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인연으로 미얀마 향해‘미얀마의 아버지’ 등 인연고리김정숙 영부인 미얀마 방문 땐행사 수행단 업무 받아 돕기도불교학부 시절 받았던 도움들‘불연’으로 회향하는 계기 삼아“당신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나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네! 미얀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미얀마 사람들이 인연을 중시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약 6년전 미얀마에 방문해서 우연히 만난 NLD 원로의원의 비서분은 나를 보자마자 “전생의 딸 같다. 유학 오면 우리 연구소에서 머물러라”고 스치듯이 이야기했다. 유학을 하면
원한 있는 ‘낫’이 상당수잘 모시지 않으면 괴롭혀고난의 이유로 여겨지기도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경전 외우며 물 뿌리기도불교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잦은 방황으로 췌장염을 앓게 되셨다. 어린 마음에 술을 많이 마시고 병을 얻은 아버지가 많이 원망스러웠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한 후 친해진 스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토로했다.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스님은 “재희보살, 아버지를 원망하는 돌덩어리를 왜 가슴에 갖고 다니시오? 우리가 만난 것도 부처님 인연법인데, 아버
삶 속에서 ‘무주상보시’ 실천10가지 보살행 중 첫 번째인‘보시’가 인생 최고의 실천행승가 보시는 물론 특별한 날대중 전체에 공양 올리기도우리가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쉬울까? 오히려 일면식이 없는 사이라면 기대심 없이 줄 수 있다. 하지만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는 내가 친한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거나,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할 때 일말의 기대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예전에 한 친구가 스님에게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해주는 것을 받기만하고 돌려주지 않아서 고민이예요”라고 하자, 스
2020년도는 한·미얀마 수교 45주년이 되는 기념적인 해이다. 한국과 미얀마는 식민지 시기, 민주화시기와 같은 역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민주화운동시절과 같이 서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줬던 ‘친구’와 같은 사이이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으로 힘들 당시, 미얀마 정부는 5만달러 규모의 쌀을 보내줬다. 미얀마 민주화 인사들이 한국으로 망명했을 때, 한국의 민주화 세력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은 양 국인 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 큰 협력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올해는 한·미얀마
나라간 차이 허무는 이야기계모 괴롭힘에 의한 악업을부처님 가르침 통해 풀어내삶 속에 습합된 가르침 덕에일상서 선한 언행 항시 실천올해 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시상식을 휩쓸면서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했다.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요소 중의 하나는 ‘스토리’였다. 또 기생충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영어로 번역한다면 원작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도 기생충이 오스카 수상기념으로 JCGV에서 개봉을 했었다. 많은 미얀마 사람들이 기생충의 스
미얀마에 방문한다면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미얀마의 일출과 일몰이다. 태양의 빛이 하늘에 붉게 물드는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어디를 가면 미얀마의 가장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레(lnle)’라고 대답할 것이다. 인레 지역의 일출과 일몰이 더욱 빼어난 것은 잔잔한 호수의 비친 태양의 아름다움이 더해져서 일 것이다.인레호수는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해발 약 900m의 광활하고 잔잔한 호수로 길이 22km, 폭 11
나라의 지도자가 국가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통치의 원칙과 기준을 세워야 한다. 불교의 꽃을 피웠던 바간 왕조 시기 이후로 미얀마 왕들에겐 이상적인 왕의 상(相)이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것이다. 전륜성왕에게 통치의 기본적인 기준은 부처님의 법(法, Dhamma)에 있다. 전륜성왕의 의무는 부처님의 법을 현실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성들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는 복지를 제공하고, 흉악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린 시절에 들었던 미신은 나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 한다. 밤에는 절대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고, 문지방에는 되도록이면 앉지 않는다. 시험 보는 날이면 미역국을 먹고 미끄러워질까 두려워 미역도 쳐다보지 않았다. 시험을 잘 보고 싶은 마음에 척척 잘 붙는다는 엿과 찹쌀떡을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학창시절도 있었다. 숫자 ‘4’는 불길하다는 이유로 핸드폰 번호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과학적인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이지만, 비과학적인 미신은 어느 나라나 존재한다.
미얀마로 유학을 가기 전에는 해외에서 유학하는 친구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예를 들면 ‘문화가 달라서 생활 하는데 스트레스가 많아.’라고 말하는 친구의 고민에 완벽히 공감하지 못 했었다. 미얀마로 떠난 후 ‘직접 경험해야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소설가 루이스 라무르의 명언이 온 몸으로 이해가 되었다. 한국에서 십 여년동안 미얀마 사람들을 만나면서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미얀마 문화와 관습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학 첫 날부터 나의 오만은 와장창 깨지기 시작했다.운이 좋게도, 미얀마 집권여당인 N
우리는 살아가면서 찰나의 순간마다 수많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 자신의 체험과 사유 그리고 감정을 오롯이 소설·시·수필·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문학으로 승화시킨다. ‘책으로 한 나라의 상당 부분을 다닐 수 있다’고 유명한 영국의 문학가인 앤드루랭은 이야기했다. 문학은 한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을뿐더러 시대의 흐름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불교문학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다.대표적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불교문학은 신라시대의 향가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월명
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국어를 잊을 일이 없다. 모국어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구사하게 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통된 내적인 사고가 형성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언어의 중요성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 일제강점기 시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우리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철저한 일본어 사용을 강조했고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 하게 했다. 민족성을 말살 당하지 않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던 우리 선조들이 있기에 ‘한국의 얼’을 지킬 수 있었고,
샤프론 혁명은 스님들이 직접나서민주화 운동가들을 지지하는 시위평화적 반정부 시위로 국제적 관심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 만해 스님과 법정 스님의 글은 다른 작품들보다도 더 자주 읽게 된다. 스님들을 공경하는 마음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만해 스님과 법정 스님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불교가 사회에서 국민들과 함께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백성들과 함께 해왔지만 조선 시대가 되면서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이전 시대보다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두 스님의 공통점은
우리나라에서 스님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여자 옆에 스님이 앉으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전혀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혹은 ‘스님이 만석인 버스에 승차했다면 누군가가 비켜줘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불자라면 비켜줄 수 있지만 반드시 비켜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같은 질문에 우리나라식으로 대답을 한다면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미얀마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게 될 것이다.우선 미얀마에서는 스님 옆에 여성이 함께 앉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 있다. 맨 처음
다른 신남방정책 국가들에 비해 유독 미얀마는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미얀마 역사에서 비슷한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UN’ 과 ‘민주화’라는 두 단어이다. 미얀마는 우리나라보다 일찍 제 3대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이다. 미얀마 양곤에 가면 아시아인 최초로 UN 사무총장을 지냈던 우 탄트(U Thant)의 박물관을 발견할 수 있다. 양곤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러 갔을 때, 우 탄트 박물관을 거닐다가 그의 손자인 탄트민-우(Thant Myint-U)를 만나 적이 있다. 오랫동안 만나보고 싶었
한반도에서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민중들과 함께했던 삶 속에서 벗어나 산으로 가야만 했다. 미얀마의 불국토인 바간(Bagan)을 바라볼 때 마다, ‘조선시대 이전 시대를 살았던 우리나라의 왕들의 불심이 이처럼 깊었겠지’라며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에게 토로해 본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얀마는 과거 약 천년 전의 바간 시대때부터 현재까지 미얀마 지도자들의 불심은 매우 깊다. 미얀마 고대 왕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깊은 여행에서 잠시 벗어나 현대의 가까운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미얀마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올해 한국의 ‘부처님오신날’은 4월 30일이다. 국가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쉬는 법정 공휴일로도 지정되어 있다. 어릴 적에는 부처님오신날은 부모님 손을 잡고 절에 맛있는 비빔밥을 먹고 부처님께 삼배하러 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일년에 한 번 있는 부처님오신날 때 먹었던 비빔밥은 다른 때보다 더 맛있었다. 20대가 되어 불교학과에 입학하고 난 후 나에게 부처님오신날은 하나의 행사이자 축제가 되었다. 불교학과 학생들 중 몇 명만 뽑아 연희단을 꾸린다. 연희단에 뽑히면 연등회 행렬을 시작하기 전 신나는 노래에 맞춰 연희단 율동을 한
나라마다 새해 명절에 대한 풍습은 다르겠지만, ‘변화에 대한 설렘·즐거움·덕담’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분모이다. 미얀마 새해에 대해 미얀마 사람들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물을 서로에게 뿌리며 서로의 행운을 빌어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에게 물을 뿌리는 일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며 아침 막장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처음에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미얀마에 직접 살면서 겪어보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얀마의 새해 명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날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미얀마 새해에 물 뿌리는 이
역사서를 들여다보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을 통해 승리한 자들의 문화는 남고 패배한자들의 문화는 사라지거나 희미한 빛으로 기억될 뿐이다. 승전국(勝戰國)은 패전국(敗戰國)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미얀마 역사를 보면 예외의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바간(Bagan)’에 영향을 준 몬(Mon)족이다. 바간은 티베트-버마족이 세웠지만, 바간 시대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바간 왕조가 침략했던 따톤(Thaton, 몬 족이 세운 왕국) 왕국의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지배계층
2019년도 우리나라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미얀마의 바간(Bagan)이 등재되었다. 미얀마 국민들에게 바간은 오래전부터 자부심의 원천(源泉)이자, 삶을 마감하기 전 반드시 여행하는 곳이다. 그리고 미얀마 불교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미얀마는 13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버마족이 68%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미얀마 버마족의 뿌리는 바간 왕조에서 찾을 수 있다. 바간 왕조를 이룬 티베트-버마족은 중국 남조의 부용(附庸)민족으로 윈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 남조가 멸망하면서
미얀마는 우리나라 근대기와 부분적으로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식민지 시기·민주화운동이라는 비슷한 아픔을 극복했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시절, 미얀마 역사의 한 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줄 불교 유적의 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도시가 전설로만 존재할 뻔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인해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미얀마는 마지막 왕조인 꽁바웅(Konbaung) 왕조가 1886년에 영국에 점령당한 후 1948년 1월 4일에 독립하기 전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