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치니 삼라만상이 모두 空이더라”

조선 중기 천재 문인 교산 허균
불명 ‘백월거사’로 신심 돈독해
서산, 사명 대사 교류하며 수행
“불우한 사람은 모두 우리 책임”
빈자들과 나누려했던 자비 보여

조선시대 문인 허균의 영정. 
조선시대 문인 허균의 영정.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비명(非命)에 간 천재, 허균(1569~1618)의 불명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의 별호는 교산(蛟山)이다. 고향 강릉의 바닷가에 솟아 있는 교문암(蛟門巖)에서 따와 호를 삼았다. 교산은 ‘이무기의 산’이란 뜻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좌절을 그는 미리부터 예감했던 것일까. 

명리학에서 사람의 운명이란 대체로 ‘환혼동각(環魂動覺)’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환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생로병사요, 혼이란 조상의 영혼과 DNA, 그리고 가정교육이며 동(動)이란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이다. 각(覺)이란 당사자의 깨달음으로 운명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덕망 있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강직한 그의 혈통과 문학에 대한 비범한 감수성, 그리고 불법에서 만난 깨달음 등이 혼탁한 시대에 처한 그를 그렇게 살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은 환경을 넘어서기가 어렵고 특히 어릴 때의 경험은 평생을 지배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門人)으로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정치가로 동인의 우두머리였다. 조광조의 신원(伸睹)을 청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청백리로 기록에 올랐다. 전처소생에게서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후처에게서 둘째아들 봉(튍)과 초희 난설헌과 균(筠)을 두었다.

허균은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아홉 살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둘째형의 친구,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누이 난설헌과 함께 시를 배웠다. 누이와 시를 배우던 이때가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그는 술회한다. 손곡 이달은 대제학을 지낸 이첨의 서손으로 서얼 금고(禁錮)라는 신분차별제도에 갇혀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좌절한 스승의 영향아래 균은 양명학에 심취되고 핍박받는 불우한 서자와 문사들과 어울리며 신분의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양명학은 학문과 행동의 일치를 중시하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며 인간의 평등을 지향한다.

내 마음의 본체는 천리(天理)라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창한 왕양명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의 이치와 합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성인이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는 인간평등관을 부르짖었다. 허균의 이러한 개혁의지는 그의 소설 〈홍길동전〉에 잘 나타나 있다.

의적 홍길동은 첩의 자식이어서 스승 이달처럼 집에서는 호부호형을 못하고 사회에서는 벼슬길이 막힌 모순된 현실에 울분을 느낀다. 의적이 된 칠서들은 가렴주구를 일삼는 토호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홍길동은 지배층의 부정부패가 없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율도국을 세우려한다. 실제로 허균이 살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네 차례의 당쟁사화(士禍)로 사회는 말할 수 없이 어지럽고 민생고는 참담했다. 가뭄에 흉년까지 겹치자 도적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허균의 처는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았으나 출산한 지 사흘 만에 죽고, 아들도 곧 어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나이 22세, 균의 나이는 24세였다. 잇따른 가족들의 죽음. 12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고, 20살 때는 스승 같은 둘째형을, 21살 때는 애지중지한 누이 난설헌이 죽었다(27세). 어머니의 장례는 33살에 치렀다. 이른 나이에 겪은 시련, 생사의 덧없음과 통절한 무상(無常)감이 그를 공문(空門)으로 기울게 했으리라. 그의 둘째형 허봉은 대간으로서나 어사로서 기강을 바로 잡는 데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전한다. 성격이 곧고 분명했으며 유성룡, 임제, 이달, 사명대사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창원부사로 있을 때에 군정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그 후 주어진 벼슬자리를 모두 거절하고 유랑산천을 떠돌다가 백운산에 들어가 불문에 귀의했다. 균은 형에게 글을 배우려고 백운산으로 찾아갔다. 형과 친분이 두터운 사명 스님을 만나 불교에 눈뜨기 시작했다.(2년 뒤 봉은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죽었다.) 균은 서산 대사의 비문을 쓰고 사명 대사의 문집에 발문을 썼으며 그가 쓴 사명당비명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허균은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했으며 염불과 참선을 게일리 하지 않았다. 1604년 황해도 군수로 있을 때, 불교를 믿는다고 탄핵되어 자리에서 물러났고 1606년 명나라 축하사절로 온 주지번을 맞아 해박한 지식으로 그를 감동시킨 공로로 삼척부사에 임명된 지 석 달 만에 이단의 책을 읽고 또 부처를 받들었다며 쫓겨났다. 사헌부에서 그의 파직을 주장하는 글을 보자.

“삼척부사 허균은 유가의 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아비와 형을 배반하여 불교를 믿고 불경을 욉니다. 평소에는 중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했으며 수령이 되어서는 재(齋)를 올리고 중들을 먹이면서 여러 사람이 보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는 제멋대로 선(禪)과 부처를 좋아하는 말을 늘어놓아 유교의 교화를 현혹시켰습니다. 지극히 해괴합니다. 벼슬자리에서 몰아내어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으소서.”-〈선조실록〉

삼척부사에서 쫓겨난 그는 친구 최천건에게 자신의 심경을 편지에 적었다.   

“제가 세상과 어긋나서 죽거나, 살거나, 얻거나, 잃거나 간에 마음에는 조금도 걸림이 없습니다. 점차로 도교나 불교의 무리에 쫓아가 거기에 의탁해서 스스로 세상을 도망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깊숙이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더욱더 불교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에 통달한 견해를 보니 골짜기가 갈라지고 강물이 터지며 불경의 문자는 경황없이 아득하여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듯해서 꼬리, 지느러미, 발톱 껍질을 가려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니 묘연하여 정신이 저 하늘 끝에서 노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거의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늘 말했습니다. 거듭 연구하여 그 숨은 뜻을 꿰뚫어보니 심성이 저절로 밝아져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배운 장자나 주자의 학설을 취하여 그들 학설 중에서 심성에 관한 것을 비교해보았습니다. 그 같고 다른 견해와 참과 거짓이 서로 경계됨을 분석하고 논증했더니 자못 저절로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글을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부처를 믿었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듯합니다. 제가 오늘 날 미움을 받아서 여러 번 명예를 더럽혔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한 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이것으로 제 정신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이는 허균의 유일한 문집인 〈성소부부고〉 문부 서에 적힌 글이다. 
하필 그는 신분제도에 갇힌 서손 스승을 만났고 양명학에 빠져 서얼들과 어울리며 새 세상을 꿈꾸었고,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시대에 태어났으니 그의 핍박은 예상된 것이었다. 
균은 서른네 살이 되던 1602년 서산대사에게 네 차례나 서신을 보내 가르침을 청했는데 편지 글에는 ‘남과 나 그리고 만물이 모두 공(空)이다’라고 쓰고 있다. 1610년 해안스님에게 보낸 편지글에도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나도 또한 불교를 좋아해서 일찍이 그 글들을 읽어보았더니 환하게 마음에 깨우쳐지는 것이 있었고 삼라만상을 비추어보니 모두 공(空)이었다. …마땅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서 무여열반에 들어 잠잠히 소림, 황매와 더불어 나고 죽는 큰 환란을 없애 번뇌의 바다 건너는 것을 함께 한다면 머리는 깎지 않고 가사를 입지는 않았더라도 해안(전라도의 스님. 동갑내기 친구)과 나는 같은 석가모니의 무리이다”-〈성소부부고〉 문부 서

달마대사(소림)와 5조 홍인스님(황매)과 더불어 일체제법의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이치를 체득하여 무여열반에 든다니 그는 이미 적멸위락(寂滅爲樂)이 아니신가. 다행히 공관(空觀)을 체득하신 그러나 무참했던 백월거사의 참수현장을 떠올려보게 된다.

1618년 늦더위가 한창인 8월 26일. 서쪽 저잣거리의 형장에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되었다. 그의 머리는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단 막대묶음에 매달려 저잣거리에 효시되었다. 그의 나이 50세. 죄목은 인목대비 폐출사건에 연류된 것이었다. 

“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유생들이 죄를 몽땅 허균에게 덮어씌우고 기준격의 상소문에 따라 국문할 것을 날마다 요청하였다. 실질적인 가담자 이이첨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교묘하게 허균에게 돌린 탓이라”고 외손자 이필진은 〈성소부부고〉 말미에 적고 있다. 이이첨은 허균과 과거동기생으로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도의 제24조 사자(sinha)존자도 참수됐다. 돈독한 불자였던 임금은 외도들에게 시해를 당할 뻔하자 화가 몹시 나서 사자존자에게 따져 물었다.
“존자는 오온이 공(空함)을 깨달았는가?”
“예, 깨달았습니다.”
“생사는 여의었는가?”
“예, 여의었습니다.”
“이미 생사를 여의었다면 나에게 존자의 머리를 줄 수 있겠는가?”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어찌 머리를 아끼겠습니까?”

칼은 즉석에서 내리쳐졌다. 땅에 떨어진 존자의 머리. 그때의 허균의 심정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이미 본무생사(本無生死), 구경무아를 체득한 성성옹(惺惺翁)이니까. 성성하게 깨어있는 각자(覺者)로서 죽음 없는 열반(不死)에 들었을 것이다. 막대에 목이 걸린 백월거사(白月居士)의 모습을 생각한다. 

“세상의 불우한 사람은 모두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울부짖으며 가난한 벗들과 밥을 나누고,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을 책임지려고 애쓴 백월거사의 동체대비사상과 그 평등심에 경의를 표하며 이 사람은 삼가 긴 묵념을 바친다. 

▶맹난자 수필가는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국대 불교철학과를 수료했다. 1969년부터 10년 동안 월간 〈신행불교〉 편집장을 지냈으며 1980년 동양문화연구소장 서정기 선생에게 주역을 사사하고 도계 박재완 선생과 노석 유충엽 선생에게 명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5년 동안 수필 전문지인 〈에세이문학〉 발행인과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을 역임하고, 〈월간문학〉 편집위원과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사유의 뜰〉 〈라데팡스의 불빛〉 〈나 이대로 좋다〉, 선집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이 있으며, 작가 묘지 기행 〈인생은 아름다워라〉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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