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호 12월 19일]

 조주 스님이 어떤 학승에게 물었다. “자네는 <법화경>을 읽은 일이 있는가?”
학승이 말했다.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경속에 ‘납의(衲衣)를 입은 승려가 한적한 곳에 살면서 거짓 아란야(阿練若; 적정처)로 세상 사람을 속인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자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학승이 짐짓 예배하는 척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납의를 입고 왔는가?”
학승이 말했다. “입고 왔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를 속이지 말게.”
학승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스로 살아갈 계책을 세워라. 내 말에 붙어 다니지 말고.”

師問僧 你曾看法華經麽 云曾看 師云 經中道 衲衣在空閑 假名阿練若 誑惑世間人 你作麽生會 僧擬禮拜 師云 你披衲衣來否 云披來 師云 莫惑我 云如何得不惑去 師云 自作活計 莫取老僧語

학승이 ‘예배하는 척(擬禮拜)’한 것은 적정처를 얻은 척하는 모양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법화경 문장의 뜻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천하장부는 부처나 조사를 따라 다니지 않는다. 자기의 색깔, 자기의 교화를 펴야 부처와 조사가 기뻐한다.

조주 스님이 좌주에게 물었다. “어떤 학업을 익히고 있는가?”
좌주가 말했다. “유마경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물었다. “유마의 조부는 누구인가?”
좌주가 말했다. “저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어찌하여 거꾸로 손자의 말을 강의하는가?”
좌주는 대답이 없었다.

師問座主 所習何業 云講維摩經 師云 那箇是維摩祖父 云某甲是 師云 爲什麽卻爲兒孫傳語 主無對

유마의 조부가 누구인가 물었을 때 “저입니다”라고 말한 것까지는 좋은 대답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거꾸로 손자의 말을 강의하는가?” 라는 물음에는 대답을 못했으니 공연히 선을 아는 척하다 한 방망이 얻어맞은 꼴이다. 말로써 선사를 이기려하면 안 된다. 참선을 오래하면 논리도 넘어가고 직관도 넘어가는 달관자가 되기 때문에 어설픈 논리로 선사를 이겨낼 수 없다.
조주 스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묘해야 한다.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쪽저쪽을 다 넘어서 자기의 말이 튀어나와야 한다. 납의를 속이지 않는 천하의 납자들이여! 이때에 뭐라고 해야 조주를 넘어뜨리겠는가? 본 납자라면 “나는 단지 내 말을 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겠다.

조주 스님이 하루는 법당에 올라갔다.
한 학승이 나와서 예배하자 스님은 합장하고 ‘안녕히!’ 하고 말했다.
또 어느 날 한 학승이 예배하자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잘 물어보아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선(禪)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오늘은 흐렸으니 대답하지 않겠다.”

師一日上堂 僧纔出禮拜 師乃合掌珍重 又一日僧禮拜 師云好好問 云如何是禪 師云今日天陰不答話

조주 선사는 자비심이 많아서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단지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조주 선사의 잘못이 아니다. 조주 선사의 답은 명확하다. 어느 때는 그 이상 그 이하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초심자가 못 알아들어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무엇이 선(禪)인가 물었는데 조주 선사는 “오늘은 흐려서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명확한 대답이다. 그런데 내일 날씨가 맑아진다면 과연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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