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호 10월 16일]

 학승이 물었다.
“조의(祖意)와 교의(敎意)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조의를 알게 되면 교의도 알게 돼.”

問 祖意與敎意同別 師云 會得祖意便會敎意

조사의 뜻과 부처의 뜻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본 납자는 조주 선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본 납자라면 “조사는 부처를 모르고 부처는 조사를 모른다네.” 하고 대답하겠다. 본 납자의 대답이 조주 선사와 더불어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학승이 물었다.
“이류중행(異類中行)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옴 부림(bh쮎rim). 옴 부림.”

問 如何是異類中行 師云 唵 部林 唵 部林

이류중행이란 전혀 다른 무리 속에서 행(行)하는 것을 말한다. 번잡한 사바 속에 살면서도 수행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매일 진언이나 화두, 아니면 염불 수행하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높고 험하여 오르기 힘들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스스로 산봉우리 정상에 주하고 있네.”
학승이 물었다.
“조계로 가는 길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조계로(曹溪路)는 악로(惡路)야.”
학승이 물었다.
“지금 어찌 도달하지 못합니까?”
조주 스님은 말했다.
“그것은 높고 험준하기 때문이야.”

問 高峻難上時如何 師云 老僧自住峰頂 云爭奈曹溪路側何 師云 曹溪是惡 云今時 爲什?不到 師云 是渠高峻

어찌하여 조주 선사는 스스로 정상에 도착해있는가?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조주 선사가 신발도 닳은 바 없이 정상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그곳에 본 납자도 숨소리 한 번도 거칠게 쉬지 않고 도착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악로(惡路)는 길이 나쁘다는 의미이다. 순로(順路)라면 길을 따라 곧장 걸어가 도착하면 된다. 그러나 악로는 길이 험하여 미끄러지기도 하고, 길이 끊어져서 있는 듯 마는 듯도 하고, 신작로를 만나 순탄한 듯 하다가 사도로 빠지기도 한다. 가는 도중에 만나는 길 안내자 선지식들의 가리킴도 일정하지 않다. 화두를 들라하다가, 묵언하라하다가, 방을 들어 때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놀라게도 한다. 그 가리킴이 난폭하여 어린 사미의 손가락을 자르기도 하고, 문지방에 발목을 내밀게 한 후 문을 받아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구순피선(口脣皮禪)을 하는 선사들의 설법도 이랬다저랬다, 부처라고 했다가 부처가 아니라고 하고, 깨달음이 있다가 하다가 깨달음이 없다고도 하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갈등하고 재신심 내기를 여러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내어서 결국 조계로 끝에 당도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선사들의 가리킴이 하나에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가락이 5개이나 모두 손바닥에 모이듯이 천 가지 만 가지 설법은 다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는 무엇일까? 만일 나에게 묻는다면 “66번을 넘어져도 모르는 것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넘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학승이 물었다.
“보배로운 달이 중천에 걸려있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 귀를 막고 말았어.”

問 如何是寶月當空 師云 塞?老僧耳

보배로운 달이 중천에 걸려있다[寶月當空]는 것은 항상 일심과 평정을 잃지 않고 자동으로 중심이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소위 동정일여니 몽중일여니 하는 경계를 얻은 것인데, 이 경계에 들어가려면 피눈물 나는 수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설사 이런 경계에 들어갔다해도 스승에게 그 경계에 대하여 물어보는 것은 스승의 귀를 막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인가? 선사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것 자체가 그 이유이다. 선사를 만난 후 마음이 답답하거든 얼른 두꺼비에게 큰 소리로 물어보라. 거기서 틀림없이 깨달을 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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