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이 인도 땅에 들어왔을 때 일부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를 고려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가 있었다. 주로 힌두교의 하층민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계급을 인정하지 않지만, 인도 땅에서 자리 잡은 이슬람 공동체 내에는 중세부터 현재까지도 인도식의 계급적 문화와 위계가 존재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도의 사회적 토양에서 새로운 인도-이슬람의 계급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인도가 이슬람을 변화시킨 것이다.이러한 종교사회
〈사문과경(沙門果經)〉에는 석가모니와 아사세(阿?世) 왕의 대화가 그려진다. 여기서 아사세 왕은 석가모니 이전에 만났던 여러 철학자들을 짧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의 면모가 여기에 등장한다. 그 가운데 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라고 하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곧 아지따 께샤깜발라(Ajita Keakambala)가 그이다.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아마도 머리카락(kea)를 길게 길러 담요(kambala)처럼 몸을 휘감고 다녔던 사상가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석가모니는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 이에 대해 온전한 근거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사례는 아직 없으며, 국내 학계나 해외 학계에서도 석가모니가 사용한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불교의 기록은 석가모니 이후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등장하기 때문에 본래 석가모니의 언어를 증명하는 단서로 인정하기 힘들다. 인도에서 기록문화가 다른 문명처럼 일찍 정착했더라면 이러한 고민거리는 쉽게 해소되었을지 모른다. 기록문화 대신에, 인도는 그 어떤 문명보다도 구전(口傳) 전통이 정교하게 발달한 곳이다. 하지만 초기 인도의 베다
필자는 가끔씩 인도 동북부 시골마을의 길변에서 대마밭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식용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동북부의 많은 지역은 대마 이용이 합법이지만 집 앞 텃밭에 기르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말인즉, 유채처럼 어릴 때 잘라내어 데친 후에 볶아먹으면 꽤 찬거리로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필자의 경험치 안에서 대마는 늘 질기고 거친 식물이었다. 필자의 외가에는 아직 수십 년 전에 베어 말려놓은 대마줄기 다발이 아직 조금도 삭지 않은 채 헛간 시렁에 매달려있는데, 과거 어른들은 이 대마를 쪄서 말린 후 얇은 속껍질을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명상에 들기 전, 석가모니가 농부로부터 한 다발의 풀을 받았다는 것을 불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석가모니는 그 풀을 받아 보리수 밑에 깔고 동쪽을 향해 앉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풀을 보시한 사람은 소티야(Sottiya)였다. 그는 아마도 풀을 잘라 팔던 농부였거나, 그 풀을 필요로 했던 바라문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은 그가 단순한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이름대로 ‘(베다)경전을 공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그 한 단의 풀을 받아 보리수 밑에 깔고 몸을 꼿꼿
석가모니가 성읍으로 들어와 거닐었던, 그 도시 내의 건물들은 어떠한 형태였을까. 우리에게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의 건축형태가 어떠했는지 추정해볼 수 있는 고고학적 단서가 거의 없다. 마하바라따나 라마야나 같은 고대 인도의 서사시가 당시의 건물형태를 상상할 수 있는 문학적 단서가 될 것이고, 그 이후 기원전 1~3세기에 건립된 산치(Sanci)나 바르후트(Bharhut) 스투파 등에 나타난 조각을 통해서야 시각적인 단서를 얻게 된다.만일 건축기술의 혁명적 변화가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산치 스투파의 조각을 통해서 석가모니 당시의
고대 인도사회에서 사용하던 가니까(ganika)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집단을 뜻하는 가나(gana)에 소속된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니까는 어떤 집단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일원들이 수시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동의 재산인 셈이다. 이것은 특정한 물건일 수도 있으며 인간과 그들의 노동력일 수도 있다. 이 가니까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형의 인간이 바로 기녀이다. 베다 시대부터 석가모니 당시에도 가니까에 속했던 인물이 있었으며, 불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암라팔리(mrapl)이다. 암라팔리는 바
출가 전의 싯다르타 태자의 손바닥에서 금화와 은화가 반짝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태자였다면 자신의 시종들에게 은전(銀錢)이나 동전(銅錢)을 주면서 장터에 있는 어떤 물건을 부탁했을지 모른다. 만일 이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담아낸다면 손바닥 위의 동전을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 현재와 같이 동그란 모양의 동전 양쪽에 그림이 새겨져 있었을까.불교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할 때 그 색(色)을 산스끄리뜨어로 루빠(rpa)라고 하는데 보통 ‘물질’ 또는 ‘형상’ 정도의 뜻으로 푼다. 이 말은 약간 다른 의미가 있는데
경전의 묘사에 따르면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은 탁발을 위해 때때로 도시의 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성을 말하는 것일까. 당시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특정한 읍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출입구는 일정하게 통제되고 있었다는 말이며, 주거지를 보호하고 있는 성벽의 높이와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건설되었던 것일까. 경전에서 묘사된 도시는 정말 성곽도시였으며, 그렇다면 석가모니 당시에 방어용 도시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우리의 의문에 정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문헌학적이며 고고학적인 단
석가모니 시대에도 육로와 해상로를 통해 국제적인 무역과 인구의 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역의 간선도로는 수시로 지워지고 새로 생겨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한 길 끝에는 항구가 있거나 도시의 관문 또는 사원이나 순례지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먼저 당시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장거리 루트를 고려해보자. 장거리 교통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북쪽 인더스 강과 동쪽 갠지스 강을 통해 육지에서 해상으로 빠져나간다. 서쪽에서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서 현재 파키스탄 카라치에 있었을 항구 바바리콘(Barbaricon)에
싯다르타 시대에 대중들이 주식으로 사용했던 곡류는 아마도 쌀과 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베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밀과 같은 곡류는 베다 시대의 종교의례나 서사시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 가장 많이 대중들이 사용했던 곡류는 쌀과 보리로 추측해 볼 수 있다.베다 의례를 치르기 위해 가장 빈번히 준비해야 했던 곡류 음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뿌로다샤(puroa)와 짜루(caru)라 부르는 음식이다. 뿌로다샤는 한마디로 말하면 쌀떡이고 짜루는 쌀이나 보리를 끓여서 만든 죽이다. 떡은 쌀을 물에 불려서 맷돌에
〈마하승기율〉과 〈사분율〉 등에는 석가모니 당시 승단에서 음주가 금지된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어떤 스님이 음식 공양을 받는 자리에서 우연히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꽤나 술을 많이 먹었는지 나중에 그 스님이 숙취를 견디지 못하고 실수로 석가모니를 발로 걷어찬 것이다. 이것이 승단에서 금주를 결정한 계기였다고 적고 있다. 이 일화가 보여주듯이, 한때 불교는 술에 대해서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불음주(不飮酒)의 규정이 생겨난 것은 술을 먹었던 어떤 제자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처음부터 당시 사회에서 유
마하방사(Mhavasa)에 그려지는 싯다르타의 집안 관계는 특이하면서도 전형적이다. 그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의 경우를 보면, 그는 아버지 시하하누(Sihahanu)의 여동생의 딸들, 즉 고모의 두 딸과 결혼한다. 이들이 마야(My)와 빠자빠띠(Pajpat)이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싯다르타는 고모의 딸이었던 밧다깟자나(Bhaddakaccn) 즉 야소다라와 결혼한다. 여자 측에서 보자면, 외사촌과 결혼하는 것이고, 남자 측에서 보자면,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인류학에서는 교차사촌혼
석가모니 붓다의 이름은 고따마 싯다르타(Gotama Siddhrtha)였다고 말한다. 모든 후대의 경전들이 그렇게 반복했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사실이다. 여기서 고따마는 씨족의 성(姓) 즉 고뜨라(gotra)를 뜻하고 싯다르타는 이름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름을 굳이 풀어서 말하면, ‘좋은 소의 가문에서 태어나 목적을 성취한 사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석가모니의 이름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것이다.만일 고따마가 석가모니의 출가전 그의 성씨를 말한다면
현재에도 인도인들은 뛰어난 암기능력으로 주목받는다. 어떤 인도 어린이는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 정도는 통째로 외운다. 석가모니 당시에는 그 이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방대한 문학들이 존재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불경도 처음에는 그렇게 전승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석가모니 시대 이전인 베다 시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베다 문헌들은 불경과는 달리 대체로 ‘한 구절도 어긋나게 암기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신의 계시 문학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베다 지식인들은 그 경전 구절을
불교전승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 힌두경전인 베다(Veda)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베다는 그 전승과정에서 매우 폐쇄적인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이자 경전인 베다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거의 4천 년 전에 인도-아리아인들이 인도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빚어낸 종교문학이었다. 의례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이 베다문학은 처음부터 입으로 창작되고 입으로 전승된 완전한 구비문학(口碑文學)이다.입을 통해 창작되고 전승되었지만, 이것은 문자를 모르던 대중
고대인도 문화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문자(文字)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원전 2천 년경 인더스 문명기에 사용되었던 인더스 문자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렸고, 다시 그 이후 인도에 문자가 등장한 때를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비문의 문자가 나타난 때로 본다면, 고대인도인들은 최소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 싯다르타가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싯다르타는 정말 무문자(無文字)의 사회 속에서 살았던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석가모니 시대에도 질병은 존재했을 것이고 현재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대규모의 전염병도 창궐했을지 모른다. 당시의 질병이나 치료행위가 어떤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다만 그 질병의 흔적을 경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신화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다.베다에서는 이 질병을 일으키는 악귀들을 ‘그리하(Grah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본래 어디에 ‘사로잡히다’는 뜻이다. 귀신들린다는 뜻으로도 쓰이며, 그렇게 만드는 신도 그렇게 부른다. 한마디로 악귀다. 초기 인도의 몇몇 악귀들은 특별히 여
출가사문이 지닐 수 있는 개인 소유물은 각 종교마다 조금씩 달랐다. 불교 수행자들은 대략 일곱 가지에서 여덟 가지 정도였는데, 옷과 발우를 기본으로 해서 바늘과 지팡이, 치목(양치하는 나뭇가지), 허리띠, 지팡이 등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발도구 같은 것도 포함된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율장의 기록들은 석가모니보다 훨씬 후대에 정해진 규정일 것이다. 이러한 도구들 가운데 몇 가지는 금속으로도 제작되는 것들이 있는데, 발우(鉢盂)나 바늘, 그리고 이발도구 등과 같은 것이다.발우는 대체로 철이나 나무, 토기 등으로 만들어졌던
“장발의 고행자는 바람의 옷을 입었어, 흙먼지의 옷을 입었지. 그들은 신들이 걸어갔던 그 바람의 길을 따라간다네.”거의 3천여 년 전, 고대 인도의 시인들이 지은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장발의 고행자는 아마도 나체의 고행자로서 기름때와 먼지로 범벅이 된 긴 머리카락을 끌면서 땅을 기어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궁금해지는 건 이들이 어떻게 생존해왔고,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고행자 또는 출가사문은 불교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 삶의 형태가 불교를 간접적으로 말해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