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산하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라는 곳이 있다. 이름대로 해외에 반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해 조사를 하는 단체다. 이 단체는 매년 4월 1일 해외 반출 문화재 숫자를 홈페이지에 업데이트하는데 올해는 193,136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몇 년 새 늘어나는 추이를 보면 매해 1만 점 내외다. 대부분 소장처는 역시 박물관이다. 짐작하겠지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반출 유물에 대해서는 그 규모 파악이 쉽지 않다. 사실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래도 일단 파악된 19만여 점이라는 숫자도 대단하다. 어느 정도 숫자인지 감이 잘 안 오는
조선의 불교 탄압이전 연재에서 다뤘지만 고려시대 승려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약 1/3이었다. 정확한 인구 통계가 없지만 고려 시대 인구를 200만 명에서 500만 명 사이로 추정한다면 70만 명이 하한선이고 상한선으로 잡으면 무려 150만 명이다. 물론 그 숫자의 8할은 공부하는 수행승이 아니라 비승비속의 삶을 살아가던 수원승도(隨院僧徒)라는 존재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행승’이었던 ‘하급승려’였던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의 건국으로 궁지에 몰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선의 불교 탄압은 크게 세 가지 방향이었다. △사찰과 승려 수
‘고려시대 불교가 흥성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사람들도 실제 규모를 기술한 자료를 보여주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완간한 〈신편한국사〉에 따르면 나말여초 승려의 숫자를 전체 인구의 1/3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정확한 인구 통계는 없으나 각종 사료가 이를 증명한다. 고려가 막 멸망하고 4년차에 접어들 무렵인 조선 태조 4년 2월 19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대사헌 박경이 상서를 올리며 “백성 가운데 승려의 숫자가 10분의 3”이라고 명토박아 말하고 있다.중국 사서의 기록은 좀 더 많다. 〈송사(宋
한족의 중국이 영토와 문화에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사상에 대해서 기원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론이 있지만 대개 이민족과의 충돌이 잦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미 정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춘추전국시대라면 이미 기원전 이야기다. 그 주장에 따르면 한족의 중국 이외 지역은 동서남북 순서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다. 그런데 이 중화사상은 자발적이든 강요에 의해서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정 기간 공유된 세계관이었다. 정치나 외교는 차치하고 단어나 표현에 있어서도 우리가 이런 중화사상을
사찰의 중심 전각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은 대웅전(大雄殿)이다. 한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으로 번역되는 대웅(大雄)은 산스크리트어 ‘마하비라(Mahvra)’를 한역한 것이다.그런데 구글에서 마하비라를 산스크리트 철자 그대로 쳐 검색해 보면 한참을 넘겨도 석가모니 부처님 얘기는 찾을 수 없다. 8할 넘게 인도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바르다마나가 계속해서 검색된다. 부처님과 같은 지방에서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바르다마나가 ‘먼저’ 대웅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대웅이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지난 9월 2일 문화재청은 합천 해인사에 있는 희랑 대사 좌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 제999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나말여초 고승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상이 300여 개밖에 없는 ‘국보’로 승격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면에 글이 나갈 때쯤이면 한 달의 지정 예고가 끝나고 국보로 승격되어 있을 것이다.언론도 희랑 대사 좌상의 국보 승격에 대해 비교적 크고 상세히 보도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초상 조각이인 데가 깎고 칠한 솜씨가 사실적이기도 하고 또 유려하기도 해 그 가치에 충분히 수긍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언론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북한산 중흥사 ‘책 읽는 템플스테이가’ 올해도 계속되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불서’를 위주로 읽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나태주, 정호승, 문태준 등 시인도 초청했다. 주제도, 그리고 소재도 다양해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조용한 산사에서 책을 읽고 또 필자들을 만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절에서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불교가 사상의 주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학을 신봉하는 이들조차 공부 장소로 절을 피하지는 않았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해 우리나라 유학의 시
중국 도교의 불교 탄압중국 역사에는 ‘3무1종(三武一宗)’으로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네 차례의 대표적인 불교 탄압, 즉 ‘법난(法難)’을 가리킨다. 그 규모와 후과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불교사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3무1종 중 가장 폐해가 컸던 세 번의 법난에는 모두 도교 혹은 도사(道士)들이 연루되었다. 3무1종은 모두 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북위(北魏)의 태무제(재위 423~452), 북주(北周)의 무제(재위 560~578), 당(唐)의 무종(재위 840~846) 등 무(武)자가 들어가는 세 명의 왕
전통사찰 중에 물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세 곳이 있다. 범어사(梵魚寺), 오어사(吾魚寺), 만어사(萬魚寺)다. 세 사찰 모두 물고기와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를 하나씩 갖고 있다. 이렇게 사찰 이름에 ‘물고기 어(魚)’ 자가 들어가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반면에 사찰 장식 중에는 가장 흔한 생물 중 하나가 물고기다. 불교를 상징하는 사자나 코끼리보다 흔하고 연꽃만큼 지천이다. 사찰의 다양한 물고기 상징불구(佛具)를 살펴보자. 우선 목탁이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입, 눈, 머리, 몸통, 꼬리가 자연스레 보인다.
사찰에 다니고 불공도 드려본 사람들은 ‘침향(沈香)’이 익숙할 것이다. 절집에서 최고의 향공양 물품으로 쓰인다. 침향나무는 주로 중국 남부나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 남쪽 지방에서 자란다. 그런데 이 침향나무 전체가 우리가 아는 ‘침향’이 되는 건 아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벌레들의 침입이나 외부 충격 혹은 각종 병균의 침입으로 상처가 생기는데 침향나무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상처 부위에 진액을 만들어낸다. 흔히 ‘수지’라고 부른다. 나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한 그루당 5
꽤 오래전 얘기다. 문화재 관람료 징수 문제로 몇몇 사찰이 산문(山門) 폐쇄를 단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산문 폐쇄’라고 적어야 할 곳에 ‘삼문 폐쇄’라고 적고 말았다. 단순한 오타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산문과 삼문의 발음을 구별할 수 없어 한 실수 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켠으로 생각해 보면 삼문 폐쇄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 문을 세 개 통과해야 한다. 거쳐 가는 순서대로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이다. 이 문을 모두 막아버렸으면 삼문(三門) 폐쇄도 틀린 말은 아닐
지역풍과 유행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라는 유물을 볼 수 있다. 경주에 남산신성을 세울 때 세운 비다. 남산신성은 〈삼국유사〉에도 그 기록이 보이는데 “별본(別本)에 말하기를 건복(建福) 8년 신해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步)였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건복(建福) 8년 신해년’은 진평왕 13년, 서기로는 591년이다. 이 비는 한 기가 아니다. 비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6보에서 20보 사이에 하나씩 세워졌다.1보를 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4m 내외이니 10m에서
보천교 등 신흥민족종교계 부흥일제 의해 보천교 해체 후 쇠락민족종교 후퇴… 불교 쏠림 현상현 상황서 종교지형 변화 주목을코로나19 때문에 강제 소환되는 역사가 몇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1918년 봄에 시작돼 1919년 여름까지 1년 넘게 유행한 이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이 넘는 감염자와 50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기록했다. 당시 전 세계 인구가 16억 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치사율은 거의 10%에 육박했다.그런데 스페인 독감과 관련한 흔한 착각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페인 독
사찰에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다. 건물이나 조각은 물론이고 문양이나 그림에 있는 작은 조연들까지도 다 의미와 사연이 있다. 멀리 인도에서부터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중국을 거쳐 이 땅까지 전해져온 이야기도 있고, 인도는 빼고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잘 가공돼 이 땅으로 전해져온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땅에서 자생한 이야기도 우리 사찰에는 담겨 있다.중국에서 넘어온 것 중에는 숫자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탑이 대표적인데 팔각구층석탑처럼 수직(위)으로 1·3·5·7·9·13 등 양수를, 수평(옆면)으로 음수인 짝수를 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찰의 축선이 두 곳이 된 곳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하동 쌍계사를 들 수 있다. 쌍계사의 경우는 좁은 공간 탓에 중창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축선이 두 개가 됐다. 동서의 축선을 가진 대웅전 영역과 남북의 축선을 가진 금당 영역으로 나뉜다. 금당 영역의 중심 법당은 역시 금당(金堂)이다. 하지만 일반인은 금당에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없다. 선원이 있기 때문이다. 동안거 3개월, 하안거 3개월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이 같은 금당 자리는 옛부터 ‘설리갈화지지(雪裏葛花之地)’라고 했다. 아주 양지바른 곳이라 한겨울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거개는 곰과 호랑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우문이다. 단군신화이니 주인공은 당연히 단군이다. 물론 가끔 ‘인간 세상을 탐하여 환인에게 천부인 세 개를 받고 무리 3천과 함께 태백산에 표표히 나타난’ 환웅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환웅이 만들었으니 역시 틀린 대답이 아니다. 하지만 단군신화의 주인공을 곰과 호랑이라고 생각할 만큼 둘의 출연은 강렬하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신스틸러(Scene Stealer, 주연보다도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전쟁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목에 이끌려 클릭을 하게 된 사이트가 있다.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TOP3’다.3위는 1580년대 생이었다. 10~20대 임진왜란을 겪었고 40대에는 정묘호란, 50대에는 병자호란을 겪은 세대다. 2위는 1660년대 생이다. 10대 때 경신대기근, 30대 때 을병대기근을 겪은 세대다. 당시는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살던 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차라리 전쟁 때가 나았다’는 회고를 했을 정도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은 어디일까? 물론 땅 넓이로 따지자면 지역을 넘어 팔도 방방곡곡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 여럿 있지만 땅 넓이로만 놓고 ‘최대 규모’라고 하기에는 좀 머쓱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대답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은 개경 근처에 있던 흥왕사(興王寺)다. 건물의 수와 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문종 21년(1067년)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가 완성되었으니, 무릇 2,800칸이었으며, 12년에 걸쳐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숙박 기능을 하는
사찰에서 가장 복잡한 전각 중 하나가 ‘명부전(冥府殿)’이다.지장보살의 협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다시 그 좌우에 열 분의 시왕이 있고 시왕 사이사이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가 또 열 명 배치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판관 2명,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 2명이 있고 문의 입구에는 장군 2명이 마주보고 지키고 섰다. 시대에 따라 도교의 장군상이 금강역사상으로 교체된다. 모두 29체의 존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죄인을 잡아다 대령하는 졸리(卒吏)까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숙수사지에 세워진 ‘최초’ 서원‘남순북송(南順北松)’이라는 말이 있다. 한강 이남엔 순흥, 한강 이북엔 송도라는 뜻이다. 순흥은 지금의 경북 영주 일대를 가리킨다.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여기가 한때는 나름 번다한 지역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고려 말까지 얘기다. 순흥부(順興府)가 첫 번째 파란을 맞은 것은 세조 3년이다. 순흥으로 귀향 와 있던 금성대군(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사전에 발각된다. 1457년(세조 3년) 6월이었다. 그해 8월에 세조는 순흥부를 아예 없애 버린다.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