대의지는 찰스다윈의 ‘생존투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연구실에 은둔한 철학가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철학을 했다. 그에겐 일찍부터 상인의 훈련을 받던 세상 속의 체험이 있었고,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자연과학적 인간론’의 뿌리가 있었다. 우파니샤드 현자들이 대우주의 본체와 소우주 인간의 본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불립문자 영성으로 깨달았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그것이 발현하는 표상의 관계를, 숨 쉬는 인간의 몸속에서 직관한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다. 통일성의 본성과 통일성이 다원성으로 드러나는 근본 이유를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은 나 쇼펜하우어다. 인간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그 힘과 하나이다.” 

범아일여의 〈우파니샤드〉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경전이었다. “〈베다〉 한 페이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칸트 이후 철학자들의 저서 열권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많다. 이 책은 나의 삶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나의 죽음도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플라톤, 칸트의 이원론은 인식에는 공로가 컸지만 그것뿐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들의 이원론을 우파니샤드의 일원론 철학에서 통합한다. 서양의 철학가 쇼펜하우어를 인도지성의 대변자라고 부르고, 그의 사상을 ‘서양의 옷을 입은 불교철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허무주의의 극복인가, 완성인가
시대의 주류 사상에 밀려 헌책방에 유폐됐던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대학생 니체의 눈앞에 신세계처럼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사적 흐름 속에서 일어난 보이지 않는 역운(歷運)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철학사상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대학강단을 떠난지 30여 년 후였고, 세상을 하직한지 5년 후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부정적 그늘에 머물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니체의 긍정철학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에서 태어났다. 쇼펜하우어의 어두운 맹목적 의지가 니체의 긍정적 ‘힘에의 의지’로 부활하는 철학사의 전환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힘에의 의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처절한 극한의 방편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숨 쉬는 것이다. 존재는 ‘되어가는 것’이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보존하는 의지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는 상승의지다.” 

상승은 매 순간 극대화를 꾀한다. 생성의 과정은 영원히 끝이 없으므로 힘의 극대점은 없다. 소유론적 욕망의지가 본성의 존재론적 ‘힘에의 의지’로 역동하는 상승이다. 매 순간 힘에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이 니체의 ‘초인’일 터다. 

삶이 맹목적 의지의 표상이라면, 삶은 태생적으로 어두움이다. 그래서 인간세상을 욕계(欲界)라고 부르는가. 쇼펜하우어를 허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숨을 다할 때까지 ‘힘에의 의지’에 매달린 니체는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 둘 중의 하나다. 허무주의적 절망에 이르던가. 최고의 긍정으로 허무를 극복하던가. 

〈유토피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가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모든 종교적 신앙의 원천이라고 했던 말을 음미하는 시점에 와있다. 우주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명상을 통해 욕망의지를 무화(無化)하고, 공(空), 무(無), 허(虛)라는 우주적 본체로 회귀할 때 허무는 극복이 아니라 완성될 수 있음인가. 허무를 완성하는 길만이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라면, 〈우파니샤드〉에서 구원을 본 사람은 쇼펜하우어뿐이 아닐 터다.   

▶ 홍혜랑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부르크대학교 독어독문과에서 수학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과에서 문학석사를 마치고 고려대, 경희대. 한국외국어대 등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한국번역가협회 번역능력인정시험 출제위원과 협회 이사를 지냈다. 30여년 동안 수필창작에 매진하면서, 철학가들과 함께하는 철수회(哲隨會, 철학가와 수필가의 만남)의 창립에 동참했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상임이사, 우리문학기림회 회장을 역임했다. 수필문우회 운영위원이며 저서로는 에세이집 〈이판사판〉 〈자유의 두 얼굴〉 〈회심의 반전〉. 수필선집 〈문명인의 부적〉 〈운명이 손대지 못하는 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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