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2호 8월22일]

 학승이 물었다.
“즉금(卽今)을 없애버렸을 때는 무엇이 적합할 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즉금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물어보지 말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적합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말했어. 물어보지 말라고.”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커서 바깥이 없고, 작아서 안이 없다.”

問 盡卻今時 如何是的的處 師云 盡卻今時莫問那箇 云如何是的 師云 向你道莫 云如何得見 師云 大無外 小無內

가장 적합할 때는 지금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최적의 시간이다. 매순간이 모이면 평생이 된다. 매순간 행복하면 평생 행복하다. 지금을 벗어나서 최적의 시점이 언제이겠는가? 그렇다면 가장 적합한 그것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크다고 말하자면 얼마나 큰지 가히 바깥을 볼 수 없고, 작다고 말하자면 너무 작아서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같이 생생하고 분명할 때 만물의 근원을 즉시 깨달아야 한다. 24시중에 움직이고 말할 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밥 때를 아는 것과 같다.

학승이 물었다.
“4구를 떠나고 백비를 끊었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죽음에 대해서는 모른다.”
학승이 물었다.
“그것은 화상의 경계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물론 그렇지.”
학승이 말했다.
“제발 지시하여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4구 백비를 여의고 무엇을 가지고 지시하라는 것인가.”

問 離四句絶百非時如何 師云 老僧不認得死 云者箇是和尙分上事 師云恰是 云請和尙指示 師云 離四句絶百非 把什麽指示

4구 백비를 ‘유무 세계’ 일체를 끊어내는 것이다. 일체를 끊어야 가히 조금 도를 이해하는 정도가 된다. 조주 선사는 4구 백비를 끊어낸 세계는 마치 죽음의 세계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설명할 때는 사구 백비를 여의고 도대체 무엇으로 말하라는 것인가 라고 반문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도나 진실의 세계는 헤아림으로 알려고 하고 보려고 하면 알 수 없다. 그곳은 모든 것을 여읜 자리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일체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안으로는 한 물건도 없고 밖으로는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다.”

問 如何是和尙家風 師云 內無一物外無所求

마음 안에 단 한 경계도 두지 않고 마음 밖에도 단 한 경계도 두지 않는 것이 선사들의 경계이다. 내외가 맑고 분명하다. 이것은 닦아서 얻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품은 원래 그렇게 되어져 있다. 이러한 줄 깨달으면 즉시 체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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