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초기 비유 설화에서 채택 순서로 읽어 선의 묘리 체득하길 ? 선불교의 특징은 선사들의 독특한 선문답에 있다. 선문답의 시원(始原)은 부처님 초기 설법인 아함경류에서 나오는 비유설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아함경류에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들으면서 유익한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비유와 설화를 많이 채택하여 설법했다. 이것을 이어받아 선사들의 선문답 역시 비유가 많이 들어 있다. 선문답은 처음 들어 보면 엉뚱한 말같이 들린다. 이것은 선문답이 몇 단계를 생략한 언어, 비유, 지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암호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이고[色卽是空], 공은 곧 존재이다[
?조주 스님이 어떤 학승에게 물었다. “자네는 을 읽은 일이 있는가?” 학승이 말했다.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경속에 ‘납의(衲衣)를 입은 승려가 한적한 곳에 살면서 거짓 아란야(阿練若; 적정처)로 세상 사람을 속인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자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학승이 짐짓 예배하는 척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납의를 입고 왔는가?” 학승이 말했다. “입고 왔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를 속이지 말게.” 학승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스로 살아갈 계책을 세워라. 내 말에 붙어 다니지 말고.” 師問僧 ?曾看法華經? 云曾看 師云 經中道 衲衣在空閑 假名阿練若 ?惑世間人 ?作?生會
?조주 스님이 어떤 행자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행자가 말했다. “북원(北院)에서 왔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저쪽은 여기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행자는 대답이 없었다. 스님은 그 옆에 서있던 학승에게 대신 대답하도록 시켰다. 그 학승은 대신하여 대답했다. “저 사원에서 왔습니다.” 조주 스님은 웃었다. 조주 스님은 문원에게 다시 또 대신 대답하도록 시켰다. 문원이 말했다. “행자는 스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師問一行者 從什?處來 云北院來 師云 那院何似者院 行者無對 有僧在邊立 師令代行者語 僧代云 從那院來 師笑之 師又令文遠代之 文遠云 行者還是不取師語話 문원은 왜 “저쪽은 북쪽이고 이쪽은 남쪽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조주 스님이 좌주에게
조주 스님이 신참학승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학승이 말했다. “설봉(雪峰)에서 왔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설봉은 어떤 말로 수행자에게 보이는가?” 학승이 말했다. “화상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전 우주는 사문(沙門:我)의 일척안(一隻眼)이다 자네들은 어디에 똥을 누는가?’ 라고.”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가 만일 돌아가거든 괭이 한 자루를 가져다주게.” 師問新到 離什?處 云離雪峰 師云 雪峰有什?言句示人 云和尙尋常道 盡十方世界 是沙門一隻眼 ?等諸人向什?處? 師云 ?黎若? 寄箇?子去 괭이를 보낸 뜻은 ‘똥 치우는 자’라는 뜻이다. 나 또한 조주 스님에게 돌아가는 자가 있으면 빗자루 한 개를 보내겠다. 조주 스님이 옷을 대중에게 순서대로 나누어주었을 때 한 학
어떤 스님이 조주선원을 떠나겠다고 하자 조주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다른 데에 가서 혹시 남에게 ‘조주를 만났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학승이 말했다. “다만 ‘뵈었을 뿐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한 마리의 당나귀다. 그대는 어떻게 보겠는가?” 학승은 말이 없었다. 因僧辭去 師云 ?黎出外 忽有人問 還見趙州否 ?作?生祇對 云只可道見 師云 老僧是一頭驢 ?作?生見 僧無語 이때는 “일일부작 일일불식(日日不作 日日不食)하라” 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스님이 설봉(雪峰) 스님이 있는데서 찾아왔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네. 내가 있는 장소는 한낱 난을 피할 장소일 뿐이야. 불법은 모두 남쪽에 있다. 그런
조주 스님이 문하대중에게 가르쳐 말했다. “‘조금이라도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분별심이 있으면 마음을 잃고 만다’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할 말이 있는가?” 후에 이 일을 어떤 학승이 낙포(洛浦)에게 이야기했는데 낙포는 이[齒]를 따다닥 부딪쳤다. 그것을 또 운거(雲居)에게 가서 이야기했는데, 운거가 말하길 “낙포 스님이 하필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학승이 이것을 조주 스님에게 이야기하자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남쪽에 크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 학승 말했다. “화상께서 거론해 주십시오.” 주 스님이 은밀히 거론하자, 학승은 곧 옆에 있는 승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스님은 공양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은 이야기를 그쳤다. 師示衆云 ?有是
학승이 물었다. “밝은 달이 중천에 걸려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아직 계단 밑에 있는 사람이네.” 학승이 말했다. “원컨대 스님께서 계단 위로 끌어 올려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달이 지고 난 다음 오너라.” 問 朗月當空時如何 師云 猶是階下漢 云請師接上階 師云 月落了來相見 낭월당공(朗月當空)은 화두가 보름달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말한다. 이 경지는 수행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고급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도 마지막 단계는 아니다. 여기서도 한 단계 더 넘어서야 한다. 그 단계는 어떤 단계인가? 낭월당공을 던져버릴 때 알 수 있다. 명심하라. 이 공부는 바보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소중한 것을 버려야 진정한 불지에 오른다. 조주 스님이 어느
?학승이 물었다. “깨달음의 꽃이 아직 피지 않았을 때는 진실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미 피었어.” 학승이 말했다. “진입니까? 실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진이 바로 실이고 실이 바로 진이다.” 問 覺花未發時 如何辨得眞實 師云 巳發也 云未審是眞是實 師云 眞卽實實卽眞 깨달음의 꽃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깨닫지 못했다면 수많은 진리 중에 무엇인 진실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이에 대해서 조주 선사는 그 꽃은 석가모니 이전에 피었다고 말한다. 부처 이전에도 부처는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 이전의 부처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겠다. 더 이상 움츠리지 말라고. 당당하게 살
학승이 물었다. “옛날부터 고덕(高德)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지시하였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가 물어서 비로소 고덕(高德)이 있는 줄 알았네.” 학승이 말했다. “제발 노스님께서 가르치심을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고덕(高德)이 아니야.” 問 從上古德將何示人 師云 不因?問 老僧也不知有古德 云請師指示 師云 老僧不是古德 이때 학인은 답답해서 미친다. 뭘 좀 물었는데 그것에 대해 대답은 안 해주고 엉뚱한 것으로 말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학인은 조주 스님이 왜 이렇게 대답하는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덕! 누가 덕이 높은 스승인가? 평등한 이 문중에 고덕은 없다. 모두 똑같은 부처이다. 조주 스님이 자기는 고덕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진심이다. 선을
?학승이 물었다. “조의(祖意)와 교의(敎意)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조의를 알게 되면 교의도 알게 돼.” 問 祖意與敎意同別 師云 會得祖意便會敎意 조사의 뜻과 부처의 뜻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본 납자는 조주 선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본 납자라면 “조사는 부처를 모르고 부처는 조사를 모른다네.” 하고 대답하겠다. 본 납자의 대답이 조주 선사와 더불어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학승이 물었다. “이류중행(異類中行)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옴 부림(bh쮎rim). 옴 부림.” 問 如何是異類中行 師云 唵 部林 唵 部林 이류중행이란 전혀 다른 무리 속에서 행(行)하는 것을 말한다. 번잡한 사바 속에 살면서도 수행을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 학인에게 지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눈앞에 학인은 없다.” 학승이 물었다. “그러시면 세상에 나오시지 않는 것 아닙니까?” 스님은 곧 ‘안녕히’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問 如何是和尙示學人處 師云 目前無學人 云與?卽不出世也 師便珍重 조주 선사에게 학인은 없다. 누가 학인인가? 오로지 부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조주 선사의 뜻을 모르고 학인은 “그러면 선사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었다. 그렇다. 선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는 없다. 다만 스스로 살아갈 뿐이다. 누가 물으면 대답해주고 묻지 않으면 조용히 풀이 돋아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인생의 의미를 묻지 말라. 인생의 의미는 마음이 만드는
?학승이 물었다. “근본에 돌아가 뜻을 얻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매우 황당할 뿐이다.” 학승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 인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問 歸根得旨時如何 師云 太慌忙生 云不審 師云 不審從甚處起 뜻을 얻다니, 가소롭다. 그렇게 뜻을 얻는 것이라면 왜 납자들이 수십 년을 찾아 헤매고도 얻지 못하는가? 또 3아승지겁을 수행한 석가모니도 가섭에게 전하지 못했는데 네 말은 나를 황당하게 하는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했는데 그 인사는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가? 그것을 안다면 근본 뜻을 얻었느니 얻지 못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유상공(劉相公)이 절에 와서 스님이 경내 청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
?학승이 물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간택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 밭일이나 하는 촌놈아,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 問 至道無難唯嫌揀擇 如何得不揀擇 師云 天上天下唯我獨尊 云此猶是揀擇 師云 田奴 什?處是揀擇 조사들의 공격은 날카롭다.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하고 반문했을 때 노승이 창을 들고 찌르는 것이다. 이때 학인은 한 손으로는 방패로 막고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찔러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방패와 창을 동시에 쓰는 것인가? “견공은 던지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던지는 자의 눈빛을 째려본다.” 학승이 물
?학승이 질문했다. “질문이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상어(常語)가 어그러진 거야.” 問 無問時如何 師云 乖常語 선사들의 대답은 늘 평범하고 맞는 말이다. 상어(常語)는 평상시 대담이다. 상어가 어그러졌다는 것은 대담이 깨졌다는 것이다. 말없이 앉아있을 때, 상어 쪽에서 보면 대담이 깨진 것이다. 그것일 뿐이다. 그 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지 말라. 단순한 것이 답이다. 동시에 옳은 답이다. 선은 있는 그대로 말한다. 더 이상 나가면 도의 담백함을 잃는다. 학승이 물었다. “사방의 산이 마구 다가올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도망갈 길이 없다.” 問 四山相逼時如何 師云 無出跡 지진이 일어나 사방이 무너질 때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까? 일방이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의 적합한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침을 뱉었다. 학승이 물었다. “그 일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또 한 번 침을 뱉었다. 問 如何是祖師的的意 師涕唾 云其中事如何 師又唾地 조사의 뜻? 나는 그것에 침을 뱉어 주리라. 침을 뱉는 뜻이 무엇인가 물었는가? 그것에도 나는 침을 뱉어주겠다. 누가 감히 조주 스님의 침 뱉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는가? 마음이 추악함으로 덕지덕지 때묻어있는 사람은 조주 스님의 이 행동을 보고 추악하다고 몸을 떨어댈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대들이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대의 심성이 깊은 병이 들어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대고 자문해보라. 일상사에 흔들리고, 두렵고, 일치되지 않는가를. 그대가 조주 스님의 뜻
?학승이 물었다. “껍데기를 보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이 원인인가?” 問 不見邊表時如何 師云 因什?與? 껍데기는 양변(兩邊)의 세계이다. 상대적인 개념의 세계, 즉 선악, 빈부, 장단, 중생과 부처, 염정 등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이 양변에 걸린다. 양변은 껍데기의 세계이다. 사물의 진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양변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양변은 완전히 사라진다. 더 이상 삶에 있어서 양변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경지에 들어갔다면 스승은 어떻게 평할까? 조주 선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반문을 통한 가르침이다. 양변은 알맹이가 아니고 껍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의 주장이 떨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가 뜻을 얻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의심하는 마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問 如何是歸根得旨 師云 答?卽乖 問 如何是疑心 師云 答?卽乖也 근본은 삼라만상의 근원을 말한다. 우주 만물이 나온 곳, 사람이 나온 곳, 만가지 법칙이 나온 곳이 근원이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가 뜻을 얻을 것인가? 조주 선사는 대답하면 곧 어그러진다고 말했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근본인데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그곳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것은 곧 어그러트리고 만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뭐라
?학승이 물었다. “즉금(卽今)을 없애버렸을 때는 무엇이 적합할 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즉금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물어보지 말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적합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말했어. 물어보지 말라고.”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커서 바깥이 없고, 작아서 안이 없다.” 問 盡?今時 如何是的的處 師云 盡?今時莫問那箇 云如何是的 師云 向?道莫 云如何得見 師云 大無外 小無內 가장 적합할 때는 지금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최적의 시간이다. 매순간이 모이면 평생이 된다. 매순간 행복하면 평생 행복하다. 지금을 벗어나서 최적의 시점이 언제이겠는가? 그렇다면 가장 적
학승이 물었다.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대해야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진주(陳州)에서 온 사람은 허주(許州)의 소식을 알 수 없어.” 問 路逢達道人 不將語?對 未審將什?對 師云人從陳州來 不得許州信 길에서 도인을 만나 뭔가 뜻을 통해보려면 말이나 침묵 등으로 응대해서는 안 된다. 말이나 침묵으로는 진정한 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응대하면 될까? 학인의 질문에 조주 스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역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진주에서 살던 사람은 허주에 대한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인이 아니면 도인들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전문 용어가 있
?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모든 것의 근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야.” 학승이 말했다. “학인은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두공(斗拱)은 차수(叉手)하고 있지만 알지는 못해.” 問 如何是萬法之源 師云 棟梁椽柱 云學人不會 師云 拱斗叉手不會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은 집을 짓는데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집을 대표한다. 조주 스님이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 근원이라고 말한 것은 집의 중심이 이들이듯 만물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이 근원이라고 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만물의 중심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도(道)다. 그러면 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만물이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이 집이 근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