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호 8월 29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가 뜻을 얻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의심하는 마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問 如何是歸根得旨 師云 答你卽乖 問 如何是疑心 師云 答你卽乖也

근본은 삼라만상의 근원을 말한다. 우주 만물이 나온 곳, 사람이 나온 곳, 만가지 법칙이 나온 곳이 근원이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가 뜻을 얻을 것인가? 조주 선사는 대답하면 곧 어그러진다고 말했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근본인데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그곳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것은 곧 어그러트리고 만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 주면 그 설명으로 인하여 마음의 진실과는 더욱 멀어진다. 그래서 대답하면 어긋난다고 말한 것이다.

좌주(座主:강사)가 물었다.
“출가한 사람도 속가가 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출가는 좌주 당신의 일이오. 벗어나고 벗어나지 않는 것은 노승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좌주가 말했다.
“왜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곧 출가요.”

問 出家底人 還作俗否 師云 出家卽是座主 出與不出老僧不管 云爲什麽不管 師云 與麽卽出家也

출가란 탐진치 삼독의 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출가하고도 세속의 지위나 명예, 그리고 재물을 탐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출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저속한 속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출가해서 해탈을 구하는 것도 또한 욕망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직 출가하지 못한 것이다. 출가는 깨닫는 것이다. 나 자신이 완벽한 상태임을 깨닫는 것이다. 수행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행을 닦는 것이다. 아상을 버리고 인상을 버리고 중생상을 버리고 수자상을 버리고 조금씩 부처의 행을 수행해서 어느 날 완벽한 붓다의 행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할 것이 있다. 부처의 행을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명제는 누구보다 깨달은 자가 더 잘 안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길을 선택한다. 그중에 하나는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부처가 가는 길이 혹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섣부르게 이런저런 평을 할 문제가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스승도 제자도 존재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루(無漏)의 지성은 사람마다 본래 구족(具足)하고 있다. 또 이르되 이것은 스승도 제자도 없다.”

問 無師弟子時如何 師云 無漏智性本自具足 又云 此是無師弟子

무루지성(無漏智性)은 샘이 없는 지성이라는 뜻이다. 중생의 지혜는 양쪽 중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흠이 있다. 이것을 샌다[有漏]고 말한다. 부처의 지혜는 양쪽을 떠난 지혜이기 때문에 흠이 없다. 이것을 새지 않는 지혜라고 말한다. 이 지성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스승은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껍데기 관계이다. 진정한 관계는 부처와 부처의 관계이다. 그래서 이 문중에서는 스승도 제자도 없는 것이 정상이다.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 인정해줄 스승은 필요하다. 스승은 경험자다. 평생을 바쳐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가장 바르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스승에게 존경과 감사함을 바친다. 이것은 제자가 할 일이다. 스승은 부처가 태어남을 감사하게 생각할 뿐 어떠한 관계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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